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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22]새천년시대의 특징과 성격 3(마 13:4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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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051 2012.03.1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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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22]새천년시대의 특징과 성격 3(마 13:47-58)

새천년시대이후의 운명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들에서 예수님은 천국에 합당한 사람과 부당한 사람, 천국의 대내외 성장능력, 천국의 가치발견과 매입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물 비유에서 가라지 비유에서처럼 재림 때에 있을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세상 끝”까지, 재림 때까지, 대 심판 때까지 혹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때까지 의인과 악인이, 마치 바다 속에 좋은 고기와 못된 고기가 혼재하듯이, 선악의 혼재상황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하셨다. 그러나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을 재차 확인시켜 주셨다.

마태복음 13장 47-50절에서 “바다”는 세상을, “각종 물고기”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그물”은 구금을 상징한다. 또 “세상 끝”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풀무 불”은 지옥을 상징한다.

고대 그리스-로마세계에서 큰물, 즉 바다나 호수 또는 강은 세상 또는 죽음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로마신화에서는 사람이 죽어 음부의 세계로 가려면 비통의 강, 시름의 강, 불의 강, 망각의 강을 차례로 건너야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망각의 강을 건넌 후에는 낙원인 엘뤼시온(Elusion)으로 갈 사람과 지옥인 탈타로스(Tartaros)로 가야할 사람으로 나뉘었다. 예수님은, 마치 추수 때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듯이, 그물정리 때 좋은 고기와 못된 고기가 분류되듯이, 사람의 마지막 길도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로 나눠질 것을 말씀하셨다. 천국의 가치를 발견하여 매입한 사람의 길은 생명의 길이 되지만, ‘이생뿐이다.’ ‘죽으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세상을 산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길이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선악이 혼재된 상황이지만, 마지막 때에는 반드시 선악이 분리될 것이다.

물고기는 신자들의 상징이며, ‘좋은 신자’와 ‘못된 신자’로 나뉜다. ‘좋은 신자’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는 자들을 말한다. 반면에 ‘못된 신자’란 적(敵)그리스도를 신봉하는 자들을 뜻한다.

헬라어로 물고기는 ‘이크투스’(ichthus/IXθUΣ)이다. 물고기는 십자가가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를 잡기이전부터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사용됐던 상징이다. 물고기를 뜻하는 ‘이크투스’(ichthus) 다섯 글자는 각각 '예수'(i), '그리스도'(ch), '하나님의'(th), '아들'(u), '구세주'(s)의 첫 글자에 해당된다. ‘좋은 신자’는 ‘좋은 물고기’의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가 적힌 엠블럼을 사용한다[IXθUΣ = I: Iesus(예수스/예수), X: Christus(크리스토스/그리스도), θ: Theos(떼오스/하나님), U: Huios(휘오스/아들), Σ: Sojomete(소조메테/구세주)]. 반면에 이에 반발하는 적그리스도인들, 특히 진화론을 신봉하는 자들은 ‘못된 물고기’ 상징들을 사용한다. 기독교를 모독하는 진화론자들이 사용하는 못된 물고기는 몸통에 다리나 등에 지느러미를 지니고 있고, 몸통에는 ‘이크투스’(ichthus)대신에 '다윈'(darwin), '이교'(Pagan), '사단'(Satan), '마귀'(Devil), '죄인'(sinner) 등의 글자를 넣고 있으며, 기독교의 물고기를 잡아먹거나 제압하는 상징을 사용한다. 같은 맥락에서 상어(shark)를 상징으로 삼기도 한다. 등에 지느러미가 있는 것은 상어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삼켜버리겠다는 무서운 뜻을 담고 있는 표현들이다.

새천년시대는 새 것으로

마태복음 13장 51-52절에서 예수님은 7개의 천국비유를 통해서 새천년시대의 특징과 성격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셨다. “깨달았습니다.”라는 답변이 나오자 마지막 8번째 서기관비유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서기관’은 천국복음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새천년시대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또는 교육받은 것을 가르치는 모든 교사를 뜻한다. 마치 집주인이 옛 시대에는 옛 시대에 맞게 자기 창고에서 옛 것들을 꺼내어 사용하였고, 새 시대에는 새 시대에 맞게 창고에서 새 것을 꺼내어 사용하듯이, 새천년시대에 대해서 교육을 받은 모든 교사들은 새천년시대에 맞게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의 창고에서 새 것들을 끄집어내어 가르칠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옛 시대에는 옛 시대에 맞는 율법체계와 유대교공동체를 세우셨다. 그러나 새천년시대가 이미 출범하였고, 새 시대에 맞는 천국복음을 주셨으므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의 교사들은 새천년시대에 맞는 새 것들을 꺼내어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은 이미 9장 16-17절에서 새천년시대에 필요한 새 패러다임에 관해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천년이 넘는 묵은 누룩, 장로들의 유전, 유대교의 전통, 곰팡이 균이 핀 묶은 포도주, 기존의 낡고 폐쇄적인 사고방식, 가치관, 세계관이 예수님께서 개방코자하시는 새천년시대에 걸맞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새로운 사상은 새 그릇에 담아야 한다는 뜻으로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한다거나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는 숙성과정에서 가스를 발생시켜 부대를 팽창시킨다. 이때 낡고 약해진 부대는 터지고 만다. 낡은 옷에다 새 천을 대고 깁이면 새 천이 낡은 천을 잡아당겨서 찢어지게 된다. 이처럼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거나 낡은 옷에 새 천을 대고 깁이면 문제가 생기듯이, 시대에 뒤진 폐쇄적 율법주의로는 혁신적인 복음주의를 수용할 수가 없다.

