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없는 것들(요 1:9-14,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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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없는 것들(요 1:9-14, 10:22)
주인공이 없는 크리스마스
요한복음 10장 22절에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수전절(Feast of Dedication)은 음력을 쓰는 유대력으로 키슬레브(Kislev)월 25일에 시작되는 8일간의 빛의 축제를 말한다. 키슬레브월은 양력으로 11-12월에 닿기 때문에, 수전절은 11월말에서 12월 하순에 시작되는 예루살렘 성전 재봉헌절이다. 2011년은 크리스마스와 겹치는 12월 20일 저녁부터 28일 저녁까지 지켜진다. 또 유대인들의 수전절은 찬양과 감사의 축제이자, 헬라로부터 주권을 회복한 광복절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이 수전절이 유대교의 크리스마스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유대교의 수전절은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와 매우 비슷한 축제이다.
첫째, 이 두 축일들이 세속문화에 매몰되어 극도로 상업화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수전절은 유대교문화가 헬라문화의 유행과 탄압으로 인해서 심하게 붕괴되던 시점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에서 비롯되었다. 알렉산더 대왕(356-323 BC)이 지중해연안의 세계를 제패한 이후로 헬라지배를 받았던 유대인들은 언어, 관습, 의상 등에서 헬라문화에 동화되어갔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신의 계시’라 주장하여 ‘에피파네스’라고 불렀던 안디옥쿠스 4세(175-164 BC)는 유대교의 대제사장직책에 헬라문화에 동화된 제사장을 세우거나 돈을 받고 대제사장직책을 팔았고, 결국에는 유대교를 폐지시켰으며, 예루살렘성전을 제우스에게 봉헌하였고, 유대인들이 부정한(treyf) 동물로 생각하는 돼지를 제단에 바치게 함으로써 성전을 더럽혔다. 또 안디옥쿠스는 유대교의식들과 율법서의 소유를 사형으로 금지시켰다. 그 대신에 유대인들에게 연극, 스포츠, 대중탕사용, 나체운동, 테두리 넓은 모자 착용과 같은 헬라문화와 관습을 강요하였고, 이에 젊은 제사장들 가운데는 제단을 버리고, 원반던지기를 연습하며, 할례의 흔적을 지우는 수술까지 받았다.
이때 하스모니안 가문의 유다 마카베오(Judah Maccabee)가 주도한 민족주의 열심당원들과 바리새파의 전신인 ‘하시딤’(Chasidim)이 힘을 합세하여 안디옥쿠스의 정책에 대항하였다. 주전 167년에 시작된 혁명은 만 3년만인 주전 164년에 성공리에 끝났고, 유대교 금지령을 해제하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예루살렘성전은 하나님께 재봉헌되었다. 이로써 유대인의 주권이 회복되었고, 주전 64년 로마제국에 망할 때까지 약 100년 동안 하스모니안 왕조가 국민을 통치하였는데, 유다왕국이 바벨론에 망하고 1948년에 재건될 때까지 걸린 약 2,600년 동안에 이 100년이 유대인들이 누린 유일한 주권회복 기간이었다.
이처럼 문화혁명을 기념하는 수전절이 이방문화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은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다고 뜻있는 유대인들이 한탄한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이다. 크리스마스는 세속화와 상업화 되었다. 수전절이나 크리스마스에서 어느 순간 주인공들이 사라졌다. 수전절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이 잊히고 있듯이,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잊히고 있다. 문화혁명이 다시 일어나야한다. 예수님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으로 되돌려 드려야 한다. 성탄트리의 현란한 불빛에 가려 잊히신 주님을 되찾아야 한다.
성탄찬양이 없는 크리스마스
둘째, 수전절과 크리스마스 두 축일들이 세속문화에 매몰되어 예배와 찬양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수전절은 성전이 찬탈되고, 예배가 무너진 자리, 곧 하나님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이 세워지고 정결한(kosher) 제물이 아닌 부정한(treyf) 제물이 드려지던 자리를 회복시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한 축일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도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주권, 곧 사단에게 농락당한 하나님 나라를 되찾고, 하나님께 드리는 참 예배를 회복시킨 사건이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구약성경을 전통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함으로써 주의 만찬이 시행되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로(요 4:23-24) 밝혀 놓았다.
수전절은 승리를 축하하는 마카베오 축제이다. 그러나 군사적인 승리를 축하하는 것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대한 영적인 것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며 외부의 적인 헬라인들에 대한 승리만이 아니라 오히려 더 위험한 우리 내부의 적을 이겼음을 축하하는 감사제이다. 수전절은 또한 민중의 이익을 슬그머니 배신해온 무사 안일한 소수의 특권 권력계층에 대한 민중의 승리, 곧 귀족정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이다(<월간 성서와 함께>1986.1.제118호).
