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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29]새천년시대에서의 실천윤리 3(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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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668 2012.04.1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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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29]새천년시대에서의 실천윤리 3(마 20:1-16)

새천년시대: 노동자들이 보호받는

예수님께서 천국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의 일꾼과 품삯에 관한 마태복음 20장 1-16절의 비유는 가정을 가진 아들을 둔 아버지의 심정을 가진 하나님의 측은지심을 보여준다.

날품을 팔아 그날그날 근근이 먹고 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일거리가 많지 않을 때일수록 아버지는 늘 아들이 걱정이다. 결혼한 아들에게 처자식이 있어서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아들과 함께 일력시장에 나가면 다행히 아들과 함께 뽑혀 같은 일터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들이 먼저 뽑혀 일터에 불려나갈 때도 있고, 때로는 아버지가 먼저 뽑혀 일터에 불러나갈 때도 있다. 아들이 먼저 뽑혀서 일터로 향할 때면 아버지는 긴 안도의 숨을 쉰다. 그러나 아버지가 먼저 뽑혀 일터에 나갈 때면 하루 종일 아들 걱정에 마음을 편히 가질 수가 없다. 오늘은 일터에 불려나갔을까, 꼭 불려나가야 할 텐데. 아직도 뽑혀 나기지 못한 것은 아닐까? 만일 일거리를 얻지 못했다면, 오늘의 끼니는 또 어떻게 해결할건가? 이런 아버지의 측은지심을 가진 인물이 품꾼을 찾는 포도원의 주인이고, 그토록 따뜻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어서 노동자들이 보호받는 곳이 바로 새천년시대의 천국이다.

3절의 ‘장터’는 일력시장이다. 일거리를 찾거나 구경나온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인력시장은 날품을 사려는 사람과 날품을 팔려는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는 곳이다. 여기에 나오는 삼시는 아침 9시, 육시는 정오, 구시는 오후 3시, 11시는 오후 5시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는 시간이 하루가 바뀌는 시간이기 때문에 오후 5시라면 하루가 끝나기 대략 한 시간 전이다. 하루가 다 마칠 무렵인데도 일감을 기다리는 품꾼들의 절박한 현실을 읽어낸 포도원의 주인이 바로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다. 품꾼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본받아 실천해야할 자들이다. 또 마지막 남은 한 시간까지도 그 미미한 것까지도 포기하지 아니한 품꾼들의 희망을 품어야할 자들이다.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은 놀고먹기를 원하는 한량들이거나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라, 기회를 기다리는 희망을 품은 일꾼들이요, 하루하루를 절박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해가질 무렵까지도 그 희망을 포기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고, 희망을 품고 있는 한 반드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 살만한 곳이 바로 새천년시대의 천국이다.

세상 살아가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안다. 얼마나 눈물겹고 고된 일인가를 알고 있다. 일이 없다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없다. 벌이가 없다는 것만큼 슬픈 일이 없다. 하루 종일 일감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사람들의 아픈 심정을 누구보다 하나님은 더 잘 알고 계신다. 문제는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따뜻한 심정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착한 맏아들의 냉혹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침 6시부터 뽑혀 남들보다 먼저 포도원에 들어간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은 혜택과 행운을 누린 자들의 남보다 더 많이 가질려는 이기심에 차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새천년시대: 차등원칙이 적용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하루살이 날품팔이들이 넘쳐나는 불평등한 사회이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날품팔이들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다. 그러나 경기에 따라 일거리가 줄어들면 하루 사분의 일 데나리온까지 품삯이 내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대학자 힐렐이 랍비수업을 받는 학생 때 하루 절반 데나리온을 받고 일했던 날품팔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영안을 뜨면 하루 가운데 마지막 남은 한 시간만을 일한 품꾼들에게조차도 하루 품삯 전부를 쳐서 주는 한없이 은혜로운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의로우시고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새천년시대의 천국의 품삯은 무한경쟁을 통해서 능력과 공로에 따라 매겨지는 세속적인 인센티브 방식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매겨진다.

