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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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눅 10:25-37)
자발적 가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특징은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업신여김을 받는 자가 되레 고통당하는 자를 돕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고, 그렇게 살기가 쉽지도 않고, 우리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것을 축복이라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저주라 생각하는 ‘가난’이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빈(貧)은 저주요, 부(富)는 축복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렇게 배워왔으며, 부(富)를 추구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발적으로 가난해져서, 가난한 이들과 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왜 그들은 부(富)를 말하지 않고 가난을 말하는가? 가난이 축복이 아니련만, 왜 그들은 가난을 주장하는가?
알로이스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해방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영성은 가난한 사람이 되겠다는 신념과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겠다는 신념이라고 하였다. 진정한 영성은 가난해지려는 싸움과 가난한 자를 위한 싸움이라고 하였다. 첫 번째 싸움은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려는 자신과의 싸움이고, 두 번째 싸움은 가난을 강요하는 자들과의 싸움이다. ‘종교사회주의’를 지향한 피어리스는 “가난은 가난으로 치유된다”고 말한 보프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발적인 가난이야말로 기독교의 아가폐적 영성이라고 믿었다.
가난이 복이란 신념을 갖고 자발적으로 가난해진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한 수도자였다.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서 물려받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수도회를 만들어 청빈의 가치를 실천하였다.
아미쉬 그리스도인들은 자동차, 전기, 전화기, TV, 라디오, 컴퓨터, 핸드폰 등을 일절 금하며, 마차를 타고, 말과 쟁기로 밭을 갈며, 패물착용을 금하고, 검정색이나 회색으로 소박한 옷차림을 한다. 또 외부의 공격과 폭력에 보복하지 않으며, 법적소송을 금한다. 아미쉬 그리스도인들은 “Jesus first, Others next, Yourself last” 곧 예수님을 가장 먼저, 상대방을 그 다음, 자기 자신을 맨 마지막에 놓기를 힘쓴다. 그것이 JOY 곧 기쁨이라고 믿는다.
개신교의 한경직 목사,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 그리스도의 교회의 최춘선 목사와 강순명 목사도 같은 부류에 속한 분들이었다. 최춘선 목사는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을 위해서 다 쓰고 나서 맨발로 30년이 넘도록 거리의 전도자로 살았다. 강순명 목사는 광주에서 병들고 버려진 노인들을 돌봤다. 외국인들로서는 간디, 톨스토이, 도로시 데이, 테레사와 같은 분들이 자발적 가난에 속한 분들이었다. E. F. 슈마허의 <자발적 가난>에 따르면, 자발적 가난은 창조적 가난이고, 자유를 얻기 위한 성스러운 가난이다. 가난에 대한 공포는 현대사회가 겪고 있는 최악의 도덕적 질병이다. 버리면 얻을 수 있는 행복이 많은데도 쥔 것을 놓지 않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 자발적 가난은 빈곤이 아니라 나눔이며, 소박하고 단순하게 살려는 신념이다. 자발적 가난은 돈에 얽매이지 않고, 돈을 탕진하지 않으며, 돈에 휘둘리지 않고, 자족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신앙의 발견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년)는 자발적 가난과 비폭력을 실천한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가톨릭 노동자 운동을 통해서 배고픔과 서러움에 지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에 헌신한 성녀였다.
