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강11]새천년시대의 윤리기준3(마 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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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11]새천년시대의 윤리기준3(마 6:19-34)
새천년시대의 보물 쌓기
반복되는 말이지만, 유대교에서 복의 개념은 땅의 것이지, 하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장차올 세상에서의 지복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그들에게 있어서 장차올 세상이란 여전히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복의 개념은 대부분 하늘의 것 혹은 영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 6장 19-34절은 가장 중요한 십계명 제1,2계명, 즉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만들지도 말라는 계명에 영적인 의미가 추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재물을 우상시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땅에 보물을 쌓는 삶을 소유 중심의 삶으로 정의하면서, 재물과 명예와 권력의 소유를 숭배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우상숭배라고 주장하였다.
보물은 재물이다. 재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일수도 있고,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우상일수도 있다. 재물은 꼭 필요하고 유익하지만,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수 있다. 재물을 땅에 쌓는다는 것은 재물을 우상시한다는 뜻이다. 재물을 땅에 쌓으면, 도둑이 들어와 훔쳐가듯이, 아무리 많이 쌓아도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 땅에 쌓은 재물과 소유주는 아침 안개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질 뿐 아니라,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에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하나님께서 네 영혼을 데려가시면, 네가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고 하셨다.
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라는 영적인 뜻이 담겨 있다. 보물은, 1-18절과 연결해서 보면, 구제와 기도와 금식기도의 상급이다. 1-4절의 말씀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또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기도는 상급을 땅에 쌓아 도둑 즉 마귀에게 빼앗기는 어리석은 행위이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행위는 상급을 하늘에 쌓는 지혜로운 행위이다.
예수님은 21절에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다. 나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보물은 무엇인가? 또 그것을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마태가 천국 즉 새천년시대의 개방과 관련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공부하고 있다. 천국 즉 새천년시대는 나의 보물 그 자체일 수 있고, 혹은 내가 찾는 보물이 묻힌 곳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열고자 하는 새천년시대는 무엇이며, 그 일을 위해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보물이 묻힌 땅을 산다고 예수님은 13장의 천국비유에서 말씀하셨다. 하늘의 것에는 전 재산을 걸어도 좋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내가 얻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땅의 것인가, 하늘의 것인가? 일시적인 것인가, 영원한 것인가? 육적인 것인가, 영적인 것인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인가,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인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바리새인들은 땅의 것을 얻으려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취하려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켰다. 이것은 24절의 말씀대로 두 주인을 섬기는 행위였다. 만일 재물과 명예와 권세가 나의 마음을 빼앗고 있다면, 그것들은 이미 내게 주인과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질투를 받게 하는 것이다.
새천년시대의 성한 눈 갖기
예수님은 22-23절에서 몸의 등불인 눈이 성하지 못하면, 제 몸을 밝히 볼 수 없듯이, 재물과 명예와 권세에 눈이 흐려지면, 내면의 빛과 영안이 흐려져서 내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심지어는 눈이 성한대도 보지 못한다고 하셨다(막 8:17-25). 보고 싶은 것에만 열리는 병든 눈이기 때문이다. 이런 병든 눈 때문에 혹은 성하지 못한 눈 때문에, 24절의 말씀처럼, 두 주인을 섬기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밝히셨다. 두 주인 모두로부터, 즉 하나님과 마귀 양쪽으로부터 질투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러나, 재물이 마귀에 속한 악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우선순위에서 하나님보다 먼저 또는 상위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먼저 두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상이다.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셨지, 보물이 마귀에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할 이유는 그것이 사람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사람의 의 내면에 정신에 본질에 영혼에 영원한 삶에 유익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란 말로 두 번이나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어리석은 맹인들이라고 질타하시면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저주하신 적이 있다(마 23:17). 그들의 가치관과 종교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리석은 맹인이 되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것은 신령한 하늘의 것이었다. 눈이 성하다는 뜻은 보이는 세계는 물론이요,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까지 볼 수 있는 영안을 말한다. 영안을 갖고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자만이 천국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설명한 글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23절에서 “네게 있는 빛이”(the light within you)란 표현을 쓰셨다. 우리가 육체적인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듯이 내 안에 있는 빛으로 영적인 세계,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다. 세상에는 영적인 또는 신령한 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이나 사물 또는 사건에 숨겨진 내면을 파악하여 그림이나 조각 또는 연극과 영화 등으로 걸출하게 빚어내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 육신의 눈만으로는 파악이 안 되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들이 널려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만으로는 사물을 제대로 본다고 말할 수 없다. 진실은 육신의 눈에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사물 뒤에 숨겨진 진실을 파악해낼 때만이 우리는 바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사건의 이면을 볼 수 있는 눈, 즉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뒤에 숨겨진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영성의 눈이라고 부른다. 이 영성의 눈이 우리 안에 있는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빛이 약하면, 이 빛이 성하지 못하면, 볼 수 있는 것이 세상적인 것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육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좇아가다보면, 종국에는 허무(虛無)와 공무(空無)만 남게 된다.
새천년시대의 목숨보존하기
그러므로 예수님은 25절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면, 33절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목숨”은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혼의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처럼 잠시 살다가 죽게 될 육신을 위해서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영생을 보장해줄 하나님의 나라 즉 새천년왕국과 그분의 뜻을 이루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셨다. 잠시 살다가 떠나게 될 이 땅에서야 어떻게든 살아가지지 않겠느냐? 뭐 그것이 대수냐? 하나님께서 있어야 할 줄을 아시고 매일의 양식과 의복을 주시지 않느냐? 비록 당장은 가진 것이 없고 궁핍하지만, 그렇다고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있더냐? 빵과 재물을 추구하기보다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목숨에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영원한 생명에 필요한 것까지 공급받게 될 것이다. 육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다. 그들이 구한 표적은 다름이 아닌 해방이었다.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의 노예속박에서 해방시켜 광야사막에로 이끌어내어 매일 40년간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먹게 함으로써 배고픔에서 해방시켜준 것처럼, 그들을 로마의 노예속박에서 해방시켜 다윗의 영광을 되찾게 하여 주며, 하늘로부터 빵을 내려 먹게 함으로써 배고픔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찾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 것은 당신이 과연 메시아인지, 우리를 로마제국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줄 자인지, 지속적으로 빵을 주어 배고픔에서 해방시킬 있는 자인지를 입증하라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답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달라고 요구한 것과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것 사이에 큰 격차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구한 것은 지금 당장 육신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달라는 것이었고, 예수님이 주시고자한 것은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이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해결하기를 원했던 것은 정치와 경제 문제였지만, 예수님이 추구하셨던 것은 천국과 생명의 양식이었다.
눈이 성한 자들은 예수님이 주시고자한 천국과 영생의 가치를 볼 수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눈이 성한 자들은 천국 밭에 감춰진 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얻으려고 전 재산과 목숨을 바치게 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맹인들은 진가 또는 참 가치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땅의 정치문제와 경제문제에만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기독교의 박해자에서 옹호자로 바뀌게 된 것은 예수님이 주시고자했던 것의 진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표적을 구하던 유대인들이 싫어하고, 지혜를 찾던 헬라인들이 어리석게 생각했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바로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깨달음과 성한 눈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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