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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24]새천년시대를 앞당기는 신분노출 2(마 1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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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955 2012.03.2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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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24]새천년시대를 앞당기는 신분노출 2(마 15:1-28)

새천년시대에서의 빵문제

마태복음 16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고, 16절에서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18절에서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인간의 오랜 희망을 실현시켜줄 메시아탄생의 선포로 시작된 마태복음의 이야기들은 16장 13-28절에서 예수님이 오실 자 메시아시오, 그분이 출범시킬 새천년시대와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교회라는 것을 밝히는 데까지 진전되고 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8개의 비유로 천국의 특징과 성격을 밝힌 직후 14장 1절부터 16장 12절까지에서 전개된 이야기들, 즉 예수님이 오실 자 메시아시오, 그분이 세우실 나라가 교회란 사실이 완전히 노출될 때까지의 짧은 이야기들의 주제는 ‘빵’이다.

마가복음에서도 8장 29절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답변이 도출되기 전까지 7-8장의 이야기들의 주제는 빵이다. 빵의 문제 또는 빵의 부족을 걱정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에 상반되는 세상의 일과 사람의 일로써, 마치 소경의 눈이 열려 만물을 밝히 보듯이, 귀먹고 어눌한 자의 귀와 혀가 풀려 말하는 것이 분명해지듯이, 영성이 열려 하늘 가나안 땅을 보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한편 마태복음은 16장 16절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올 때까지 14장부터 계속해서 빵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14장에서 빈들에서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13세 이상의 남자만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표적과 바다 위를 걸으신 표적을 소개한 다음 15장에서도 빵 먹기 전에 손 씻는 문제, 생명의 빵을 이방인들과 나누는 문제, 그리고 빵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13세 이상 남자만 사천 명 이상을 먹이신 표적을 소개하였고, 빵문제를 16장 1-12절 베드로의 신앙고백직전까지 이어가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빵은 예수님의 메시아신분의 노출과 관련되었을 뿐 아니라, 요한복음 6장에서 밝히신 것처럼, 육신의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이다.

마태복음에 “빵”(bread)이란 말이 20여 차례 나온다. 제일 먼저 쓰인 곳이 마귀의 시험 때였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4:3)는 마귀의 시험은 다름 아닌 민중의 요구였다. 이때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고 하셨다. 마태복음 15장 17-20절에서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보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말씀하셨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 즉 생명의 양식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는 말씀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새천년시대에는 육신을 살리는 빵보다 영혼을 살리는 빵을 더 귀하게 여긴다.

새천년시대에서의 손 씻기 문제

마태복음 15장 1-20절에서 갈등의 원인이 된 ‘빵 먹기 전에 손 씻기’ 전통은 위생을 위해서 손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양손 안팎에 물을 흠뻑 붓고 기도문 베라코트를 낭송하는 종교적 행위이다. 이때 지켜야할 사항이 21가지나 된다. 이 전통은 제사장이 성전예배 때 손을 씻는 성별의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유대인들은 제사장의 행위를 본받아 하나님께 대한 존경심에서 손을 씻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전통을 포함해서 다른 ‘게자이라’(gezeirah)법들을 성실히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문제를 삼았다. 613개의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키려는 뜻에서 만들어진 울타리 법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들을 폐하게 만들고, 외식하는 자들이 되게 하였으며,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6-9절).

예수님은 외적인 허례허식에 매달리는 유대인들의 문제가 신앙심의 자만과 우월감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셨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죄인취급하고 멸시하였다. 그들은 겉껍데기 사슬에 묶인 자신들의 현실을 눈이 있어도 직시하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으며, 머리가 있어도 깨닫지 못했고, 가슴이 있어도 느끼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지적하셨듯이 그들은 사람이 만든 율법에 매여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옮음과 자비와 신실함을 버렸다.

예수님은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의 문제이지 성결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셨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의 먹기 전 손 씻기는 더러움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양손 안팎에 물을 흠뻑 부어서 물에 온전히 적시게 하는 종교적 행위이라서 위생과는 무관하다.