율법시대는 이미 구시대가 되어버렸다. 율법시대에는 그 시대에 걸맞은 사상과 전통들이 있었는지 모르나 새천년시대는 복음시대이므로 거기에 걸맞은 새로운 사상과 전통이 요구되었다. 복음이란 믿음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고, 혼돈을 질서로 만들며, 죽어가는 것을 살려내고, 닫힌 것을 개방하며, 갇힌 것을 풀어주고, 탕자가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것이므로 새천년시대란 그릇에 이 복음적 가치를 담기 위해서는 폐쇄적 사고방식, 낡은 형식주의, 죽임의 율법주의, 낡은 가치관과 세계관을 버려야 한다.

또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의 안식일 논쟁에서 새천년시대에 필요한 새 질서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복음서에서 안식일 논쟁은 유대교와 기독교, 옛 언약시대와 새 언약시대, 옛 질서와 새 질서, 율법과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하듯이, 새천년시대에는 새 질서가 필요하다. 그것이 복음이요, 살림의 일이며, 빛의 일이고, 질서의 일이며, 생명의 일이다. 새 질서의 성격은 전통과 혈통에 좌우되지 않고 믿음에 좌우된다. 빵의 일과 세상의 일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에 좌우된다. 어둠과 무질서와 죽음에 좌우되지 않고 빛과 질서와 생명에 좌우된다.

새천년시대의 산통(産痛)

새천년시대의 개방을 희망했던 세례 요한은 물론이고 새천년시대의 도래를 선포하신 예수님조차도 박해의 대상이셨다. 새천년시대의 개방을 희망하는 한 구시대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새천년시대를 개방할 메시아의 선구자였던 세례 요한은 집권세력의 견제와 감시를 받다가 끝내는 체포되어 목 베임을 당하였다. 그런데 복음서는 세례 요한의 죽음의 시점을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중에게 제2의 모세 메시아로 노출시킨 결정적인 시점으로 소개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오실 자 메시아로 노출시킨 결정적인 사건은 오병이어의 표적이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13세 이상의 남성만 오천명이상 먹이신 표적이다. 이 표적은 모세가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먹게 한 사건과 동일한 예수님이 제2의 모세였음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복음서 저자들은 이 사건을 세례 요한의 죽음직후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을 절정으로 치닫게 한다. 이 사건이 중대한 만큼 유일하게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었다.

또 복음서는 예수님이 당하신 배척들을 주저 없이 의도적으로 소개한다. 심지어 그 출발을 고향에서부터 시작한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배척사건이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이 대단한 것임을 알고 난 다음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더더욱 마태복음은 이 사건을 천국에 관한 비유말씀을 다 마치신 다음에 배치하고 있다. 사실 복음서에 소개된 예수님께서 배척당하신 사건들은 적어도 두 가지 정도의 목적을 갖고 있다. 첫째는 새천년시대의 복음을 선포하는 선구자들이 당하는 시련에 대한 예방주사의 성격이요, 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하신 후에 받으실 영광에 대한 예시(豫示)적 성격이다. 박해는 항상 있을 것이지만, 박해를 견딘 후에는 하늘에서의 상이 클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누가는 이 사건을 아예 예수님 공생애 출발시점에 배치하였다. 갈릴리에서 배척당하심, 사마리아에서 배척당하심, 예루살렘에서 배척당하여 죽으심 그리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영광 받으심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순교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걷도록 권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의 때를 영광 받으실 때로 설정하여 복음서 구성을 영광 받으실 때 이전과 이후로 나눴다.

세상천지 어디에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함과 사형 당함을 이처럼 미화시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死)의 찬미가 아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자들이 거쳐야할 통과의례란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천년시대를 위한 배척당함은 옥동자를 얻기 위한 산통(産痛)과 같은 것임을 말한 것이다.

다른 한편 새천년시대의 산통으로써의 배척당함은 불신(不信) 세력과의 갈등의 결과이다. 예수님께서 10장에서 당파성을 강조하신 것은 바로 이런 갈등 때문이었다. 불신 세력과의 갈등이 없이는 또 강한 당파성이 없이는 새천년시대를 개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과 고향 나사렛 사람들과의 갈등은 신앙과 불신앙의 갈등 또는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갈등을 암시한 것이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혹은 영생이냐 죽음이냐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이고 대립이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복음서의 이런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그것을 정치개혁, 사회개혁, 민주화와 인권신장 등의 운동에 접목시켰다고 보면 된다. 깨어 있는 기독교인들은 오늘날에도 현실과 이상, 현세와 내세, 오늘과 내일 앞에서 무엇이 '옳음'(진리)인가를 놓고 갈등하고 고뇌하며 산다. 그렇다고 보수는 무조건 나쁘고, 개혁과 혁명을 추구하는 진보는 무조건 좋다거나 또는 그 반대이거나가 아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고뇌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옳음을 따르다보면, 때로는 보수가 되고, 때로는 진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옳음'의 추종자들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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