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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39]새천년시대의 임박한 개방 3(마 2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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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898 2012.05.3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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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39]새천년시대의 임박한 개방 3(마 25:1-46)

새천년시대: 깨어서 준비함

마태복음 25장은 8개의 비유들 가운데 마지막 세 개, 즉 신랑을 맞으러간 열 처녀들(1-13), 주인의 달란트를 맡는 세 청지기들(14-30), 양과 염소무리(31-46) 비유들이다. 재림의 날과 때를 알지 못하고 또 그것이 도둑처럼 닥칠 것이므로 세심한 준비, 충성스런 섬김, 선한 행실로 “깨어 있으라”는 지시이다. 이 명령은 24,25,26장에 각각 한 번씩 나온다. “어느 날에” 주의 재림이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에(24:42),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25:13)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기 직전에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26:38)고 지시하셨다.

신랑을 맞으러간 열 처녀들(1-13)은 모두 등을 준비하였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더디 올 것을 염려하여 등과 함께 별도의 기름병을 준비하였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신랑이 더디 올 것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등만 챙기고 기름병은 챙기지 않았다. 이 비유의 핵심은 신랑이 더디 온다는 점이다. 재림의 지연과 임박을 동시에 강조한 비유이다. 교회시대가 주의 재림이 어느 날 어느 시에 임할지 모르는 ‘아직’과 ‘이미’의 긴장 속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레오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하나님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사람에게 일러주시지 않는데, 그 이유가 사랑하며 살라는 뜻이라고 하였듯이, 마태는 하나님께서 어느 날 어느 시에 주께서 재림할는지를 알려주시지 않는데, 그 이유가 근신하여 깨어 있으라는 뜻으로 밝히고 있다.

1절의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이다. 지중해 연안세계의 혼인잔치는 해질 때부터 시작된다. 신랑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가서 종교의식을 치른 후 신부와 들러리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거나 신부의 집에서 혼인잔치를 열었다. 들러리들은 등을 들고 나가 마을입구에서 신랑을 기다렸다가 일행을 맞이하여 결혼식장으로 안내하는 일을 맡았다. 2절에서 그들을 미련한 자들과 지혜로운 자들로 구별한 것은 신구약성경에서 흔히 쓰인 히브리인들의 문학적 표현이다.

5절의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는 교회시대가 장기간이 될 것과 재림이 지연되는 동안 성도들이 나태하여질 것을 암시한 것이다.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에 성도들은 지연되고 있는 주의 재림에 대해 묻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해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롬 11:25), 누가는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눅 21:24), 베드로는 주님께서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벧후 3:9)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24장 48절에서 재림이 지연된다는 생각이나 아예 없다는 악한 생각을 경계하셨다.

9절의 “너희 쓸 것을 사라”는 구원의 은총이 극히 개인적이어서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도 그와 함께 나눠가질 수 없는 것임을 암시한다. 구원의 은총은 개개인 각자가 개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10-13절에서 기름병을 따로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여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실제상황이 아니라, 주께서 재림하신 후에 열리는 혼인잔치에서의 상황을 암시하신 것이다.

새천년시대: 적은 일에 충성함

주인의 달란트를 맡는 세 청지기들(14-30)의 비유에서 세 청지기들은 주인에게 각자의 재능에 맞게 주인의 달란트를 책임지게 된다. 여기서 달란트는 재화가 아니라 책임이며, 부의 분배가 아니라 책임의 분배이며, 각자의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배분되었음을 말한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청지기와 두 달란트를 맡은 청지기는 각자의 능력을 100퍼센트 발휘하여 맡은 달란트를 배로 불렸다. 자기의 재산을 불린 것이 아니라, 주인의 재산을 불렸고, 제 몫을 불린 것이 아니라, 주인의 몫을 불렸다. 그들이 칭찬을 들은 것은 맡은 달란트를 배로 불린 때문이 아니라 맡은 책임을 성실히 수행한 때문이다. 다섯 달란트를 열 달란트로 불린 사람과 두 달란트를 네 달란트로 불린 사람의 차이점은 책임수행이 아니라 능력수행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따지실 것은 능력수행이 아니라 책임수행이란 점을 강조한다.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청지기가 보너스를 받은 것도 능력수행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책임수행에 따른 것이다. 두 달란트의 책임수행보다 다섯 달란트의 책임수행이 훨씬 더 많은 노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를 받아서 땅에 묻었던 청지기는 자신의 안일과 유익을 추구할 뿐 책임수행을 하려하지 않았다. 주인의 것을 잃음으로써 떠안게 될 책임추궁과 위험을 피하려고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 애써봤자 제 것이 되지 않는다는 이기적 판단 때문에, 열심히 일해서 이익을 남겨봤자 주인이 차지할 것이고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는 악한 생각 때문에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였다. 우리나라 전래동화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부잣집에 두 명의 머슴이 있었다. 계약이 끝나는 마지막날밤에 주인이 찾아와서 두 머슴에게 최대한 가늘고 단단하게 새끼줄을 10자 정도씩 꼬도록 지시하였다. 그 밤만 지새면 주인과도 남남이 되는 터라, 한 사람은 대충하자는 생각으로 굵게 조금만 꼬고 잠들었고, 다른 사람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정성껏 꼬았다. 떠나는 날 아침 주인은 어젯밤에 꼰 새끼줄을 가지고 광으로 오라고 지시하였다. 두 머슴이 모이자 주인은 광에 들어가 엽전이 가득한 상자를 열면서 주인이 두 머슴에게 말하였다. “내가 여러분의 수고덕분에 부자가 되었으니 보답을 하려고 하네. 어젯밤에 꼰 새끼줄에 꿸 수 있을 만큼 엽전을 꿰어서 고향에 돌아가 잘살게.” 정성껏 새끼줄을 꼰 머슴은 많은 엽전을 꿰어 가져갈 수 있었지만, 대충 아무렇게나 새끼줄을 꼰 머슴은 한 닢도 꿸 수가 없었다.