예수님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육신의 문제이지, 영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보셨다. 유대인들의 먹기 전 손 씻기는 영적인 청결의 회복을 상징하는 것이지, 실제로 영적인 청결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영적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써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19절)이라고 하셨고,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20절)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사람의 유전을 지키는 것이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보셨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보셨다. 그러므로 헛된 경배라고 하셨다(6-9절).

“장로들의 전통”이란 말로 신약성경에 소개된 ‘게자이라’법들은 외형상으로 볼 때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계명과 동일한 수준에 놓으려했다는 점과 율법의 목적과 정신은 외면한 채, 법규를 지나치게 상세히 규정해 놓음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옮음과 자비와 신실함은 버리고, 자만과 우월감만을 자극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먹기 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위생상 필요한 것이지만, 손을 씻는다고 해서 마음이 청결해지는 것은 아니며, 더더욱 영혼이 성결해지는 것도 아니다. 새천년시대에는 손을 씻는 청결보다 마음을 씻는 성결을 더 귀하게 여긴다.

새천년시대에서의 이방인문제 1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역사의 연구> ‘제4편 문명의 쇠퇴’에서 유대인들의 신앙체험을 “정신적 보물,” “정신적 탁월성,” “천부의 재능” 등의 미사여구를 써가면서 칭송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유대인들의 신앙체험은 모든 민족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났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이 감동적이고 서사적(敍事的)이며 드라마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중대한 과오를 범하였는데, 이 과오를 토인비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시적인 자아를 우상화하는 가장 유명한 역사적 사례는 신약성경에 폭로된 유대인의 과오이다... 이스라엘과 유대의 백성은 일신교의 종교사상에 도달함으로써, 그 주위에 사는 시리아 사회의 다른 민족들보다 단연 뛰어나게 되었다. 그들이 자기들의 정신적 보물을 강하게 의식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당연하였으나, 그 정신적 성장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단계이기는 하였지만, 하나의 과도적인 단계에 불과한 것을 우상화하는 과오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확실히 무상(無上)의 정신적 통찰력을 타고난 민족이었지만,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진리를 발견한 후에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절반진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유일한 참신'을 이스라엘이 발견한 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신의 선민임을 계시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절반진리는, 그들이 가까스로 도달한 일시적인 정신적 탁월성을 신이 자기들에게 영원한 성스런 약속으로써 부여한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치명적인 과오에 빠지게 하였던 것이다. 그 천부의 재능을 어리석게도 땅에 숨겨둠으로써 그것을 활용할 줄 몰랐던 그들은 신이 나사렛 예수의 강림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제공한 한층 더 큰 보물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그들의 탁월한 발견과 신앙체험들을 타민족들과 공유하려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것으로 독점하였다. 선민사상은 그들에게 양약도 되었지만, 독약도 되었다.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독점하여 성전 지성소에 가뒀고,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여 멸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 민족과 언약을 맺고, 가나안 땅을 주셨으며, 그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토라(율법)를 주신 분으로 믿으면서 하나님과 자기 민족과의 관계를 가나안 땅과 토라와의 관계로 엮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로써 지나친 배타적 민족주의와 지나친 땅 지상주의가 발생하였고, 613개의 계명들과 그 계명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울타리 법들이 만들어졌으며, “장로들의 전통”이라 불린 울타리 법들은 그들을 타민족과 격리시키는 난공불락의 울타리가 되었다. 그들의 그런 독선의 울타리를 헐고 모든 민족이 공감할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는 복음에로 지평을 넓힌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21-28절에서 가나안 여인과 귀신들린 그녀의 딸의 형편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다”(26절)는 말씀은 당대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보는 시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27절)는 이방인의 절실한 믿음을 귀히 여기셨다. 토인비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나중 된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형편이 먼저 된 유대인들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새천년시대에는 사람의 일과 세상의 일에 매몰되고, 종교적인 자만과 우월감에 사로잡힌 유대인들보다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에 헌신하는 겸손한 이방인들을 더 귀히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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