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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33]권세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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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805 2011.08.06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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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33]권세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13:1)

위임 권세

로마서 13장 1-7절은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이 권세들에 대하여 취할 태도를 권면한 글이다. 1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하였다. 여기서 권세란 옳고 그름을 규정하고, 비행을 처벌함으로써 옳은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모든 권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빚으셨고, 그 속에 만물을 담으셨기 때문이다. 신학자 하비 콕스는 하나님께서 십계명 제1-2계명을 통해서 우상을 만들거나 숭배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은 권세를 가진 자는 하나님 한분뿐이시며, 피조물인 인간들은 만인이 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친 말씀으로 인식하였다. 권세가 인간의 것이 아니란 뜻이다.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권세가 없다는 뜻이다. 어느 누구도 권세를 타고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세상의 권세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위임권세요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권세가 국가에, 교회에, 가정에까지 위임되었다는 것이다. 위임되었다는 것은 위임받은 자가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권세를 위임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데 헌신해야 할 자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다.

권세의 가장 작은 단위는 가정이다. 하나님께서는 부(父)와 모(母), 특히 부(父)에게 가정을 치리할 권세를 주셨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가족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가정에 위임된 권세 또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권세란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1절부터 6장 4절까지에서 남편과 부인, 부모와 자녀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복종해야할 것인가를 말씀해 놓고 있다.

교회는 성격상 자발적 공동체이지만, 하나님께서 교회에도 권세를 위임하시고 치리토록 하셨다. 교회 또한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신 가정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교회의 일군들(목사, 장로)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맡은 청지기들이다. 가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청지기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봐야하며, 성도들은 하나님이 뽑아 세운 일군들에게 순복해야 한다(히 13:17).

국가가 갖는 막강한 권세도 하나님의 위임권세이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한 것이고, 위임한 것이다. 17세기에 존 로크는 국가를 시민의 안전과 재산보호를 위해서 만든 사회계약에 의한, 즉 국민의 암묵적 합의에 의한 권세로 보았다. 국민이 국가에 위임한 권세란 뜻이다. 큰 틀에서 보면,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는 국민의 뜻은 하나님의 뜻이다. 민심이 천심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하나님의 뜻과 국민의 뜻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위임된 권세를 정의롭게 행사해야 한다.

신학자 몰트만은 국가든, 교회든, 가정이든 권세를 수직적 위계질서로 보지 말고,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순환관계로 볼 것을 권했지만, 청지기들에게 위임된 권세의 위계는 보장되어야 한다. 시민은 국가에 충성해야 하며, 국가가 지운 의무와 책임을 성실히 수행해야한다.

권세의 조직들

그리스도인의 나라는 이 땅의 나라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들이며, 하나님의 가정의 자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세상나라를 떠나 살 수 없으므로 세상나라에서의 시민의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가정은 작지만 가장 중요한 권세조직이다. 이 조직 안에서 자녀는 어떻게 권세아래 살 것인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자녀의 교육이 부모의 책임이므로, 의무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는 부모를 대행하여 교육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교사는 부모의 권세를 갖는다. 의무교육 수준에서 학생이 교사와 학교의 규칙을 어기는 것은 자기 부모를 어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를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의 위반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의무교육 이상의 수업은 출석이 자유이므로, 행동규칙을 세우는 권리는 재산권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학교의 규칙을 어기는 것은 재산권과 소유권의 위반이며,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의 위반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부수적으로 파생될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부모나 교사가 일으킬 수 있는 가능한 문제들과 의무교육 이상의 수업을 자원한 학생들이 학교행정에 참여하는 문제들이 여기에 속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은 기관이라고 해서 국가기관과 혼돈돼서는 안 된다. 교회는 통치기관과 다르다. 교회의 목적은 잃은 자의 구원에 있다. 이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사랑이다. 종종 교회의 목적을 사회정의 실현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교회도 사회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므로 개개인의 입장에서 사회정의실현에 결코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국가권세가 올바른 방법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이를 감독하고 독려하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국가의 목적을 정의보다는 사랑의 도구로 혼돈 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화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죄와 허물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범죄를 막고 죄인들을 다스릴 국가권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실현하도록 교회에 역할을 주셨고, 당신의 정의를 실현하도록 국가에 역할을 주셨다.

