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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01]새천년시대를 향한 탈출(마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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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1 조회 11,442 2012.01.04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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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01]새천년시대를 향한 탈출(마 1:1-17)

새천년왕국운동

새천년시대를 향한 희망은 인간의 오랜 고독에서 비롯된다. 작년 한해만하더라도 지구와 지구인 다수가 심한 몸살을 앓았다. 지진, 해일, 홍수, 화산폭발과 같은 자연재해뿐 아니라, 분쟁, 시위, 경제위기와 같은 인재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의 고독과 아픔은 갈수록 극에 달하고 있다.

인간은 오랜 고독과 아픔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들을 해왔다. 가장 잘 알려진 시도가 히브리인들의 출애굽사건이다. 국가를 이루지 못했던 떠돌이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인들의 억압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할 뿐 아니라, 가나안 땅이란 대망을 품고 사막 길을 40년간이나 행군한 끝에 그 땅을 쟁취한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우리 민족의 극한 빈곤과 독재로부터의 탈출도 근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성공사례 가운데 속한다. 조선말기로부터 한 세기 동안 우리 민족은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일제강탈로부터 동족상잔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처참하게 빼앗기고 부서지고 망가졌고,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로 추락하였다. 그러나 반세기만에 괄목할만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일궈내었다. 오랜 고독과 가난과 압박의 서러움으로부터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새천년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양극현상과 개인주의는 깊어지고, 협동정신과 공동체의식은 엷어지며, 소외계층의 신음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70-80년대 한국신학의 흐름은 민중신학이었고, 민주운동의 사상적 토대였다. 그 영향력이 커서 불교계조차 민중불교를 말할 정도였다. 민중이 봉기하여(메시아가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며, 새천년왕국운동을 펼쳤던 신학이었다. 그 운동의 핵심은 한국교회가 민중의 한과 신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며, 민중의 한과 갈망 속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은 한의 사제로서 민중의 한을 풀어주고 상처를 싸매주며 위로하는 자라고 하였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오랜 고독과 아픔에서 탈출을 시도하였고, 그 중심에 항상 종교가 있었으며, 종교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렇다고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15세기 초 체코 보헤미아의 타보르파(the Taborite)가 이끈 천년왕국운동과 16세기 초 독일에서 토마스 뮌처가 농민의 난을 이끈 천년왕국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수행불교에 구세주와 새천년왕국사상을 집어넣으면 미륵불교가 된다. 미륵은 재림주 예수님과 같고, 도솔천은 낙원과 같으며, 미륵경에서 말하는 용화세계(龍華世界)는 계시록에서 말하는 천국왕국과 같다. 미륵불교의 이런 가르침은 불교의 열반과 윤회사상에 모순되지만, 민중의 한을 위로하고 새천년시대의 도래를 희망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천년왕국사상과 함께 많은 이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조선에서는 19세기에 최제우(1824-1864)가 창도한 동학을 중심으로 전봉준과 농민들이 일으킨 동학혁명이 대표적이다.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는 홍수전(1814-1864)과 농민들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1850-1864)이 대표적이다. 동학혁명이 미륵신앙에 기반을 두었다면, 태평천국은 기독교신앙에 기반을 둔 새천년왕국운동이었다. 이 운동들도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새천년시대를 꿈꾸는 인간의 희망마저 꺾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왕국의 실패

마태복음 1장은 새천년왕국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첫 번째 희망의 성취와 실패 그리고 두 번째 희망의 성취를 예고하고 있다. 첫 번째 희망의 실패란 절정기에 이른 다윗왕국의 붕괴 즉 인간왕국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리고 두 번째 희망의 성취예고는 하늘왕국의 개벽을 의미한다. 인간왕국이 필연적으로 갖는 유한성, 제한성, 일시성, 불완전성 때문에 그곳에서는 참 정의와 평화와 안식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마태는 영원하고 완전하며 영적인 하늘왕국의 개벽을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통해서 예고하였다. 따라서 마태가 선포한 두 번째 희망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유배이후 예수님의 탄생까지 580여 년간 기대하고 꿈꿨던 다윗왕국의 재건이나 회복이 아니라,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영원하고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것이다.

이 땅에서 추구하는 정의와 평화와 안식은 영원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그것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며, 흥하고 망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은 항상 영원하고 영적인 확고한 토대,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세속에의 지나친 집착은 인간에게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많이 벌어도, 아무리 많이 쌓아도, 아무리 건강해도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둔다면, 가난해도, 무식해도, 병들어도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다.