둘째, 하나님은 오후 5시까지도 할 일 없이 장터를 서성이는 날품팔이의 절망을 읽어내고 그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므로 그들의 절망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새천년시대의 천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늦게까지 일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기술이 없거나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6절에 보면, 주인이 오후 5시에 장터에 나가 서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묻는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여기서 우리는 일거리가 없는 날품팔이들의 비애를 읽고 계신 포도원 주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주인의 물음은 게으르고 무능한 부랑아들을 나무라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하루살이 날품팔이와 그의 가족들의 절망을 이해하고 위로함으로써 그들의 삶의 자리에 연대하고 참여하려는 집주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포도는 고대근동사회에서 부활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포도원은 새천년시대의 천국을 상징하고 주인은 하나님을 말한다. 새천년시대의 천국은 한 시간밖에 일할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하루 품을 사는 나라이다. 또 필요에 넘치도록 날품을 사고 모두에게 절실한 하루품삯을 지불하는 나라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이 어리석음이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의 특징이다.

품꾼들이 약속받은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었고, 아무도 약속한 품삯을 더 받거나 덜 받지 않았다. 그들이 받은 품삯은 하루살이에 필요한 만큼의 생활비였다. 포도원의 주인은 그들이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그들과 그들의 가족의 생계에 꼭 필요한 하루살이 품삯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평이 없어야 할 텐데 그들 가운데 많은 시간을 일한 사람들이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들이 화를 낸 내용은 “단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이 온전한 하루 품삯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불공평한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였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이 불공평함이 새천년시대의 천국에서는 의로운 것이고 가장 공평한 처사이다. 여기서 주인은 노동자와 그에게 딸린 식구들에게 꼭 필요한 생계비를 생각한 것이다. 일의 양으로 평가하지 않고, 필요의 양으로 평가하시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엿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공평하심 즉 노동자들에게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주는 차등원칙이 실천되는 곳이 바로 새천년시대의 천국이다.

새천년시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온전하기를 바라고 면담을 청한 한 청년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제자가 되라고 권하셨다. 그러자 재물이 많았던 그는 수심에 쌓였고, 결국 제자 되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29절)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30절)는 충고도 잊지 않으셨다. 사실 제자들은 땅의 것 즉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고 예수님을 따랐다. 여전히 그들의 귀에는 “여러 배를 받고”란 말만 들렸고,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의 뜻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복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먼저 되었다 해도 언제라도 뒤처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 16절에서, 포도원품꾼의 비유를 마치시면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포도원품꾼의 비유는 하루벌이 노동자들의 고충을 위로하고 돌보는 의미도 있지만, 먼저 된 품꾼들은 유대인들이고, 나중 된 품꾼들은 기독교인들이며, 품삯은 구원을 말할 수 있다. 하루 벌어 입에 풀칠하는 가난한 노동자들로서 자신들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도록 뽑아준 포도원 주인에게 누가 더 고맙게 생각하겠는가? 아침 6시부터 12시간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은 사람들이겠는가, 아니면 오후 5시부터 단 한 시간만 일하고도 하루 품삯을 다 받은 사람들이겠는가? 주인에 대한 고마움은 단 한 시간만 일하고도 하루품삯을 다 받은 사람들이 가장 클 것이다.

오전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12시간을 풀타임(full time)으로 일한 사람들은 하루 품삯을 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권리이기에 앞서 행운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일감을 구하지 못해 끼니를 걱정하며 일력시장을 서성이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 오랜 외로움을 모를 리 없다. 그런 그들이 노동자들의 절박한 사정을 헤아려준 주인의 너그러운 마음이 오히려 불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먼저 택함을 받았으나 민족배타주의에 빠져 이방인들을 멀리하고 배려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한편 정상적인 시간에 일군으로 뽑히지 못한 사람들, 특히 온종일 일감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자신들에게 그 짧은 시간이나마 일감을 주는 주인이 너무나 고마울 것이다. 늦은 시간에 일터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온전한 품삯을 기대할 수도 없거니와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일을 시켜주는 주인에 대한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더 열심히 일할 것이다. 그리고 적은 시간을 일하고도 하루 품삯을 온전하게 받는다면, 받는 이들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몇 번씩이나 고맙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공정한 경쟁을 뚫고 당당하게 뽑혀서 일감을 얻지 못하고,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긴 주인의 자비를 입었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먼저 된 자들이 항상 먼저 되고, 나중 된 자들이 항상 나중 되는 숙명의 고리가 끊기고,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다면 말이다. 그곳이 바로 새천년시대의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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