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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17]새천년시대의 당파성(마 10: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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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070 2012.02.28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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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17]새천년시대의 당파성(마 10:34-42)

‘인자’의 의미

사복음서에 ‘인자’란 말이 82회 나온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세 복음서에서 중복 사용된 횟수를 제외하면 총 52회가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8장 20절 이후부터 총 29회 언급되었다.

‘인자’란 아람어 ‘발 에나쉬’(??º?¤ ??¨)의 직역이며,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다. 인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된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키실 때 사용하신 말이다. 복음서가 아닌 사도행전 7장 56절에서 스데반이 한번 예수님을 가리켜 인자라는 말을 썼을 뿐이다. 제3자가 예수님을 호칭할 때는 ‘하나님의 아들,’ ‘랍비,’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오실 그이’ 또는 ‘선지자’와 같은 말들이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춰서 사람의 아들이라고 호칭하신반면에 예수님이 선포하신 권위 있는 말씀들과 베푸신 기적들을 눈으로 보고 체험한 사람들과 마귀와 귀신 같은 영적 존재들이 그분을 일컬어서 ‘하나님의 아들’ 또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예수님의 권위의 진정성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와 사람을 구별하셨다. 마태복음 2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하셨는데, 인자와 사람을 구별하여 말씀하셨다. 성경 전체로 보면, 인자호칭이 세 가지 범주에서 사용되었다. 첫째는 이미 언급된 대로 예수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호칭하실 때 사용하셨다. 둘째는 ‘오실 그이’ 곧 메시아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셋째는 마가복음에서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련된 ‘수난자 인자’로 쓰였다(막 8:31; 9:9, 12, 31; 10:33, 45; 14:21, 41).

수난자 인자는 마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마가 특유의 메시아관이다. 유대인들은 인자가 민중의 슬픔과 수고와 고통에 마침표를 찍고, 그들에게 영광의 나라를 안겨줄 메시아이기 때문에 수난자 인자란 개념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유대인들에게 장차 오실 메시아 인자가 굴욕과 수난과 죽음을 당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가 세상을 심판해야할 권능과 영광의 메시아 인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난자 인자 메시아관은 유대인들에게는 없는 기독교만의 것이다.

수난자 인자 사상에서 나온 것이 영혼구원 사상이다. 이 영혼구원 사상은 현재구원으로써 미래구원을 성령님의 도움을 입어 이 땅의 삶 속에서 약속받고, 인침(직인)받아, 미리 맛보고, 누리는 축복을 말하는데, 유대인들에게는 없는 사상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영광의 인자’ 사상만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민족 구원, 이스라엘나라 회복 사상으로써 아직 이뤄진 적이 없는 미래구원이다.

구약에서도 인자란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 예를 보면, 에스겔서에서 저자 자신을 호칭하는 말로써 100회 이상 사용되었고, 시편에서는 단순한 사람으로서(8:4; 80:17) 사용되었으며, 다니엘서에서는 종말론적 왕국의 지배자 또는 이스라엘로서 표현되었고(7:13-14), 위경인 제1에녹서에서는 초인적 존재로 선택된 자로 보았으며, 2세기 초에 랍비 아키바(Akiba)는 다윗 왕국의 메시아로 보았다.

새천년시대의 검(劍)

메시아 인자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매우 무거운 선언을 하셨다. 34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다. 누가는 검(劍)이란 말 대신에 분쟁이란 말로 대신하였다(눅 12:51). 그런데 이 분쟁이 사랑하는 가족으로까지 확대된다고 말씀하셨다. 36절에서 사랑하는 가족이 오히려 자기의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37절에서는 가족을 인자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인자에게 합당치 않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여기서 분명히 이분법적 편 가르기를 선언하신 것이다. 새천년왕국의 시민권은 혈통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에 좌우되지 않고, 메시아 인자를 믿고 따르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좌우된다는 말씀이다.

34절의 화평은 참 평화가 아니라, 거짓 평화를 말씀하신 것이다. 싸움도 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도 않은 채 얻으려는 평화, 침묵하고 있다가 승자 쪽에 대충 묻어가려는 희지도 검지도 아니한 회색 평화를 말한다.

