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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27]새천년시대에서의 실천윤리 1(마 18: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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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688 2012.04.0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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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27]새천년시대에서의 실천윤리 1(마 18:1-35)

새천년시대: 바보들이 대접받는

마태복음 18장 1-10절은 천국에서는 누가 위대한 자인가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4절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다”고 하셨다. 또 5절에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다”고 하셨다. 그리고 10절에서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다.

천국은 예수님처럼 위로 향하지 않고 아래로 향하기 때문에 바보들이 사는 곳이다. 천국의 군주이신 예수님은 천상의 영광보좌를 버리고, 죽기 위해 낮은 이 땅에로 임하셨던 바보요, 왕의 신분자로서 마구간의 말구유에 임하셨던 바보요, 잘나고, 지체 높고, 부유한 자들과의 교제를 마다하시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로 임하셨던 바보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승리의 왕으로 임하기를 바랐는데도 죽음을 향해 음부로 내려갔던 바보셨다. 어떤 사람이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했다면, 그렇게 말한 사람이 바보로 취급당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또 그 사람이 “너희를 욕하고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라.”고 했다면, 그렇게 말한 사람이 바보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생각되겠는가? 또 그 사람이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고 말했다면, 또 “겉옷을 뺏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또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그 사람이 바보가 아니라고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새천년시대를 활짝 연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특별한 민족임을 자부하면서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이방인들을 죄인 취급한 유대인들한테서 동일성을 찾지 않고, 탕자처럼 죄가 크지만, 회개한 자들 또 그런 이방인들한테서 정체성을 찾았다. 또 유대인들의 조상 야곱이 형으로부터 적통(嫡統)을 빼앗고, 신앙의 뿌리를 이어간 것처럼, 초기 기독교인들은 장자인 유대교로부터 적통을 빼앗고, 참 하늘에 속한 백성, 천국의 길을 걷는 하나님의 선민공동체로 정체성을 설정하였다.

예수님은 팔복을 통해서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적자(嫡子)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새천년왕국의 시민이 되는 것은 민족으로도 혈통으로도 색깔로도 문화로도 종교로도 성씨로도 계급으로도 권력으로도 명예로도 돈으로도 결정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잘못을 뉘우치며 아버지 하나님께 겸손히 회개하고 애통하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바보 같은 행동에서 결정된다.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이 탕자의 비유이다.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도 에서와 야곱처럼, 맏아들과 탕자처럼 전혀 상반된 길을 걷게 될 수 있다. 야곱도 탕자처럼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자신의 잘못과 부족을 회개하였다. 그 일이 있고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셨다. 야곱은, 많이 부족했지만, 신앙 하나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약속의 자녀로서의 적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대접을 받을 것인가? 혈통과 학벌과 명예와 권세를 통해서인가, 가슴을 치며 회개한 세리처럼 겸손한 태도를 통해서인가 또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무구(無垢)한 깨끗한 마음을 통해서인가?

새천년시대: 소외된 자들이 관심을 받는

마태복음 18장 11-14절에서 예수님은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더 깊은 관심을 받는 곳이 천국임을 교훈하셨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고 하셨다. 그리고 15-20절에서 죄 범한 형제를 방치하지 말고, 진심으로 권고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할 것을 권고하셨다. 이런 선한 일에 두세 사람이 합심하면 엉킨 실타래도 풀 수 있다고 하셨다. 그 이유가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고 방법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노력에 가세하여 도우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말씀의 핵심은 소외된 자들, 잘못된 길로 간 자들에게 사랑과 기도로 관심을 갖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멸시당하고 조롱당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곳이 다름 아닌 천국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시대에 유대인들은 그렇지를 못하였다. 비록 유대인들이 13세 이하의 아이들을 말씀으로 훈육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가장의 소유물에 불과하였다. 또 원칙적으로 유대인들은 13세 이상의 남성만을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계명의 자녀들로 보았다. 그 좋은 사례가 복음서에 실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 14:21)와 빵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마 15:38)가 될 것이다. 여기서 어린이는 13세 이하의 아이들을 말한다. 여자들과 어린이는 계수에서 빠진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의 사례는 성전 뜰의 구성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여성들과 어린이를 위한 뜰이 이방인들의 뜰 안쪽에 별도로 있었다.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을 위한 뜰은 여성의 뜰 안쪽에 별도로 있었고, 더 안쪽은 제사장의 뜰이었다. 내실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눠져 있었다.

