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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31]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투쟁 1(마 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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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111 2012.03.3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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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31]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투쟁 1(마 21:1-17)

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거사(擧事)

마태복음 1-20장까지는 예루살렘 밖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기록이고, 나머지 21-28장까지는 예루살렘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기록이다. 특히 21장부터 27장까지는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굴 무덤에 안치되시기까지의 한 주간의 사건들의 기록이다.

13장에 실린 8개의 천국비유를 마태복음의 중심축으로 봤을 때 후반부에 속하는 14-17장에서 메시아신분을 노출하시고 18-20장에서 새천년시대에서의 실천윤리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새천년시대의 출범을 위해서 반드시 접수해야할 수도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서 춘분이 막 지난 어느 봄날 금요일 늦은 오후에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셨다. 금요일 해질 때부터 엄숙한 안식일이 시작되므로 이 날은 예배와 안식으로 여독을 푸셨다.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이 되자 예수님은 입성을 시작하셨고, 이를 본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고 이때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민중은 해방을 상징하는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들고 환호하기 시작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절)라고 외쳤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종려주일예배이다.

이 사건은 주후 30년 4월 2일 일요일에 일어났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란 말은 “나를 구원하소서! 메시아시여”란 뜻이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새천년시대의 새 질서를 출범시킬 메시아로서의 권위를 유감없이 발휘하셨다. 그러나 이런 일은 목숨을 담보(擔保)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위험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지만, 먼 옛날 모세가 지팡이 들고 홍해를 건넌 것처럼 혹은 79년 전인 주전 49년 1월 10일 율리우스 시저가 새 로마시대를 열기위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백마를 타고 루비콘(Rubicon) 강을 건넌 것처럼, 예수님은 새천년시대로써 교회시대를 열기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감람 산 벳바게를 출발하셨다. 여기서 백마는 전쟁의 상징이지만, 나귀는 평화의 상징이다(슥 9:9-10).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은 새천년시대를 열기위한 거사(擧事) 일이었고, 부활주일을 맞이하기 위한 D-Day이었다. 비록 종려주일부터 부활주일까지가 짧은 한 주간에 불과했지만 싸움은 치열하였다. 거사를 일으킨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권위를 유감없이 발휘하셨지만, 혈혈단신(孑孑單身)인데다가 비무장에 무저항이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금요일의 시작인 목요일 밤에 최후만찬을 마치신 후 겟세마네동산에서 체포되시어 밤새워 재판을 받으시고 금요일 아침 9시경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거사가 처참하게 실패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새천년왕국은 피의 대가로 얻어지는 유한한 세상나라가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받는 영원한 하늘나라였기 때문에 군사도 무기도 군마도 필요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것이다. 입성 후에 행하신 첫 번째 일은 성전 안에서 이뤄지는 부정한 상행위들을 몰아내고 기도하는 집으로 돌려놓으신 것이었고(12절), 두 번째 일은 장애인들을 돌보신 것이었으며(14절), 세 번째 일은 새 시대와 새 질서를 위한 논쟁이었다(15-16절).

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고난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종려주일사건이고, 둘째는 고난주간사건이며, 셋째는 부활주일사건이다. 이 세 가지 사건들은 출애굽사건들에서 그 모형들을 갖고 있다. 출애굽사건이 가나안땅 입성에서 성취되었지만 투쟁 없이 평화적으로 얻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세례 요한의 죽음직후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표적을 보이신 것은 그분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행하시는 자 곧 오실 자 메시아이신 것을 증명한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메시아이신 사실을 숨기지 않으시고 밝히셨다. 그러나 그것은 메시아를 제거할 목적을 가진 권력층과 자기들이 원하는 빵과 정치경제 군사적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려하지 않고, 원치 않는 하늘의 것과 영적인 것들만을 설교하는 예수님에게 배신감을 느낀 민중이 합심하여 예수님을 골고다언덕에로 토끼몰이 하듯이 몰고 가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매우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인 현상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가 출현하였지만, 그들은 메시아가 자신들을 제2가나안땅에로 인도하여주기를 바라기보다는 오히려 메시아가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따라와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땅에 오신 메시아는 자신의 신분을 감춰야했었고 자신이 메시아인 사실이 노출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했어야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아신분의 노출의 시점을 죽음의 시점으로 설정해 놓고 계셨고, 병자들을 고쳐주신 후에는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마 9:30) 또는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다”(마 12:16, 막 8:30, 눅 8:56). 그러나 매우 역설적으로 복음서는 메시아의 죽음의 시점을 “내 때”(마 26:18, 요 2:4, 7:6,8) 또는 “영광을 얻을 때”(요 12:23)로 적고 있어서 예수님의 죽음의 때가 오히려 예수님께는 영광을 얻으실 때인 것을 밝혀놓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종려주일사건의 완벽한 이해는 뒤따르는 고난주간을 인식하는데서 이뤄진다. 종려주일의 환호성은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고난주간의 입문을 의미한다. 그리고 십자가죽음에 이르는 고난은 부활에서 완성된다. 고난주간의 예표는 두 가지 점에서 고려될 수 있다. 첫째는 광야사막에서 펼쳐진 40년간의 고난행군이고, 둘째는 가나안땅 입성 후에 펼친 투쟁기간이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고난주간의 바른 예표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고난행군과 투쟁기간이 있고난 다음에야 비로소 가나안땅이란 새천년시대가 열렸다는 점이다.

