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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37]새천년시대의 임박한 개방 1(마 2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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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977 2012.05.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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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37]새천년시대의 임박한 개방 1(마 24:1-28)

새천년시대: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한 주간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로부터 수일간 성내에서 정치종교지도자들과 격하게 논쟁을 펼치셨다. 마태는 예수님의 이 논쟁들을 그것들이 실제 일어난 주후 30년 상황에 국한하여 보도하지 않고 교회가 출범하고 40-50년이 지난 70-80년대의 초기 교회들이 직면한 상황에 연결시켰다. 예수님이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받았던 배척을 교회가 그 후로도 반세기 동안 받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주후 70년 유대-로마전쟁의 패배로 크게 위축당함으로써 더 이상 기독교를 핍박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예루살렘교회의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이 흩어짐으로써 이방인 교회들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이 기록된 주후 70-80년경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유대교적 기독교의 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 지금의 기독교가 되는 전환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기독교가 이후 300년간 로마당국의 박해를 받는 새로운 위기의 시작점이었다.

마태복음 24-25장은 새천년시대의 임박한 임재에 관한 8개의 비유를 비롯해서 종말에 있을 일들 즉 천국이 임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천국의 특성을 설명한 13장을 중심축으로 하여 가장 먼저 실린 5-7장이 천국의 입문에 관한 설교로써 갈릴리호수에서 가까운 산에서 선포한 산상설교였다면, 이것에 대칭을 이룬 24-25장은 천국의 개방에 관한 설교로써 유대교지도자들과 논쟁을 끝내시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감람산에서 선포한 산상설교이다. 감람산으로 가시려고 성전을 나오실 때 제자들이 성전돌과 규모에 놀라자, 예수님께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고 예언하셨다. 이 예언은 40년 후에 유대-로마전쟁 때 성취되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앉아 계실 때 제자들이 물었다. 3절,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24-25장이다. 여기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부분은 이것을 ‘주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제자들의 질문만을 놓고 본다면 그런 뜻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비록 마태가 교회가 출범된 지 반세기가 지난 주후 70-80년경에 이 사건들을 기록하였고 또 초기교회들이 직면한 위기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감람산설교를 주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교훈으로 삼고자했을지라도, 이때는 아직 새천년시대의 개방 즉 교회가 출범되기 이전이고, 재림이란 말조차 없던 때이므로 제자들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을 주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질문으로 물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제자들을 포함한 유대교인들에게 종말은 도래한 메시아가 개방할 ‘올람 하바’(Olam Ha-Ba) 즉 ‘다가올 세상’을 말한다. 그들에게 다가올 세상이란 빼앗긴 가나안땅의 회복과 다윗왕국의 재건을 뜻한다. 스승에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무슨 징조를 보면 주께서 왕이 되어 나라를 세우시고 또 우리가 당신의 나라에서 출세하게 될지를 알 수 있습니까?”고 물은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상왕국이 아닌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낙원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50여일이 지난 오순절 날에 교회시대가 출범되고 난 다음부터이다.

새천년시대: 시작된 종말

이런 점 때문에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동문서답이었다. 현재의 것을 물었지만 미래의 것을 답하셨고, 속세의 것을 물었지만 내세의 것을 답하셨으며, 문자적인 것을 물었지만 영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그 이유를 알려면,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내용들을 제자들이 거의 깨닫지 못했던 시기와 반세기 후에 복음서에 그 사실들이 기록될 당시에는 충분히 깨닫고 있던 두 다른 시기의 정황들이 복음서에 겹쳐있다는 점을 인식해야한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는 민중과 제자들이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유대인들은 제1모세가 갖게 해준 가나안땅을 주전 587년에 완전히 빼앗긴 이후 지금까지도 제2모세가 될 메시아의 사명을 가나안땅을 회복시키고 다윗왕국의 영광을 되찾게 해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그때의 세상을 ‘올람 하바’(Olam Ha-Ba) 즉 ‘다가올 세계’(World to Come), ‘종말시대’ 또는 ‘마지막 시대’라 부른다. 제자들과 민중의 관심은 온통 여기에 쏠려 있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교회시대로써의 새천년시대에 쏠려 있었다. 예수님의 살아생전에는 그분의 천국복음이 교회시대를 여는 선포였다는 것을 몰랐지만, 복음서가 기록될 때에는 100퍼센트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복음서에 담았던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 속에는 예수님의 메시아사역에 관한 깨달음의 내용인 시작된 현재종말과 유대인들의 전통적 의미의 미래종말이 함께 담겨 있다.

