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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07]새천년시대로써의 천국과 복(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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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354 2012.01.3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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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07]새천년시대로써의 천국과 복(마 5:1-3)

새천년시대로써의 천국

마태복음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예수님이 제2모세, 즉 제2출애굽사건을 이끄실 또는 제2대(大)구원사건을 성취하실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모세의 형 아론에 비교될 수 있다. 그의 역할은 집회에서 주 강사의 등단을 소개하는 MC와 같다. 주인공의 등장을 알리고, 그의 길을 예비하는 매니저와도 같다.

모세는 출애굽 후에 광야사막에서 특히 시내산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새천년시대를 위해 토라(Torah) 즉 613개의 계명들(Mitzvot)을 하나님의 뜻으로 전달하였다. 이 계명들의 핵심이 십계명이다. 이 계명들은 모세시대 또는 광야시대를 끝낸 다음에 가나안시대에서 적용될 율법들이었다. 우리 예수님도 광야에서 신약교회시대라 일컫는 천국 즉 새천년시대를 위해 복음을 주셨는데, 특히 산상(山上)에서 수훈이라 일컫는 복음의 말씀을 전하여 주셨다. 이 수훈의 핵심이 팔복이다.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에로 넘어가는 과도기 즉 예수님 시대를 끝낸 다음에 신약교회시대에서 적용될 복음들이었다.

그러나 신약교회시대를 천국시대, 새천년왕국시대 또는 가나안땅의 시대로 보는 것은 영적이고 선취적인 의미이지, 문자적이고 실질적인 의미가 아니다. 새천년왕국시대 또는 가나안땅의 시대를 하나님으로부터 약속과 보증과 인침을 받고, 미리 맛보고 누리는 것이지, 그 시대가 아직 문자적으로 실제로 임한 것은 아니다. 문자적인 새천년왕국의 성취는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이뤄질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시대가 새천년왕국시대라고 믿는 사람들이나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교회시대인 현시대가 새천년왕국시대라고 믿는 사람들조차도 문자적으로는 현시대가 여전히 가나안땅을 희망하고 그 나라를 향해서 전진하는 광야시대라고 본다.

한편 새천년왕국시대가 영적으로 “이미” 시작되었다는 현재종말이나 시작된 종말개념이 없는 유대인들은 새천년왕국, “올람 하바”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들이 원하는 제2모세, 모쉬아크(Moshiach)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그가 출현해서 옛 다윗왕국의 영화를 재건시켜야만 제2가나안 땅의 시대가 개방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새천년왕국시대가 문자적으로 개방된다고 믿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의 재림 직후 전개될 천년왕국이 바로 유대인들이 그토록 원하는 “올람 하바,” 즉 유대인들의 문자적 천년왕국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또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바로 그 유대인들의 문자적 천년왕국시대를 위해서 주신 말씀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현재의 교회시대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미래의 왕국을 위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예수님 재림 후에 도래할 새천년왕국은 문자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므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시대에서 토라가 온전히 실천되고 성전이 재건되는 등의 일은 불필요하며, 또 유대인들의 왕국회복을 지지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산상수훈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완전무결한 새 왕국에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토라든 산상수훈이든 불완전 현 시대에서나 필요하지, 완전무결한 재림이후의 시대에서까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새천년시대의 상징 숫자 8

마태 사도는 숫자 8을 선호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사용하였다. 5장에 그 유명한 8복이 실려 있고, 13장에는 천국의 본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8개의 비유가 나오며, 24-25장에는 천국이 임할 때의 심판과 보상에 관련된 8개의 비유가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인도-아라비아 숫자, 1부터 9까지와 0이란 기호는 주후 400년경에 인도에서 발명되었다. 신약성경의 기록이 끝난 지 3백년쯤 후의 일이다. 1에서 9까지와 0을 써서 10이 될 때마다 한자리씩 올려가는 십진법은 인류에게 있어서 위대한 발명이었다. 이 십진법이 중동에 알려진 것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 570-632)와 같은 세기인 주후 670년경이었고, 유럽에 알려진 것은 1202년이었다. 인도-아라비아 숫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알파벳으로 숫자를 대신하였다.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의 각 알파벳은 숫자 값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알파(A)는 숫자 값이 1이고, 베타(B)는 2였다. 알파벳의 숫자 값을 적용시키면,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숫자로 환산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에슈스’('Iησουs)이므로, 이를 환산하면, 'I(10)+η(8)+σ(200)+ο(70)+υ(400)+s(200)=888이 된다. 888은 800+80+8이 되고, 8을 세 번 십진법으로 증폭한 것이 된다. 이 증폭을 트리스메기스토스(trismegistos, '세 번 위대한‘)라 부른다. [조철수, <유대교와 예수>(도서출판 길, 2002), 345-346쪽].

