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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31]하나님의 뜻(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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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770 2011.08.03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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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31]하나님의 뜻(12:2)

기독교적 가치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를 받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을 받았다면, 이미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성도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할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 일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다고 가르쳤다. 성령님은 우리의 의사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며, 변호사가 되시고, 교사가 되신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들을 앞당겨와 미리 맛보고 누리며 경험하도록 하실 뿐 아니라, 점진적인 성화를 이루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인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본받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을, 비록 해석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언제나 성경에 둬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선진화되고,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게 된다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적 가치 또는 기독교적 가치와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분별하지 못하면 세속적 가치에 휘말리게 된다. 민주사회일수록 정부는 충돌하는 가치에 대해 중립원칙을 지키게 되고, 상반된 의견을 가진 진보보수 좌파우파 사이에는 가치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세속주의자들은 생명을 인간이 만든 창조물로 여기면서 인간의 의도에 따라 자율적으로 삶을 살거나 죽음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그 생명을 가진 개인의 소유물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낙태나 자살이 개인의 선택사항 즉 개인의 권리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은 의무감을 갖고 그 생명을 기키는 청지기라고 믿는다. 또 인간은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될 신성한 선물이므로 함부로 낙태를 하거나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지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속주의자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사생활보호권, 자율권, 자기결정권 등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런 요구 속에는 동성혼과 안락사도 포함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믿음의 내용(교리)으로 삼는다. 여기서 믿음의 내용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의 신념이고 관점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소유권이 창조주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 몸의 결정권조차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삶, 나의 노동, 나의 가족, 나의 소유, 이 모든 것이 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고, 나의 것이 아니며, 나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 즉 성경적 가치에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낙태, 자살, 안락사 등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내가 목이 마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핵심은 언제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되겠는가?

요한일서 4장 18-21절에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씀이 있다. 간디가 사랑(비폭력)을 최고의 가치인 진리로 보고, 신에게로 가는 길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주님께서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는가라고 묻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 말씀에 꽂혀 일생을 산 사람이 레오 톨스토이였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다. 이 비유의 특징은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업신여김을 받는 자가 되레 고통당하는 자를 돕는 이야기이다. 이 비유에 꽂혀 일생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그들과 함께 그들을 도우며 산 사람이 도로시 데이였다. 도로시 데이는 55세 때인 1952년에 <오랜 외로움>(The Long Loneliness)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썼다. 책의 제목을 ‘오랜 외로움’이라 정한 것은 우리 인간들이 숙명적으로 겪는 고통을 표현한 것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이 외로움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뿐이고, 함께 살고, 함께 일하며, 함께 나누는 공동체밖에 없다고 믿었다.

요한복음 19장 28절에 “내가 목이 마르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꽂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모시겠다고 결심했던 사람이 마더 테레사였다. “내가 목마르다”(I thirst). 테레사는 이 주님의 말씀, “목마르다”를 예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뭇 영혼들 즉 우리 이웃들을 향한 사랑을 갈망하고 계신 것으로 가슴 속 깊이 인식하였다.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모시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이었다. 그녀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 또는 현현(계시)으로 보았다. 예수님을 극빈자들에게서 또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테레사의 확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행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께 행하는 것이 되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였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그들 속에 계신 예수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빵이나 치료보다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끔찍한 가난은 고독이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가장 심각한 질병은 나병이나 결핵이나 에이즈가 아니라 자신이 불청객이라는 느낌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빵에 대한 허기보다 사랑과 가치 평가에 대한 허기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웃을 위한 존재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왜 하나님은 선하시고 온전하신가? 그분의 선하심과 온전하심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을 사랑(아가페)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온전하심이 그분의 사랑에 근거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본회퍼였다.

본회퍼는 자기 자신과 자기시대를 위해서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는 절박한 물음을 지속해서 물었다. 그가 연구한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존재’였다. 그것이 본회퍼가 던진 필생의 물음,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에 대한 답변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만인가, 아니면 따름의 대상만인가, 또 아니면 믿음의 대상이자 또한 따름의 대상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만의 대상인가, 아니면 순종만의 대상인가, 또 아니면 믿음의 대상이자 또한 순종의 대상인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은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주님이 되실 수 있는가? 본회퍼와 동시대를 살아갔던 바르트가 강조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이 서야 할 죽음과 저주의 자리에 대신 설 자로 선택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 범한 인간들에게 영생의 축복을 마련하시고, 자신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신 하나님이셨다. 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순종할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은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주님이 되게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속적으로 값싼 은혜에 만족하고 ‘이웃을 위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신론자인 포이에르바하는 종교를 인간의 자기분열 현상이라고 말하면서 신들을 만든 것은 인간인데, 오히려 인간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다고 비방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생명이 없는 흙과 나무와 돌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우상에 부여된 신율에 지배를 받는다는 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값싼 은혜의 신학을 우상으로 만들어놓고 그 논리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고 본회퍼는 되묻고 있다.

만일 우리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속적으로 값싼 은혜에 만족하고 이웃을 위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신론자였던 칼 마르크스는 종교가 고통당하는 인민의 한숨을 대변하는 것이고, 무정한 세계에 주는 감정이며, 영혼 없는 세계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또한 아편처럼 인민을 중독에 빠지게 하는 독약이라고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값싼 은혜는 아편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안락의 중독에 빠지게 할 독약일 수 있다. 값싼 은혜의 중독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고 본회퍼는 심각하게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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