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강28]새천년시대에서의 실천윤리 2(마 1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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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28]새천년시대에서의 실천윤리 2(마 19:1-30)
새천년시대: 여성들이 보호받는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성공을 거뒀던 장소였다. 그러나 그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예루살렘에는 몇 번이나 올라갔었는지 요한복음을 뺀 나머지 복음서들로써는 알 수 없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다가 메시아신분을 드러내신 후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고, 그 곳에 도착해서 일주일 만에 십자가에 처형당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9장은 이 죽음의 여행 막바지인 유대지경에서 생긴 사건들의 기록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로부터 받은 세 가지 시험은, 배고픈 민중에게 빵을 공급할 수 있겠는가, 메시아인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겠는가, 빼앗긴 약속의 땅을 되찾아 줄 수 있겠는가 이었다. 그런데 동일하고 비슷한 시험들이 메시아신분을 드러내신 다음에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율법사들에 의해서 되풀이되었다. 16장에서는 빵 문제와 관련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했고, 19장에서는 율법문제를 그리고 22장에서는 정치와 종교문제를 시험하였다.
19장에서 제기된 율법문제는 이혼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간음과 관련하여 5장 31-32절에서 이미 한 차례 언급된바가 있다. 시험은 두 가지 물음이었다. 이유가 있다면 아내를 버려도 좋겠느냐는 것과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했는데, 이혼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모세가 명한 이혼증서는 가부장사회에서 남편들이 아내들을 함부로 내쫓지 못하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유대사회에서 이혼은 대부분 아내가 남편한테서 버림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피해가 전적으로 여성들의 몫이었다. 특히 그것이 간음으로 인한 것일 때는 여성이 돌에 맞았을 수도 있고, 사회에서 매장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일 이혼녀가 이혼증서를 지참하고 있다면, 그녀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많이 줄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재혼도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도록 한 것은 이혼의 자유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명기 24장은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들이 열거된 곳인데, 그 가운데서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이 이혼법이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여성들의 기본권이 보장되고 있지만, 아직도 근동의 아랍권에서는 여성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 하물며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에는 어떠했겠는가? 이혼증서도 없이 버림당하는 여성들이 다반사였을 당시에 이혼증서를 주라는 모세의 율법은 여성들에게 최소한의 기본권을 인정한 법이었다. 그런데 이 법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마치 이혼을 허용하는 것처럼 악용되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참뜻과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간파하셨다. “우상숭배하지 말라”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들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영적이든, 육적이든 사랑의 언약이 깨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허락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죄를 허락하셨다고 해서 죄의 삯을 면해준 것이 아닌 것처럼, 이혼을 허용하셨어도 우상숭배만큼이나 이혼을 싫어하신다.
새천년시대: 어린이들이 보호받는
2절에서 육신의 병을 고치신 예수님은 3-15절에서 사회적인 병폐를 문제 삼으셨다. 약자들인 여성과 아이들이 보호받아야할 자들임을 교훈하셨다.
새천년시대는 남편으로부터 부당하게 버림당하여 상처를 입는 여성들이 없는 곳이다. “사람을 지으신 이”(4절)의 뜻은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한 것이다.”고 하셨다(참고 5:31-32). 타고났거나 타의나 자의에 의해서 고자가 된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독신으로 살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말씀도 하셨다. 남녀가 짝을 이뤄 한 몸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맺어진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신다. 우상숭배와 간음을 몹시 싫어하시는 만큼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를 끝까지 이어가신다. 하나님의 사전에 이혼이란 말은 없다. 운명적으로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편을 드시며, 끝까지 책임을 지신다. 우리와 같은 약자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당신의 외아들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은 동일한 맥락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고 사랑받기를 원하신다. 인간은 한평생 죽을 때까지 배우자만 사랑하고 헌신하겠다고 결혼서약을 해놓고서도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마음을 줄 수가 있다. 심지어 결혼서약을 파기하고 이혼도 불사한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전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그가 원했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혹은 뭔가가 탐나서 거짓으로 서약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 사랑하시면, 한번 마음을 주시면, 한번 선택하시면, 한번 서약하시면, 결코 번복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본받아 사는 곳이 새천년시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약자들인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보호하고 사랑해야 한다.