국가권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진다. 법을 만드는 입법, 법을 집행하는 사법, 그리고 업무를 관장하는 행정으로 나눠진다. 국가권세의 존재목적은 존 로크의 주장처럼 시민의 안전과 재산보호에 있다. 이 목적이 달성되려면,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정의의 실현은 공정한 분배와 공정한 보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대로라면, 정의는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받게 하는 것이고 행한 대로 갚아주는 것이다. 국가권세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국가의 평화와 평정(딤전 2:2)을 지키고 시민의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또 시민의 권리를 위협하는 자를 부정적인 의미에서 제지하고 징계함으로써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국가권세의 범위나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들에 대해서는 근현대 정치철학자들의 견해가 고대 왕정시대와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유지상주의

현대사회의 문제점은 권세와 위계가 붕괴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벧후 2:10).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국가에서나 모든 권세조직들에서 권위가 추락되고 권세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사회현상에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부정적인 면만 살펴보려고 한다.

권세 붕괴의 배후에는 자유지상주의가 숨어 있다(벧후 2:19). 자유주의의 원조는 아담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지 못했고, 자유의지의 길을 걸었다. 아담 범죄이후 가인의 가계와 셋의 가계로 나뉘었다.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하늘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고”(창 4:26),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간 반면, 가인과 라멕으로 이어지는 ‘땅에 속한 자들’은 극단적인 생명파괴와 하나님을 대항하고 반역하는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가인의 성을 쌓는 기술(창 4:17)과 두발가인의 금속가공기술(창 4:22)은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로 악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 있는 권세가 아니라, 옳고 그름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할 수 있는 권세이다. 옳고 그름에 관한 윤리적 결정권은 하나님께만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결정한 윤리규범에 순종할 것인지, 반역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강조한 것은 전에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후에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과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셋과 에노스처럼 하나님의 종의 길을 걷든지, 가인과 라멕처럼 죄의 종의 길을 걷든지 두 길 가운데 한 길을 택할 자유의지만 있을 뿐이다(벧후 2:19; 롬 6:16-23).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사생활보호권, 자율권, 자기결정권 등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런 요구 속에는 동성혼과 안락사도 포함된다. 공리주의자들, 실용주의자들, 무신론자들과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는 성경과 같은 보편적인 규범이 없다. 그들의 규범은 유용성과 실용성이며, 동기나 수단방법에 상관없이 결과를 우상시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면서 개인을 보호하려 들거나 다수가 믿는 최선의 삶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하며,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행동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공동체의식이란 미덕, 즉 국가나 이웃에 대한 의무에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야기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이 타인의 행복, 즉 공동체를 위한 행복의 도구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오직 내게만 속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식이다. 내가 자살을 하든, 낙태를 하든, 마약을 하든, 매춘을 하든, 동성애를 하든, 콩팥을 떼어 팔든, 대리모를 사든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다. 내 몸의 결정권은 내가 가졌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낙오자를 보호할 안전장치가 없는 능력위주의의 자유시장경제,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선을 장려할 거의 모든 수단을 배제하는 권한축소지향정부, 합의에 의한 것이라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마저 상관없다는 무서운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칸트는 자유지상주의와 같이 동기나 목적이 순수하지 못한 결과중심주의를 철저히 반대하였다.

<위임권위의 정신은 고대 황제들이나 독재자들처럼 신성을 참칭하거나 찬탈하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직의 종의 자세를 갖는 데 있다. 모든 권세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다. 이 사실이 박해를 받았던 신앙인들에게는 고난이 짧다는 인식을, 권위자들에게는 청지기 정신을, 정치제도로써는 만인이 신(神) 앞에서 평등하다는 민주정신을 낳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란 사실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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