마태복음 1장 1절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겉보기에는 유대인 혈통의 계보인 듯이 보여도, 실상은 새천년시대의 하늘왕국의 도래를 희망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계보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적극적으로 몸을 바쳐서 쟁취했던 네 사람의 이방 여인들, 즉 다말과 라합과 룻과 밧세바가 나온다. 그리고 처녀의 몸이지만, 아기예수의 잉태를 믿음으로 수용했던 마리아가 나온다. 모두가 적극으로 몸을 바쳐 새천년왕국을 수용한 믿음의 여인들이었다.

새천년왕국의 희망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으로 온 인류를 위해서 성취된다는 것이 마태의 역사관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가나안 땅의 희망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며 문자적인 것으로써 유대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의 첫 번째 희망과 두 번째 희망이 모두 문자적으로 가나안 땅과 유대민족에 관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편협한 민족주의사상 때문에 그들이 애써 일군 왕국이 멸망하고 말았다.

마태복음 1장 17절의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는 이스라엘 왕국의 출범과 발전기를 말한다.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이 씨앗을 뿌리고 모세가 싹을 틔웠으며 다윗이 열매를 맺게 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는 왕국의 쇠퇴기와 멸망을 말한다. 솔로몬이 죽자마자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졌고, 북이스라엘왕국이 먼저 망한 후 136년 만에 남유다왕국도 멸망하였다. 여기까지가 인간왕국의 첫 번째 희망의 성취와 실패에 관한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오랜 고독과 아픔으로부터 영광스럽게 탈출하여 가나안 땅을 쟁취하였고, 영토를 넓혔으며, 국제무대에 서는 데까지 성공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읽지 못함으로써 그들의 성공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였다.

하늘왕국의 개벽

마태는 그 오랜 인간의 고독과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영적인 새천년왕국시대를 활짝 여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 속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것은 인간왕국이 멸망한 이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왕국의 개벽이었다. 그것은 노예와 떠돌이였던 히브리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쟁취한 가나안 땅을 그토록 소중히 여겼지만, 다 빼앗긴 후 또 다시 예전의 노예와 떠돌이의 신세로 돌아간 다음에, 그들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활짝 여신 새천년왕국의 출범이었다. 그 시작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이요, 기독교의 출범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라는 세속국가가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 곧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요한은 성도들에게 마지막이자 세 번째 희망인 새천년왕국 또는 신천신지를 선언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시대의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의 삶을 광야시대로 살도록 권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발붙이고 있는 현시대를 영원히 완전하고 완벽한 세상으로 살 것이 아니라, 잠시 스쳐지나가는 나그네로 잠정적이고 유한한 세상을 살면서 보다 밝고 발전된 새천년왕국을 향해서 부단히 정진하여 걷데, 그 길이 비록 가시밭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요, 광야사막 길일지라도 당당하게 영웅적으로 걸어야할 것을 권하였다.

히브리인들의 광야시대는 가나안땅을 바라보는 종말론시대였다. 동시에 광야시대는 하나님의 세키나(구름기둥)가 인도하던 이동성막교회시대였다. 이 광야교회는 오늘 이 시대의 상징이요, 모형이었다.

이 세상을 가나안땅으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유한하고 일시적인 가치들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그것들을 뛰어 넘어 영원불변한 세계를 향하여 순례의 발걸음을 옮겨야한다. 이것이 성도의 광야의식이요, 새천년왕국운동이다. 성도는 멈추지 않고 전진한다. 아브라함처럼, 히브리인들처럼 자기가 안주한 불편한 자리에서 탈출할 수 있어야 한다. 안주하면 망하고 만다. 성도는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 붉은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계 15:2-4),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날이 오기까지 성도는 힘차게 전진해야 한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은 위기를 맞고 있다. 자칫 실수하면 돌이킬 수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경제뿐 아니라, 군사와 국제정치에서 그렇다. 중국과 러시아의 강세는 미국과 일본까지 합세한 4강의 틈새에 끼인 대한민국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구한말 조선이 처했던 국내외상황을 닮아가고 있다. 이스라엘의 분열왕국들이 멸망하기 직전에 처했던 국내외상황을 닮아가고 있다. 남북은 대치상황에 있고, 한반도의 지배권을 노리는 중국과 러시아는 더욱 거칠어져가고 있으며, 동맹국인 미국은 우리 국민의 배신에 울분을 삭이고 있다. 지구촌의 경제위기는 곧바로 대한민국의 위기임을 웅변이라도 하듯이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어려워져가고 있다. 기독교에도 위기는 벌써왔다. 오름이 있으면, 내림이 있다는 듯이, 채 오르기도 전에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우리 각자가 안주한 터전에서 희망에로 탈출하지 않는다면, 임진년의 시작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할 것이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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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희
샬롬 교수님 귀하신 자료 잘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