앞장인 18장에서 언급하였듯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13세 이하의 어린이들과 여성들은 가부장이 사고팔거나 버릴 수 있는 소유물에 불과하였다. 또 원칙적으로 유대인들은 13세 이상의 남성만을 이스라엘로 보았다. 그런 이유로 13세 이하의 어린이들과 여성들은 그들의 계수에서도 빠졌다. 그들에게는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뜰에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회당에서는 본당에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뿐 아니라, 회당에서 이뤄지는 기도모임의 최소인원인 ‘민얀’(minyan)에도 들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개방하신 새천년시대는 이런 차별의 담들이 모두 허물어진 곳이다. 남녀의 차별과 연소의 차별뿐만 아니라, 민족의 차별, 신분의 차별, 계급의 차별까지 모두 헐어버린 사건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었다. 이 모든 차별들이 제거된 시대가 바로 새천년시대이다. 천국은 순진무구한 어린이들 여성들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더 많은 관심과 돌봄과 사랑을 받는 곳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다”고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여주셨다.
새천년시대: 가난한 자들이 복을 받는
16-30절에 등장하는 청년은 율법을 잘 지키는 정형적인 유대인들의 대표이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착실한 맏아들의 범주에 속한 유대인이다. 이 청년의 물음이 앞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시험하는 물음과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진정성을 가진 물음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십계명과 토라계명들을 모두 지킨 나에게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영생”이란 말이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매우 낯선 개념이었다는 점, 16절에서 이 청년이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는 점, 또 이 청년이 호기심을 품고 영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해왔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순수한 물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영생”이란 말이 마태복음에서 처음 등장한 곳은 18장 8-9절이다. 예수님은 어린이나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거나 죄를 범하는 손과 발과 두 눈을 가지고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혹은 한 눈만 가지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을법한 청년은 평소 십계명과 토라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혹 자신만큼은 영생을 얻을 자에 속하지 않겠느냐는 자신감을 가지고 예수님께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적으로 더 높이 도약해야할 단계들이 남아 있었다.
부자 청년은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킨 신본주의자였다. 그러나 진정한 신본주의(하나님사랑)는 인본주의(사람사랑)란 사실을 망각한 자였다. “온전해 지는” 일 즉 사람사랑의 실천을 요구받았을 때, 가진 재물 때문에 결단에 실패하였고, 더 높은 실존단계에로 도약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그래서 최상의 실존단계에 올랐던 제자들과 비교대상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가 가진 재물은 그로 하여금 윤리-종교적 단계를 뛰어넘어 바늘귀로 비유된 기독교적 헌신단계에로 들어설 수 없게 하는 덩치 큰 낙타였다. 움켜 쥔 것을 놓지 않고서는 좁은 구멍에 손을 넣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표현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마 23:24)는 표현과 함께 랍비문학에 속한 비유법이다. 고대의 랍비문학에 “코끼리를 이끌어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는 사람” 또는 “바늘귀로 통과하는 코끼리”란 표현이 있다고 한다.
재물은 분명 인간의 우상이다. 결코 부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재물을 소유한 자가 그것을 우상시할 가능성은 더 높다. 하나님은 재물을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싫어하신다. 부자를 혐오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혐오하신다. “부자”는 제1복에서 강조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반대개념이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와 대조가 되는 표현이다. 이들 말씀은 재물이 많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난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구약시대의 욥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고, 삭개오(눅 19:1-10)와 아리마데 요셉(마 27:57)을 비롯한 수많은 부자들을 봐서도 그렇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천국을 소유할 복이 있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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