이스라엘의 여성들과 13세 이하의 어린이들은 이스라엘의 뜰 너머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처럼 민족들을 갈로 놓는 담, 남녀를 갈라놓는 담, 신분의 담과 계급의 담을 헐어버린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이 담들이 제거된 시대, 분열과 차별의 담들이 사라진 시대가 바로 새천년시대이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순수하고 때 묻지 아니한 어린이들, 겸손한 자, 약한 자, 소외된 자들이 오히려 더 관심을 받고 돌봄을 받는다. 약하고 겸손한 자가 용납되고 더 우대를 받는다.

유대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나안땅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성심을 다하여 지켜야 했고 또 자발적으로 지켰던 이유도 가나안땅에서 지속적으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계명을 지켜 받을 하나님의 축복은 가나안땅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그렇다보니까 종교생활은 잘했지만,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이방인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과 긍휼과 사랑은 부족했다. 예수님은 그것이 허례허식과 신앙심의 자만과 우월감 때문이라고 보셨다. 유대인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일체의 접촉을 꺼렸고,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자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다. 예수님은 병들고 가난한 것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들이 누리는 부와 명예와 권세를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하셨다(마 23:23). 자기 몫의 손익을 따지며 돌아온 형제를 기뻐하지 않는 맡아들 같은 사람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새천년시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마태복음 18장 21-35절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죄지은 형제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다.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에서 박완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의 의미를 무진장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무진장 용서해주라는 뜻으로 받아드렸다. 톨스토이는 “악마의 일은 아름답고 신의 일은 까다롭다”란 글에서 형제의 과실을 용서하는 것은 사단의 계략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믿었다. 사단의 계략이 무너뜨려진 곳이 있다면, 그곳은 필경 천국일 것이다.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는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한 것과 같이 당신은 우리의 죄들을 우리에게 용서하옵소서.”란 뜻이다. 여기서 ‘죄’는 경제적인 채무를 뜻한다. 죄를 하나님께 진 빚으로 이해한 것이고,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18장에 실린 불의한 종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는데, 갚을 길이 없는 것을 알고, 임금이 그 많은 빚을 무상으로 탕감해주었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붙잡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뒀다. 임금에게 탕감 받은 것의 60만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작은 빚이었다. 그래서 임금은 그를 불러다가 말하기를,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21-35)고 하셨다. 자기 목숨에 해당되는 큰 죄를 사함 받고서도 형제의 작은 죄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다.

마태복음 18장 21-35절에서 ‘용서하다’는 의미는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개념으로써 ‘죄나 징계로부터 풀어주다’는 뜻이다. 따라서 ‘용서’란 것은 형제가 저지른 죄나 잘못을 ‘떠나보내 주는’ 혹은 ‘없애 주는’ 태도를 말한다. 당대의 랍비들은 “사람이 죄를 범하면 한 번, 두 번, 세 번 용서하고, 네 번째는 용서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제시한 용서의 횟수 일곱 번은 매우 관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용서해 주는 횟수에만 관심했지, 형제를 잃어버린 양처럼 찾아야할 소중한 가치란 것을 생각지 못하였다. 잃어버린 형제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횟수가 문제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신념이었다. 용서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형제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의 잘못을 거듭해서 용서한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잘못한 형제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라는 뜻이다. 관심과 사랑이 빠진 용서는 어쩌면 잘못을 용인하고 방임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야 할 이유는 내 죄를 용서받거나 내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것도 아주 큰 죄로부터 용서받았기 때문에 감사의 표시로 형제들의 잘못들을 용서하는 것이다. 사랑과 용서와 감사가 풍성한 곳이 바로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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