도로시 데이는 1897년에 태어나 17살에(1914년) 대학에 들어가 사회당에 가입하였고, 20살 때부터 사회주의 계열의 신문사들에서 기자로 활동하였다. 27살에(1924년) 자전적 소설 <열한 번째 처녀>를 써서 영화 판권으로 해변에 작은 집을 마련하였는데, 그 집에서 29살 때 무신론자며 무정부주의자였던 남자에게 사랑에 빠져 딸을 낳았다. 이 무렵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재발견하면서 딸에게는 영아세례를 받게 하였다. “나는 대가를 얼마나 치르든 내 아기에게 세례를 받게 할 생각이었다. 나는 비록 신앙을 의심하고 망설이며 규율도 없고 도덕관념도 없이 여러 해를 버둥거렸지만, 내 딸은 절대 나처럼 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인 것 같았다.”고 당시의 일을 회고했다. 곧이어 자기 자신도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무치게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을 각오한 다음에 또 그토록 달고 부드러운 인간의 사랑을 포기한 다음에 이뤄진 일이었다. 헤어지거나 딸과 함께 홀로 남겨지기가 정말 싫었지만, 또 그가 떠난다는 생각을 하면 죽을 것처럼 가슴이 아팠지만, 옛 사람을 벗고 그리스도로 덧입고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감미로운 율동이 충만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받고 있는 고문을 영원히 끝내야 한다는 내 결심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고 적었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가출하여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여자가 자연보다는 초자연,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열중하는 것에 대해서 몹시 화를 냈던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신(神)을 인정한 이상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노선의 급진운동과도 결별해야 했다. 그녀는 여전히 가톨릭이 사유재산과 부와 국가와 자본주의를 비롯한 여타의 모든 반동세력과 한편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이상 급진운동과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32살 때인 1929년에 미국에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1932년 12월 대공황의 절정기에 일어난 ‘굶주림의 행진’을 취재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갔다가 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야만적인 취급과 그들을 그토록 힘들게 만든 현실 상황에 깊은 슬픔을 느끼고 분노했지만,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가톨릭 교인이 되었으므로 그들과 함께 시위에 가담할 수 없다는 씁쓸한 생각을 하면서, 취재 직후에 한 성당에 들어가 눈물과 고통으로 특별한 기도를 드렸다. 보잘것없는 재주오나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는 것이었고,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뉴욕에 돌아오자마자 평생 영적 스승이자 동지가 될 피터 모린이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가톨릭 노동자 운동’을 시작하였다. <가톨릭 노동자> 신문을 발행하였고,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환대의 집’을 열었으며, 농촌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지금도 미국에는 120여 개의 가톨릭 노동자 공동체가 존재하며, 해마다 많은 환대의 집들이 문을 열고 있다고 한다.
오랜 외로움
가톨릭 노동자 소유의 환대의 집은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무료로 따뜻한 점심을 먹고 가는 곳이었다.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은 환대의 집에서 부랑자들과 똑같이 먹고 잤다.
도로시 데이는 55세 때인 1952년에 <오랜 외로움>(The Long Loneliness, 우리말 제목은 ‘고백’)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썼다. 책의 제목을 ‘오랜 외로움’이라 정한 것은 우리 인간들이 숙명적으로 겪는 고통을 표현한 것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이 외로움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뿐이고, 함께 살고, 함께 일하며, 함께 나누는 공동체밖에 없다고 믿었다. 도로시 데이는 자서전 <오랜 외로움>의 후기에서 친히 체험한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거기 앉아 이야기하는 동안 사람들이 줄지어 서기 시작했고,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서 배를 채울지어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능력이 없었다. 작은 빵 여섯에 물고기 몇이라도 있으면 그들과 나누어야 했다. 언제나 빵이 있었다. 우리가 거기 앉아 이야기하는 동안 사람들이 거처를 찾아 우리에게 왔다. 살겠다면 살게 하자. 더러는 떠나갔고 그 자리를 더 많은 이들이 채웠다. 어떻게든 방은 넓어졌다.
도로시 데이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 “모든 가정은 그리스도를 위한 방을 가져야 한다. 당신의 옷장에 걸려 있는 외투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만일 이웃이 굶주리면 즉시 먹여야 한다. 국가기관이나 자선기관으로 달려가면 안 된다. 당신 자신이 즉각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노년에 그녀를 방문한 하버드대의 학생들이 “어떠한 일과 관련해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그들에게 맛있는 커피와 수프를 대접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고 답하였다. “하루하루 그들을 알아가는 일이 즐거웠지요. 그들은 훌륭한 선생이었답니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 보면 알게 됩니다. 그들이 겪어 온 고통을 들어 보면, 다음 한 주를 더 살아가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큰 용기를 내야 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여기 와서 커피와 수프나 훌쩍이는 처지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진정 놀랍도록 훌륭했지요. 내가 그들의 존경을 얻을 만한 사람이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그녀는 정말 저 책들을 사랑했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디킨스나 톨스토이, 오웰이나 실로네를 읽으라고 말하지요. 내 비록 이러한 소설들을 뛰어나게 분석하지는 못해도 여러분의 선생이 되려고 하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되기보다는 이 소설들이 말하는 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내 삶의 의미입니다.... 나 죽을 때 사람들이 내가 한 노력을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그분의 놀라운 이야기들을 마음에 새기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 살고자 애썼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삶을 어떻게,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에 일생을 예수님을 생각했던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의 소설과 무엇보다 성경책에서 또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치유자요 방랑설교자였던 예수님에게서 찾았다고 한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려고 했던 도로시 데이의 삶이 지나치게 평범하기만 한 우리의 삶에 자극제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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