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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40]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최후승리 1(마 2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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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104 2012.06.0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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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40]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최후승리 1(마 26:1-25)

새천년시대: 거룩한 싸움

마태복음 26장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에서 “다”(pantas)는 5-7장, 10장, 13장, 18-20장, 24-25장에 실린 다섯 개의 설교를 암시한다. 여기서 다섯은 모세오경에서 모형을 갖는다. 이들 다섯 개의 설교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5-7장의 산상수훈은 새천년시대에서 복을 받을 자들, 곧 천국을 소유할 자들에 대한 교훈이며, 유대인들이 버린 “율법의 더 중한 바 사랑과 정의와 긍휼과 믿음”(23:23)을 강조한 새 윤리법 즉 신약법이다. 10장은 새천년시대를 알리는 출정식 설교로써 지도자들을 뽑아 파송하시면서 행한 일곱 개의 지시내용이다. 13장은 새천년시대의 특징과 성격을 설명한 8개의 천국비유이다. 18-20장은 임박한 투쟁과 죽음을 앞두고 행한 8개의 설교로써 새천년시대에서 실천해야할 새 윤리들이다.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둔 모세의 신명기 설교에서 모형을 갖는다. 24-25장의 설교는 종말과 심판에 관한 8개의 비유이다. 이 마지막 설교는 예루살렘에서 보낸 생애 마지막 한 주간의 전반기에 행한 것이며, 도적같이 임할 마지막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근신하며 날마다 깨어 있으라는 권면이다.

21장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거사(擧事)요, 히브리민족이 요단강을 건넌 것에서 모형을 갖는다. 이후 28장까지는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모형을 갖는다. 새천년시대를 개방하기 위한 예루살렘에서의 거룩한 싸움에서 예수님은 25장까지 카리스마 넘치는 말씀으로 전세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26장부터는 싸움의 전세가 예수님께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2절의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와 3-4절의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와 14-16절의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는 말씀들은 싸움의 전세가 예수님께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거룩한 싸움에서 최후승리를 확신하셨기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엄습하고 있고, 사랑하는 제자들마저 배신할 것을 아시지만 물러서지 않으셨다.

7절의 “한 여자”는 요한복음 12장 3-8절에 의하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이고, “매우 귀한 향유”는 순전한 ‘나드’이며,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는 머리뿐 아니라 발까지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9절의 “비싼 값”은 가룟 유다의 평가액으로 300데나리온이다. 300일 노동자 품에 해당되는 가치이다. 여인이 만난 예수님은 재화로 평가될 수 없는 무한한 가치였다. 그 고귀한 마음이 그녀를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최초의 인물이 되게 하였다.

15절의 “은 삼십”은 30세겔로써 120일 노동자 품에 해당된다. 노예의 몸값이 이 정도였다. 향유가격을 300데나리온으로 평가했던 가룟 유다는 스승을 노예로 팔아넘긴 셈이다. 마리아와 비교해볼 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얼마나 저평가했는가를 가늠하게 한다.

새천년시대: 외로움과의 싸움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숨 가쁘게 보내셨다. 장소가 예루살렘이요 성전이었던 데다가 연중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유월절이 시작되는 주간이었고, 예수님이 메시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 때문에 또 제2유월절 해방에 대한 기대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되었고, 여차하면 혁명에 가담할 태세였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정치종교지도자들에게는 쓴 소리요, 민중에게는 속 시원한 소리였다. 이에 정권의 안정을 꾀하는 최고지도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처형할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이날이 수요일이었다.

이런 정황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게 될 것”(2절)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명예와 권세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들떠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갈릴리를 떠나오면서 이미 몇 차례 수난을 예고하셨고, 그 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지만, 예수님은 철저하게 홀로 남겨졌다. 당신의 번민과 외로움을 위로해줄 자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조차도 외면하셨다. 인간들의 오랜 외로움을 달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만백성의 주가 되시기 전에 먼저 버림받고 외면당한 자들의 아픔, 짓밟힌 자들의 외로움을 맛보셔야만했다. 복음송의 가사처럼,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주님”이시고, “세상이 측량 할 수 없는 지혜로 모든 만물 창조하신” 주님이시며, “모든 나라와 모든 보좌, 이 세상 모든 경이로움보다, 이 세상 모든 값진 보물보다 더욱 귀하신” 주님이시지만, “십자가 고통당하사 버림받고 외면당해야만”하셨다. “짓밟힌 장미꽃처럼” 우리를 위해 죽음을 당해야만 하셨다.