신랑을 맞으러간 열 처녀들의 비유가 준비하는 자세를 강조했다면, 주인의 달란트를 맡은 세 청지기들의 비유는 책임수행을 강조하였다. 맡은 책임을 성실히 수행한 두 청지기는 능력에 상관없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23절)라고 동일한 칭찬을 받았지만, 한 달란트를 받아 땅속에 묻었던 청지기는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란 책망과 함께 제몫이 될 뻔했던 달란트를 빼앗긴 채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

주인의 달란트를 맡는 청지기들의 비유는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교회와 성도들이 주의 재림 때까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충성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6:33)는 말씀이다.

새천년시대: 지극히 작은 자를 돌봄

예수님의 재림직후에 문자적인 천년왕국과 또 그 왕국이 유대인들의 회복된 왕국이 될 것이라고 믿는 시대구분설자들은 “지극히 작은 자”가 천년왕국의 시민들인 유대인들이며, 이방인들이 그들에게 행한 친절과 해코지에 따라서 양과 염소로 나뉘는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또 그들은 교회시대가 유대왕국이 회복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장기간의 공백을 메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구약을 신약에 맞춰 해석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약을 구약에 꿰맞춰 해석한다.

양과 염소무리를 심판하는 “임금”은 마태복음에 여러 번 쓰인 표현이다. 하나님나라의 천지대군이신 하나님을 뜻할 때도 있고, 교회천국의 임금이신 예수님을 지칭할 때도 있다. 이 비유에서는 예수님을 뜻한다.

양의 무리는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보살핀 그리스도인들이다. 반대로 그들로부터 보살핌을 받은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도 그리스도인들이다. 보살핀 자들이나 보살핌을 받은 자들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들이다.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은 먹고 입고 마실 것이 없어서 가난하고 노숙자가 되며 병들었거나 범법행위로 인해서 감옥에 갇혔기보다는 박해시대에 신앙의 정절을 지키려다가 환난을 당한 자들이다. 박해를 피해야 하기 때문에 직업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며 주거지를 떠나야하는 상황, 그래서 가난해질 수밖에 없고, 광야사막 길에서 목마름과 노숙과 헐벗음을 겪어야하는 상황이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일단 체포되면 극악한 고문을 받기 때문에 처형을 면해도 감옥에서 병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1801년부터 1860년대까지 조선인 가톨릭 신자들이 일만 명 정도 순교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그들에게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잔인한 고문이 아니라 배고픔이었다고 한다. 박해를 피해 도망가야 할 때,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숲속 길로 이동하기 때문에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깊은 숲속의 도경계나 군경계로 피신해야하기 때문에 먹을 양식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먹을 양식을 주고, 마실 물을 주며, 집안에 숨겨주고, 씻겨서 옷을 갈아입히며, 병간호와 옥바라지를 하는 것은 곧 주님께 하는 선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양의 무리들은 부지중에 주님을 대접했던 것이다(히 13:2). 40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또 반대로 염소의 무리들에게는 45절에서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고 선언하시면서, “언제 우리가 주님을 대접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항변하는 자들의 입을 막으셨다.

이 예수님의 비유를 읽고 충격을 받아 삶 자체를 송두리째 바꿨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톨스토이요 테레사였다. 톨스토이는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에 꽂혀서, 테레사는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에 꽂혀서 행동하는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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