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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29]이방인의 충만한 수(11: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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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661 2011.08.0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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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29]이방인의 충만한 수(11:25-36)

하나님의 신비

바울은 로마서 11장 25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는 말씀을 하였다. 여기서 말한 ‘신비’(mystery)는 비밀을 말한다. 바울이 여기저기서 언급한 하나님의 신비 혹은 비밀은 하나님이 감추려고 해서 감추어졌던 것이기보다는 그것을 깨달을만한 신령한 지혜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실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이 예표로써 영적으로 또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엡 3:8)으로 성취되어진 사실을 모른 채 문자적이고 세속적인 성취를 기대(Ha-Tikvah)하였기 때문에 또 육에 속했기 때문에(고전 2:14)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전 2:8).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엡 3:9)과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고전 2:7)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영광’(our glory)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최종 결과에 의한 산출이다. 끝까지 신실한 믿음을 지킨 자들이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이어지는 세대들에서 믿음을 지킨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때까지도 유대인들의 상당수는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우둔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들 가운데 다만 몇 명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결실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다(롬 11:5).

역사학자 토인비가 지적한 것처럼, 고대사회에서 가장 높은 영적차원에 도달한 민족이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의 유일신 창조주에 관한 깨달음은 다른 종교인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들이 그토록 오래 기다려왔던 두 번째 대구원사건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게 생각하였으며 싫어하였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두 번째 모세인 그리스도가 도래하여 그들의 희망을 이뤄줄 두 번째 대구원사건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오랜 기다림이 그들의 가장 뼈아픈 실패이다. 이 실패로 인해서 그들은 지난 2천년동안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민족으로 지내야 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25절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인 “십자가의 도”(message)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최종 결과에 의한 산출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유대인들 가운데서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다. 끝까지 신실한 믿음을 지킨 자들이다. 남은 자들에 들지 못한 자들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모두 우둔하여지고 버려진 자들이다.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처럼,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하나님의 능력)이란 점을, 헬라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의 구원

바울은 로마서 11장 26절에서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여기 말하는 “온 이스라엘”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최종 결과에 의한 산출이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다. 끝까지 신실한 믿음을 지킨 자들이다.

주님의 재림 후 천년왕국이 문자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믿는 전 천년설자들 중에는 “온 이스라엘”을 칠년 대환난 시기의 유대인들이라고 본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모습을 단 한번 쳐다보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ο?τω?”(houtos)의 올바른 의미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런 식으로,” “그렇게”란 뜻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앞에서 설명해온 구원의 방식에 의해서 온 이스라엘까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온”이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을 뜻하는 말이지, 칠년 대환난 시기의 유대인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유대인들 가운데서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에 대해서 설명해왔다.

칼뱅은 “온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서 무조건적으로 선택된 모든 무리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문맥상 이 해석은 불가능하다. 바울은 본문에서 문자적인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앞에서 설명한 구원의 방법을 11장 28-32절에서 재차 강조함으로써 유대인들의 구원문제를 결론지었다. 28절에서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고 하였다. 유대인들은 출애굽이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선민이 된 백성이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열방선교를 위한 전체적인 것이었지, 개개인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구약성경뿐 아니라 유대교에도 유대민족 전체가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영적(현재)구원의 개념도 없다. 유대인들이 희망하는 장차올 세상(Olam Ha-Ba)은 예루살렘에 성전과 제사예배가 재건된 유대교 중심의 지상세계이지 천국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옛 언약공동체로서 새 언약공동체인 그리스도인들의 예표와 그림자와 모형이었다. 이스라엘은 문자적인 세속국가이지만, 기독교는 영적인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구약공동체는 언약의 내용인 토라(율법)와 수많은 울타리 법들을 규범으로 삼지만, 신약공동체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통이 담긴 신약성경의 복음을 규범으로 삼는다. 구약공동체는 모세의 가르침과 전통위에 세워졌지만, 신약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모퉁이 돌과 사도들의 기초위에 세워졌다(엡 2:20). 이런 점에서 복음에 있어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는 적대관계이다. 이스라엘에는 예수님이 없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를 이단으로 규정해왔고, 예수님을 쉬메온 발 코크바(Shimeon ben Kosiba)나 샤베타이 제비(Shabbetai Zevi)와 같이 한때 유대인들을 현혹시켰던 거짓 메시아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메시아란 말도 쓰지 않고, 모쉬아크(Moshiach)란 단어를 쓰고 있으며, BC(주전)와 AD(주후)를 쓰지 않고, BCE(기독교시대 전)와 CE(기독교 시대)를 쓰고 있다.

하나님의 예정

바울은 로마서 11장 29절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한다. 이 말씀의 뜻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옛 선민으로 택하셨으니,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오해를 받는 것처럼, 그들을 전체적으로 구원하시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복음을 거부하고 불순종함으로써 우둔하여지고 어리석게 된 옛 선민인 유대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기다리고 계시다가 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면 기쁘게 맞이하시겠다는 뜻인가? 후자의 뜻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1장 30-36절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에게 유익이 되었듯이, 이방인들의 순종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에게 자극제가 되어 주님의 그 오랜 자비를 입게 될 것이라는 앞에서의 설명을 거듭 강조한 말씀이다.

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하게 만드셨다는 뜻인가, 아니면, 불순종하였지만,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것처럼 주님께 돌아온 자들에게 그 오랜 자비를 베푸시겠다는 뜻인가? 후자의 뜻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버리거나 불순종하도록 강제하시지 않는다. “가두어 두심”(bound)은 칼뱅이 주장한 것처럼 ‘버림’(遺棄)이 아니다. “가두어 두심”은 “내버려두심”(롬 1:24,26,28), 즉 하나님의 허락의지를 뜻한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뜻한다. 자유의지와 인간이 범한 죄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렇다고 기약 없이 내버려두시는 것은 아니다. 정하신 시간(kairos)만큼 내버려두셨다가 반드시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는 누가 되었든지 자비를 베푸신다. 구약예언자들의 예언활동의 핵심은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이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은 바로 이 회개운동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다.

특정인을 버리는 예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33절의 말씀처럼,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다. 바울은 성령님의 계시로 이것을 깨달았고, 깨달은 것을 전하기 위해서 일생을 노예처럼 헌신하였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예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차별 없이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로 뜻을 정하신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셨고, 자기 자신에게는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다고 믿었다. 예수님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에게 저주와 죽음 대신에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시고, 그 대신 그들의 몫인 저주와 죽음을 친히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기로 예정하셨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이 저주받은 자,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받는다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설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꺾임을 당할 것이다. 유대인들처럼 한번 꺾였다할지라도 탕자처럼 회개하고 돌이키면 다시 접붙임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 오랜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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