새천년시대에는 외로움이 외로움을 달랜다. 이날 수요일에 예수님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셨다. 외로움이 깊었던 예수님은 분명 나병환자 시몬의 오랜 외로움을 보셨을 것이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시몬의 집을 찾으셨을 것이다. 나병은 양성이든 음성이든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한 버림과 아픔의 상징이다. 그런 그와 식탁에 앉으신 것은 인간의 오랜 아픔을 달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마음이 역시 오랜 외로움을 겪었을 한 여인에게 읽혀졌다. 어쩌면 그녀는 그 누구보다 가장 큰 위로가 필요했던 여인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그녀가 값비싼 향유병을 갖고 예수님께 와서 상체를 비스듬히 뉘이고 음식을 잡수시던 예수님의 머리위에 향유를 부어 외로움을 달래드렸다. 사람들은 간절히 예수님의 위로를 받고자 하나 정작 위로가 필요한 예수님의 외로움을 읽지 못하였다. 예수님과 삼년간이나 동거 동락했지만, 위로의 대상으로만 살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외로움을 읽지도 못했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위로가 필요했던 이 무명의 여인은 위로받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값진 것으로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을 위로해 드렸다. 오늘도 예수님은 인간들의 오랜 외로움 속에 계시면서 위로를 기다리신다.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고 한 제자들의 속마음은 가난한 자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욕심에 눈이 멀어 있었다. 명예와 권세에 눈이 멀어 재화보다 더 값비싼 가치를 보지 못했다.

새천년시대: 세속적 욕망과의 싸움

예수님이 고뇌하며 갈등했던 싸움은 세속적인 욕망과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이겨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예수님의 노력은 끊임없는 기도로 나타났다. 예수님은 민중이 끈질기게 자기를 찾고 요구하는 것이 세속적인 욕망 때문이란 것을 알고 계셨고,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줄 표적을 구하는 민중에게 사랑의 하나님을 깨우치려했지만, 민중의 환멸은 극에 도달하였고, 결국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한 제자들의 배신을 대변한 것이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정치종교지도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그들은 눈엣가시인 예수님을 체포하여 처형할 생각이었다. 그들의 음모가 수요일에 이루어졌다.

주후 30년 유월절 예비일은 목요일이었다. 유월절 식사는 18단계로 이뤄지는 긴 종교 식사이다. 예비일 오후 3시에 유월절 양을 잡는데, 이는 성전에서 저녁희생이 드려지던 시간이다. ‘쉐히타’(shechitah)로 불리는 도살은 ‘쇼헽’(shochet)이라 불리는 도살자 즉 랍비나 제사장이 대행한다. 그리고 그날 즉 예비일 저녁에 18단계의 유월절 식사를 하였다. 그날 예비일 저녁은 우리 시간으로 목요일이 끝나가는 밤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금요일이 시작되는 밤이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하신 것과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이 모두 이 금요일 한날 즉 20여 시간 안에 이뤄진 일이었다.

예수님은 일찍부터 폭력을 수반하는 세속적 메시아가 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셨다. 사랑의 메시아로 왔지, 정치적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민중의 영원한 반려자이기를 바랬지, 통치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민중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갖고 싶은 것만 갖고자 했다. 예수님의 사랑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현실문제에 눈이 어두운 무력한 사내 또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예수님께 거는 기대가 컸던 만큼 민중의 환멸은 순식간에 증오로 바뀌었다. 그들이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어설픈 혁명가였을 바라바를 놓으라고 외친 것도 다 이 증오심 때문이었다.

제자들 가운데는 가룟 유다만이 예수님이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치기 위해서 민중의 기대를 저버린 채 분노의 불길 속에 몸을 던지려한다는 것을 알고 고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마음은 정을 줬던 여인에게 환멸을 느껴 헤어지려 해도 쉽게 헤어질 수 없는 사내의 마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배신은 예수님께 환멸을 느낀 자들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가혹한 현실에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랍비여, 당신은 사랑보다 큰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보다 지금 당장 효과가 있는 것을 원합니다. 현실에 쓸모 있는 것밖에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불의와 절망에 상처 입은 민중과 함께 계셨고,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를 원하셨지만, 욕망의 신을 섬겼던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기꺼이 홀로써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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