또 종려주일의 환호성은 일주일 후에 있었던 부활주일의 기쁨과 환희를 위한 전주곡이었고, 종려주일과 부활주일 사이에 고난주간이 놓인 것과 홍해해변의 환호성이 40년간의 사막생활과 가나안땅 투쟁 후에 있었던 가나안안식을 위한 전주곡이었듯이, 구원을 약속받은 성도들의 교회생활은 장차 누릴 영원한 가나안안식을 위한 전주곡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부활의 축복을 바라보고 고난을 이기신 예수님처럼 또 가나안안식을 바라보고 40년간의 사막생활과 투쟁기간을 극복한 히브리인들처럼, 영원한 가나안안식을 바라보고 현세의 고난들을 믿음과 성령님의 도움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무기(武器)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모든 사람들의 흥분과 긴장을 고조시킨 사건이었다.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제자들은 권세를 탐했기 때문에 흥분의 고조요, “이번 명절에는 과연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고 반란을 주도할 것인가?”라는 기대 때문에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민중에게는 흥분의 고조요, 권력자들에게는 긴장의 고조였다. 유월절은 해방절이기 때문에 로마의 지배아래 살던 유대인들로서는 이 시기에 왠지 모를 흥분과 기대에 휩싸이곤 하였다. 이 시기에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건들기만 해도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유월절 명절은 민중봉기의 가능성이 연중 가장 높은 시기였고, 로마총독과 대제사장과 같은 권력자들에게는 결코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숨 가쁜 한 주간이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 때문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 모습이 나귀를 탄 우스꽝스런 모습이었을지라도, 환호하는 민중의 외침과 규모로 봐서는 권력자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바닥에 쏟아진 물처럼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하버드대학교의 하비 콕스 교수는 이 일을 두고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 활주로를 질주하다가 가속이 붙어 더 이상은 멈춰 설 수 없게 되는 이른바 ‘불퇴의 지점’에 이른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쯤해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점은 예수님만이 최후의 승리자란 점이다. 권력에 맞서 이긴 것은 예수님의 비폭력저항이었다. 예수님은 군사도 모우지 않았고, 백마도 타지 않았으며, 그 어떤 무기도 가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분이 죽음을 모면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스가랴서 9장 9-10절의 예언대로 그분이 펼쳤던 천국운동은 그야말로 그분의 사후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급기야는 전 세계를 정복하였다.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바보처럼 여겨졌던 예수님이 장엄한 최후의 승리자가 되신 것이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 분명 실패한 메시아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패는 성공에 중독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성공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또 세상적인 성공이란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말해 주기도 한다. 서울대학교 김병종 교수가 즐겨 그렸던 ‘바보 예수’와 홍종명 화백이 그린 ‘바보 그리스도’가 이런 의도를 담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분들이 그린 ‘바보 예수’ 또는 ‘바보 그리스도’가 그 잘나빠진 인간의 능력과 지혜란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귀를 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백마를 탄 개선장군의 입성과 비교했을 때, 분명 우스꽝스런 바보의 행진이었을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허망한 세속에 젖어 사는 세속적인 사람들에 주는 조소이자 심판일 것이다. 결과론적이지만, 예수님은 결단코 실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은 평화스런 새천년왕국운동으로 전 세계를 손에 넣은 위대한 승리자이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셨다. 비록 예수님은 보좌대신에 십자가에, 왕관대신에 가시관을, 홀대신에 갈대를, 올리브마사지대신에 채찍 맞음으로 인한 피범벅을, 옥쇄대신에 쇠못을, 금띠대신에 창찔림을, 왕복대신에 알몸의 수치를 당하셨지만, 그분의 예루살렘 입성과 민중의 환호성은 그분과 성도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고 거둘 대승(大勝)에 대한 예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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