검(劍)은 당파성을 말한다. 편 가름을 말한다. 진보를 의미한다. 진보세력들은 강한 당파성을 요구한다. 색깔이 빨갛지 않으면, 절대로 용납지 않는다. 검(劍)은 결단을 촉구한다. 좌파든지 우파든지 결단하라는 것이다. 희든지 빨갛든지 색깔을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새천년왕국이란 측면에서 보면 차든지 덥든지 하라는 것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새천년왕국에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이념 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은 당파성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편을 나누고, 자기편의 승리를 위해서 강한 당파성을 요구한다. 그래야 혁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은 중립을 싫어한다. 불의한 상황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억압자를 유리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정치가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니셨지만, 제자들이 중립에 서기를 원치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당파성을 요구하신 이유는 갈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갈등이 사회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자들,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기존질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자들과 삶이 고달파서 새천년시대를 갈망하는 자들 사이에서 생긴 갈등이기보다는 신앙과 불신앙의 갈등 또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이었다. 유대교가 잘못된 전통 때문에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멸시한 반면, 기독교는 오히려 그들의 편을 들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편을 들지 않고, 가난하고 죄 많은 자들의 편을 드셨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회적 계급들 사이에 긴장과 대립이 노출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복음서들, 특히 마태복음이 당대의 사회적 갈등에 주된 관심을 갖고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죽음이냐? 두 갈래 길인데, 중립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쪽 길을 택해서 가야만하는 상황은 평화가 아니라, 갈등이고, 대립이며, 예리한 검이다. 그 칼날이 혈연과 우정을 베어 끊는 한이 있더라고 옳은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칼로 베이듯이, 나눠지지 않으면 공멸한다. 이것이 검의 의미이다.

두 갈래 길

인생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주후 100년경에 쓰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일명 <디다케>란 책에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인데, 두 길의 차이가 큽니다.”라고 적고 있다. 성경도 두 갈래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넓고 편한 멸망의 길이 있는가하면 좁고 거친 생명의 길이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성도들이 걸어야할 길은 좁은 길이요 생명의 길이다.

계시록 14장 1-7절을 보면, 좁고 험하지만, 생명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던 사람들이다. 고문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사람들이다. 거짓말하지 않고, 흠이 없는 신앙생활로 예수님의 인도하심대로 순종하며 따랐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 불이 섞인 유리바다 해변에 서서 새 노래, 승리의 노래, 모세의 노래, 예수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계 15:2-3). 이들은 다시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더위에 쓰러지지 않고, 햇빛에 화상을 입지 않고, 생명수 샘물을 마시게 되며, 모든 눈물을 씻기며, 구원의 흰옷을 입으며,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될 자들이다(계 7:16-17).

계시록 14장 8-11절을 보면, 넓고 편하지만, 멸망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거짓 신인 우상의 편에 섰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압했던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자들이며, 유황이 타는 불 못에서 고통을 당하고, 그 고난의 연기로 인하여 밤낮 쉼을 얻지 못할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12절은 우리 성도들이 인내로써 신실한 믿음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신 뜻이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일시적이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제국은 황제의 후원아래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루고 있었다. 이 ‘팍스’(pax), 곧 ‘평화’는 평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전쟁과 죽임과 착취와 탄압의 대가로 얻어지는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한 평화는 세상이 주는 팍스(pax)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shalom)이었다. 하비 콕스는 이 샬롬, 곧 평화를 “황제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강제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평화”라고 하였다. 이 평화는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인자가 십자가에 희생당하심으로써 얻어진 평화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당파성은 거짓 평화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검(劍)은 당파성이다. 편 가름이다. 검(劍)은 예리한 나눔이다. 절심함이다. 색깔을 분명히 하는 것이고, 좌파든지 우파든지 한쪽에 서는 것이다. 희든지 빨갛든지 색깔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새천년왕국이란 측면에서 보면 차든지 덥든지 하는 것이다. 앞만 보고 쟁기질을 하든지, 쟁기를 놓고 떠나든지 하는 것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다. 검(劍)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날카로운 결단이다. 이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요, 상을 받는 일이다.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다. 예수님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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