시작된 현재종말이란 교회시대를 말한다. 유대인들이 희망한 다가올 세상 또는 기독교인들이 희망하는 주의 재림과 동시에 나타날 영원한 세상의 영적인 실현을 말한다. 그래서 실현된 종말이라고도 불린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도래할 미래종말이 이미 시작되어 현재 실현되어 있는 종말이란 뜻이다. 종말이란 세상의 끝을 의미하지만, 우리가 희망하는 지복을 뜻하기도 한다. 신학에서 말하는 구원, 거듭남, 중생, 칭의, 인침, 보증, 선취 등이 모두 미래종말을 약속받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들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종말을 하나님의 확증과 약속으로 또 성령의 보증(보증금)과 인침(도장 찍음)으로 이미 소유하고 있고, 실현하여 시작하고 있으므로 현재종말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시작되었거나 실현된 현재종말이란 것이 없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조상들이 하나님께 받은 가나안땅의 약속뿐이고, 성령님께 보증 받고, 인침 받고, 그 축복들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과 보호하심과 변호하심과 치료하심 속에서 맛보고 누리며 경험하는 것이 없다. 유대인들에게 시작된 종말의 축복이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다가올 세상‘이란 그들 민족만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올람 하바’는 유대인의 제2의 출애굽 사건, 곧 유대인의 제2의 대 구원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은 영적인 사건이 아니고, 육적인 사건이다. 문자적인 다윗왕국의 회복을 말한다.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 국가가 건국되어 60여 년간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현재의 세속국가를 ‘올람 하바’라고 믿는 유대인은 거의 없다. 메시아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그가 세울 신정국가가 따로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천년시대: 환난시기

교회시대로써의 새천년시대는 완성이 아니라, 미래종말의 약속 위에 서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궁극적인 천국을 향해가는 광야길이기 때문에 수많은 환난들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히브리인들이 가나안땅을 앞두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광야길을 걸었던 것과 같다. 비록 제자들이 세상 끝에 있을 징조를 물었지만, 24장에서 예수님이 답한 환난과 재난과 재앙들은 재림시기를 빼놓고는 모두 광야길 즉 긴 역사에서 발생될 사건들에 대한 것이지 역사의 어느 특정시기(칠년대환난)에 집중적으로 발생될 사건들만을 예언하신 것이 아니다. 24장에 66-73년의 유대-로마전쟁과 64-68년의 네로의 박해가 특정시기로 암시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기가 주의 재림이나 세상의 끝은 아니었던 것과 같다.

유대인들이 발 코크바와 샤베타이 제비를 포함한 30여명의 거짓 메시아가 출현했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삼국시대이후 궁예를 비롯해 많은 거짓 미륵들이 출현했었던 것에서 보듯이, 거짓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받지 말라는 경계는 종말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기에 모든 성도들이 늘 경계해야할 교훈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4-14절에 언급된 난리, 전쟁, 기근, 지진과 같은 대재난과 박해로 인한 배도와 순교 곧 배신, 체포, 구금, 고문, 참형을 감당해야하는 대환난은 과거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지 어느 특정시기에만 일어나도록 예정된 환난이 아니다(계 7:14).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박해당하는 성도들을 격려한 베드로전서, 히브리서, 계시록을 비롯한 성경전서가 담고 있는 메시지이다(눅 21:19, 히 10:36, 계 13:10, 2:7,11,17,26, 3:5,12,21, 21:7).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말씀은 재림과 종말이 있기 전에 장기간의 교회시대가 지속될 것과 그 시기 동안에 환난들이 닥치게 될 것을 경계한 말씀이다.

15-28절은 환난의 중대성, 심각성, 긴박성에 대한 경계이다. 22절,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는 박해기간을 단축하지 않으면, 극심한 박해를 견디고 믿음을 지킬 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기간을 단축할 것이니, 끝까지 참고 믿음을 지켜 승리자가 되라는 말씀이다(롬 8:18, 고후 4:17, 계 2,3,11-13장). 15절,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단 9:27, 11:31, 12:11)은 박해의 심각성을 사례로 든 것이다. 주전 167년에 자신을 ‘신의 계시’라 주장한 에피파네스 안티오쿠스 4세(175-164 BC)가 유대교와 토라를 사형으로 금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 부정한 동물로 봉헌했던 사건을 상기시킨 것이다. 20절의 안식일의 언급도 안티오쿠스의 헬라군이 유대인들이 모든 일을 중단하는 안식일에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던 사건을 상기시킨 것이다. 16-19절의 급히 산으로 도망하라는 경고는 66-73년 유대-로마전쟁 때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빵과 물이 희귀한 예루살렘성에 5개월간 갇혔다가 사로잡히거나 죽었던 것을 상기시킨 것이다. 21-28절의 큰 환난은 박해에 대한 경계이다. 박해가 아무리 극심해도 그 기간이 짧을 것이기 때문에 미혹을 받지 말고 믿음을 사수하여 승리자가 되어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라는 교훈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환난이나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가시밭길을 영웅적으로 오르라고 말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고 계시기 때문이며, 성령께서 힘을 보태고 계시기 때문이다. 참된 신앙은 고난을 이기는데 있지, 고난을 면하는데 있지 않다. 어떤 큰 환난과 고난도 믿음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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