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

역사를 읽는 패러다임(렘 29:11-14)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11,561 2011.10.15 06:43

본문

역사를 읽는 패러다임(렘 29:11-14)

역사를 읽는 패러다임

역사를 읽는 패러다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앙으로만 읽는 사관이요, 둘째는 정세로만 읽는 사관이며, 셋째는 정세와 신앙 모두로 읽는 사관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종종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 예언자들은 그 이유를 시내산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때의 심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의 매였다. 부모가 잘못한 자녀에게 회초리를 드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그것이 항상 가볍게 끝난 것은 아니다. 심한 경우 멸망까지 시키셨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왕국이 주전 722년에 멸망하였고, 남유다왕국도 주전 586년에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재앙은 하나님의 오랜 기다림 끝에 또 많은 경고와 회개촉구가 있은 후에 닥쳤다. 재앙에 대한 전조는 항상 있었다. 이 전조를 읽는 패러다임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관적인 느낌이나 신앙만으로 읽고 해석하는 틀(패러다임)이고, 둘째는 정세나 지정학적 관계에서만 읽고 해석하는 틀이다. 셋째는 정세의 흐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두 읽고 해석하는 틀이다.

이 세 번째 틀(패러다임)로 국제정세를 읽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조를 해석한 사람들이 이사야, 우리야,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원인을 국제정세나 지정학적인 탓만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맺은 시내산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았다. 우상숭배가 가장 큰 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시고 미쁘시기 때문에 회개하면 반드시 용서하시고 나라를 원상회복시켜 주실 것으로 믿었다. 만일 그들이 국제정세나 지정학적 탓만으로 보았다면, 회복운동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2,600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그들의 나라에 대한 희망(Ha-Tikvah)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근거가 바로 이들 예언자들의 역사를 읽는 패러다임에 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맺은 시내산 언약을 얼마만큼 성실하게 지켰는가에서 찾았다. 왜 우리 민족이 이 엄청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는가, 왜 우리 민족이 이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는가를 묻고, 그 해답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얼마만큼 성실하게 지켰는가에서 찾았던 것이다. 결론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 결론을 근거로 예언자들은 나라와 민족을 대상으로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을 펼쳤다. 그들이 당대의 국제정세의 흐름을 잘 읽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한다. 회복에 대한 예언자들의 희망의 근거는 국제정세의 흐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있었다는 점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스라엘의 남북분열왕국들이 멸망하기 직전에 처한 국제상황은 구한말 조선이 처한 상황과 비슷했다. 앗수리아, 바벨론, 이집트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였다. 이 상황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당대의 패권국가인 앗시리아를,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등을 돌림으로써 각각 패망하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남 왕국 유다와 동맹을 맺었던 앗시리아로부터 군사적인 패배를 당했고 나라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 때 살아남은 남왕국 유다는 한 세기 후에 신흥패권국가인 바벨론을 등지고 종이호랑이로 변했던 이집트에 의존했기 때문에 패망하였다.