‘예수’('Iησουs)란 이름은 ‘메시아’ 또는 ‘구원자’란 뜻이다. 따라서 숫자 8은 구원과 관련된 숫자가 되고, 트리스메기스토스 3은 완전을 의미하므로 888은 구원의 완전성을 뜻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대 시빌린 신탁(Sibylline Oracle 1:324)에서는 예수님을 숫자 8로 표기하였다. 숫자 8이 쓰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의 수는 8명이었다.
둘째, 유대인의 할례가 출생 8일째에 시행되었다.
셋째, 메시아의 예표인 다윗 왕이 이새의 8번째 아들이었다.
넷째, 초기교회 교부들, 특히 150년경에 순교자 저스틴은 주일을 '제8일째 날'이라고 불렀다(Justin,
Dialogue with Trypho, 41:4). ‘제8일째 날’이란 ‘주님의 날’ 또는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뜻한다.
다섯째, 중세교회는 구원의 표지인 침례탕을 팔각형으로 만들었다.
여섯째, 구약성경 미가서 5장 5절에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 즉 숫자 7과 8은 완전한 승리를 뜻한다.

이처럼 숫자 8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또 숫자 8은 천국복음을 상징한다. 8이신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숫자 8은 완전수 7보다 하나가 많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숫자 8(7+1)은 '플러스 1'의 의미를 갖는다. 숫자 7은 ‘완전’ 또는 ‘거룩’을 뜻한다. 따라서 숫자 8은 ‘넉넉히 이긴다,’ ‘이기고도 남는다,’ ‘넘친다,’ ‘넉넉히 구원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우리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이 넉넉하고, 넘치며, 살림과 구원이 되실 뿐 아니라, 삶에 플러스를 주신다는 뜻이다.

새천년시대에서 가난한 자들이 받을 복

예수님의 팔복은 유대교의 계명들을 폄하하거나 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문자적이고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한데 반해서 예수님은 본질적이고 영적인 뜻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들이 갖는 본래적 의미를 끄집어내 완성시켜주셨다. 그것을 깨닫고 수용한 사람들이 초기 유대인 기독교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600여 년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채 강대국들에 차례로 지배를 받아오다가 주후 70년부터 1948년까지 나라 없이 남의 나라를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는 철저하게 현실중심, 팔레스타인중심, 예루살렘과 시온과 지상의 성전중심이다. 그들이 희망(‘하티크바’)하는 하나님의 나라 ‘올람하바’(장차올 세상)는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땅에서 이뤄질 지상의 나라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현실보다는 이상, 이 땅보다는 저 천국에 목표를 뒀다. 헬레니즘의 영향도 있었지만, 보이는 세상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의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에 삶의 목표를 두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목표를 뒀다.

유대교인들은 지상의 모든 것을 정한 것(kosher)과 부정한 것(treyf)으로 나눴으며,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일지라도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천한 사람들을 부정한 사람들로 보았다. 이들 부정한 사람들과 교제를 끊고 멀리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거룩함 또는 의로움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령을 언급하시기는 했지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고 하셨다. 유대인들을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는 물질의 번영과 명예와 권세를 복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유대인들을 고려하여 마음의 가난을 강조했을 수 있지만,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누가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라고 심령을 빼고 적었다. 게다가 누가는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눅 14:13,21)이 장차 천국잔치에 참여할 자들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 눅 7:22)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마 19:21, 눅 18:22)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동일하게 소개되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은 불편한 것일 뿐, 결코 부정하거나 죄가 아니며, 가난한 자들은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위로의 대상임을 선언한 것이지, 가난을 찬양한 것이 아니다. 가난이 좋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다가올 새천년왕국시대에서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에 복되다(요 6:35, 계 7:16). 또 부자라도 자신을 비우지 아니한 자는 천국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불행하다. 몸과 마음이 세상의 것들로 차 있으면 영적인 복락을 담을 수 없다. 인간의 것을 비우면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진다. 세상을 버리면 천국이 찾아온다.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크게 가졌어도, 그것들을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정신을 갖는 것, 또 그것들은 자기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비로 베푸신 것이며,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라는 명령으로 받는 자들이 심령이 가난한, 천국을 소유할, 복 있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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