오늘날에 유대인들은 수전절의 의미를 다민족 속에서 유대인 소수민족이 그들의 문화적 주체성과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카베오 전쟁을 유대인이 타민족과 다를 수 있다는 권리를 찾기 위해 펼친 성전(聖戰)으로 생각한다. 또 압제에 대항하는 길은 그 압제자들이 없애고자 한 가치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본다. 유다 마카베오와 하시딤(구별된 자들)은 안티옥쿠스 4세에 대항하여 그가 없애려고 한 유대교 가치와 예루살렘성전과 제단을 지켜냈다.
크리스마스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하신 모든 영적인 것의 승리, 곧 죄악으로 인한 심판에 대한 승리, 모든 질병과 죽음의 저주에 대한 승리, 모든 불행과 좌절과 절망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크리스마스도 여러 종교들 속에서 기독교의 주체성과 종교적 신념을 지켜 나가야한다는 점을 교훈한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를 수 있다는 권리를 지키고,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비록 빛과 생명 그리스도의 교회가 수 만 개의 교회들 가운데서 가장 작고 힘없는 교회일지라도 그것을 없애고 무시하려는 사람들 가운데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가치를 지켜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런 기쁨과 감사의 크리스마스에 마땅히 있어야할 성탄찬양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있다. 성탄찬양은 고사하고 캐럴조차도 듣기가 쉽지 않다. 9월부터 성탄찬양이나 캐럴을 들려주는 필리핀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뼛속깊이까지 세속국가란 점이 씁쓰름하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재봉헌이다. 축일의 주인공을 되찾아 제자리로 돌려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과 감사의 축제로 되돌리는 것이다.
참 빛이 없는 크리스마스
셋째, 수전절과 크리스마스 두 축일들이 세속문화에 매몰되어 참 빛이 없다는 점에서 같다.
탈무드에 따르면, 성전 재봉헌 때 성소를 밝힐 정한(코숴) 기름이 단 하루 분량뿐이었다. 밤마다 성소의 등대를 밝힐 기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름은 기적적으로 소진되지 않았고, 정한 코숴 기름을 만드는데 필요한 8일 동안 지속되었다. 수전절을 8일간 지키는 것은 바로 이 기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수전절은 전쟁의 승리를 기리는 축일만이 아니라, 성소의 등대를 밝힌 기름의 기적을 기리는 축일이다.
수전절이 갖는 중요한 예표는 숫자 8과 등불에 있다. 8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헬라어 ‘예수’를 숫자로 바꾸면 ‘888’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 초기부터 예수님은 숫자 8로 표기되었고, 주일 또한 숫자 8로써 상징되었다. 또한 이 8은 복음을 상징하는 숫자로써 ‘넘친다,’ ‘넉넉하다,’ ‘충분하다’는 뜻을 갖는다. 우리를 능히 구원하고 남을 만큼의 넉넉함을 말하는 것이다. 빛으로써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고 넘치는 분이시다.
크리스마스는 어둠을 빛에로, 혼돈을 질서에로, 죽음을 생명에로 바꿔놓으신 예수님의 임재를 축하하는 축일이다. 크리스마스는 모든 어둠의 권세를 물리친 빛의 축제이다. 크리스마스는 암울한 흑암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희망의 빛, 생명의 빛,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축하하는 축일이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빛이 아니라, 영원하고 밝은 빛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 탄생의 기적을 기리기 위한 축일이다.
그런데 씁쓸하게도 세상은 이 빛을 거부한다. 요한복음 1장 9-11절은 말하기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묵은 그늘을 없애려 오신 예수님께서 이 넓은 세상에 임할 곳이 외양간밖에 없었다는 것, 인간의 오랜 외로움을 달래려 오신 예수님께서 이 많은 집들 중에 머물 곳이 광야밖에 없었다는 것, 인간의 질긴 질고를 고치려 오신 예수님께서 이 많은 사람 중에 의탁할 곳이 골고다밖에 없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과연 우리는 이 성탄절에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가정에 혹은 우리의 교회에 모실 수 있는 공간을 비워놓고 있는가? 탐욕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 재물로 가득한 우리의 집 때문에 머무실 곳이 없어 결국에는 또 동굴무덤을 택하실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은 아닌가? 더 이상 빼앗길 것 없는 부모처럼 정녕 우리 가운데서 잊히신 것은 아닌가? 성탄트리의 현란한 불빛에 가려 정녕 잊히고 계신 것은 아닌가?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봉헌이다. 축일의 주인공을 제자리로 돌려드리는 것이다. 구원의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의 축제로 되돌려드리는 것이다. 동지이후 어둠이 빛에 밀려나듯이, 온 누리에 그리스도의 참 빛이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작고 초라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에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모실 공간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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