남북 분열왕국들 멸망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을 정치적으로 보면 국가지도자들이 국제정세(國際情勢)를 잘못 판단했거나 민족주의에 매몰되어 실리외교를 펼치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맺은 시내산 언약, 특히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속적으로 어김으로써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이사야, 우리야,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은 국제정세의 흐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민족이 벼랑 끝에 놓였다는 것을 읽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남북분열왕국들이 모두 망한 것은 이들 예언자들의 정책조언과 회개촉구를 묵살했기 때문이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리아에 멸망당하고, 113년이 흐른 주전 609년에 이집트의 느고 2세가 앗수리아와 협력하여 바벨론를 저지하기 위해 터키의 남쪽지방을 향해 북진하는 과정에서 유다왕국을 손에 넣었다. 요시아 임금이 느고 2세를 므깃도에서 저지하던 중에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죽은 요시아를 이어 아들 여호아하스가 대를 이었으나 이집트의 느고 2세는 여호아하스를 이집트로 끌고 가고, 대신에 여호야김을 임금으로 세웠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주전 605년에 이집트와 앗수리아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에 패함으로써 이집트는 종이호랑이였던 것이 드러났고, 앗수리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유다왕국은 이집트 대신에 바벨론에 조공을 바쳐야했다. 그리고 에스겔과 다니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때 처음으로 바벨론에 끌려갔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복종하고 배반하지 말라고 했지만, 여호야김 임금은 이 하나님의 종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벨론을 배반함으로써 주전 598년 제2차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당시 유다왕국은 이집트의 원조를 받아 바벨론을 막아야 한다는 반 바벨론파의 압력을 받고 있었고, 암몬, 베니게, 모압, 에돔 등의 주변국들이 반 바벨론 동맹을 맺고, 유다왕국의 가담을 종용하였으며, 하나냐와 스마야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로부터는 하나님이 반드시 바벨론을 꺾어 버리고 예루살렘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거짓 평안’을 예언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예루살렘에 진군한 바벨론 군대는 18개월 만에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켰고, 성전을 약탈했으며, 많은 수의 유력 인사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유일한 장소인 예루살렘만은 결코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거짓된 안일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던 결과였다. 이 거짓 안일에 빠지게 한 당대의 예언자들이 하나냐와 스마야와 같은 예언자들이었고, 그들은 이집트에 편향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에 활동했던 예레미야는 달랐다. 예레미야는 친바벨론파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매국노로 간주하는 정적들로부터 늘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실제로 친바벨론파였던 우리야는 참된 예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친이집트파인 왕에게 처형을 당했다(렘 26:20-24). 그도 역시 예레미야처럼 침략세력인 바벨론에 복종하라고 매국적인 예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야는 이집트로 망명을 했지만, 이집트와 유다왕국 사이에는 종주권계약이 체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범죄자인도협정과 같은 국제법에 의해서 조국으로 끌러와 처형되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영성

예레미야는 국제정치 판도를 꿰뚫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앗수리아와 이집트의 쇠퇴를 읽고 있었다. 남왕국의 여호야김이 다스렸던 시기인 주전 609-598년에는 유다왕국의 멸망이 코앞에 닥쳤다는 징조들이 많았다. 주전 605년에 느부갓네살은 갈그미스에서 앗수리아와 이집트연합군을 괴멸시켰고, 이로 인해서 이집트는 유다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걸었으며, 앗수리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호야김은 바벨론의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애를 썼다. 이때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에게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고 이집트에 의지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로 인해서 예레미야는 민족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아 죽음의 위기를 수차례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다윗언약과 성전과 왕권이 유다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여호와의 성전’이 자기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민족주의자들과 정치지도자들에게 성전을 마술적으로 믿지 말고 즉시 회개하고 금식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들을 귀가 없었던 여호야김은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주전 598년에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고, 바벨론의 공격이 있기 직전에 사망했다. 결국 유다왕국은 다음 해인 597년에 바벨론 군에 능욕을 당했고, 왕위에 오른 지 3달밖에 되지 못한 18살의 여호야긴과 지도자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다. 주전 605년에 이어 7년 만에 맞는 두 번째 유배였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이자 요시야의 아들이었던 시드기야를 여호야긴을 대신해서 왕으로 임명했다. 시드기야 역시 친 이집트파와 하나냐와 스마야와 같은 거짓 예언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하나냐는 포로가 된 사람들이 신속하게 돌아오고, 성전 보물들도 곧 되찾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의 예언을 부정하고 유다가 회복되려면 적어도 70여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하면서 바벨론에 반기를 들지 말고, 복종하도록 권했다.

예레미야가 애국애족주의자들에게 혹심한 핍박을 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들의 닫힌 눈과 막힌 귀로 보고 듣게 되었을 때, 예레미야는 분명 매국노였기 때문이었다. 예레미야는 토굴과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시위대 뜰에 갇히기도 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충고를 거부하고 신하들의 말을 듣고 이집트의 편에 서서 주전 589년에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다. 바벨론은 시드기야의 반역 소식을 듣고 즉시 군대를 예루살렘에 파견했고,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다. 바벨론 군사들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했고, 시드기야의 눈을 뽑아 소경을 만든 다음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이로써 제3차에 걸쳐 바벨론의 침략과 유배가 완결되고 유다왕국은 철저하게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끝내 살아남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는 길은 분명해 보인다. 하나냐와 스마야와처럼 세상사를 신앙의 눈만으로 봐서도 안 되고, 세속인들처럼 정세의 흐름만으로 봐서도 안 되며,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우리야처럼 정세의 흐름과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읽는 밝은 눈을 가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회개해야할 필요를 깨닫게 되고, 회복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야가 품었던 그 희망을 2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붙잡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