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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02]새천년시대의 날개(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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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317 2012.01.1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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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02]새천년시대의 날개(마 1:18-25)

‘임마누엘’의 역사적 배경

마태복음 1장 23절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으로써 북이스라엘왕국이 앗수르에 멸망하기 직전 그리고 남유다왕국이 국내외정세와 종교문제 모두에서 심히 위태롭던 시기에 나온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2,730여 년 전 남북이스라엘 왕국은 국제정세라는 측면에서 매우 위태로운 시기였다. 이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늙은 호랑이 아람(지금의 시리아지역)과 동맹을 맺고, 젊은 호랑이 앗수르(지금의 이라크지역)의 서진정책을 막고자 하였으며, 주변국들인 모압, 암몬, 에돔, 남유다왕국에 사신을 보내 동맹에 가입할 것을 압박하였다. 이때 남유다왕국은 젊은 호랑이 앗수르의 편에 섰기 때문에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에 편입되는 한편, 북이스라엘을 포함한 주변국들로부터 보복침략을 당하는 등 위태롭기가 말 그대로 벼랑 끝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때의 유다왕 아하스(731-716 B.C.)는 앗수르의 우상과 문물들에 영향을 받아 이방신을 섬기고, 아들을 제물로 바쳤으며, 성전기구들을 훼손하고, 성전 문을 닫음으로써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하였다.

남유다왕국의 이 벼랑 끝 위기에서 나온 것이 ‘임마누엘’에 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었다. 결국 앗수르에 맞섰던 북이스라엘과 아람 등은 주전 722년에 멸망당하여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남유다왕국은 살아남아 그 후로도 136년간이나 더 존속되었다.

이사야 8장 8-10절을 보면, 남유다왕국의 절체절명의 위기가 마치 홍수로 물이 불어 유다왕국의 목에까지 찬 상황이었다. 도피할 곳은 오직 하늘뿐, 날개가 없이는 죽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 생명의 날개가 바로 임마누엘이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고 노래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만이 우리의 피할 날개요, 구원의 날개임을 노래한 것이다. 이 하나님의 활짝 편 날개가 우리와 함께하는 한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이 9-10절이다.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

이사야의 이 노래는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홍해에 접한 벼랑 끝 위기에 몰리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출 19:4)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생각나게 한다. 암으로 투병중인 소설가 최인호가 가톨릭 서울대교구 주보, <말씀의 이삭>에 실은 글에서 "과거를 걱정하거나 내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벼랑 끝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날개를 가진 거룩한 천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의 신앙고백이다. 우리가 벼랑 끝으로 몰리면 몰릴수록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이다. 그 날개가 바로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임마누엘’ 예수님의 탄생

이사야 선지자 때 벼랑 끝까지 몰렸던 유다왕국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기사회생한지 한 세기가 지난 예레미야 선지자 때 또 다시 거듭해서 벼랑 끝에 몰렸으나 예레미야의 충고를 무시한 채 이집트를 의지하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후 유대인들은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속주국민으로 600년 가까이, 예수님 탄생이전까지, 가난과 억압 속에서 벼랑 끝 삶을 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흑암에 앉은 백성”이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마 4:16)의 고단한 삶이었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온 복음이 ‘임마누엘’ 예수님의 탄생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그들에게 큰 구원의 빛이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던 벼랑 끝에로 내몰린 자들에게 하늘을 훨훨 날아 강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안착할 수 있는 구원의 날개였다.

‘임마누엘’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상징하는 가장 특별한 은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 즉 대강절,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주의 만찬, 침례, 안수 등 거의 모든 행위들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고 체험하도록 하는 예배행위들이다. 교회에서의 일들은 ‘임마누엘,’ ‘파루시아’ 혹은 ‘여호와 삼마’를 체험하게 하는 것들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뜻이고. ‘파루시아’는 ‘임재’ 혹은 ‘도착’의 뜻이며,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다’는 뜻이다. 교회의 일들은, 그러므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과 하나님이 임재하시거나 도착하시는 ‘파루시아’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에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는 ‘여호와 삼마’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과거에 끝나버린 일회적 사건이 아니고, 지금도 교회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서 지속되고 있는 현재적 사건이며, 예수님의 두 번째 도착 즉 재림을 통해서 완성될 미래적 사건이다.

사람들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논하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한 짓이고 미신이라고 말하는 부류가 있고, 숱한 역경과 시련 속에서조차, 하나님이 죽고 아니 계신 것 같은 절망적인 현실에서조차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하심을 강하게 확신하고 체험을 말하는 부류가 있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은가? 아니 옳고 그른 것은 차지하고서라도 과연 어느 부류가 더 유리한가? 긍정과 부정의 유익성에서 평가하자면, 긍정이 부정보다는 훨씬 더 유익하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간증하는 사람은 삶이 훨씬 더 긍정적이고, 믿음에 차있고, 자신에 차 있고, 시련극복의 힘이 크다. 환란과 시련이 닥쳐와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는다. 닥쳐온 환란을 극복한 후에는 삶에 활력이 더욱 넘치게 된다.

인간은 만물의 법칙이 그렇듯이 버려두면 망가진다.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늘리는 것은 마치 산에서 떠온 돌덩이를 쪼고 다듬어서 아름다운 석상을 조각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 신화에서 믿음이 깊어 신의 사랑을 받은 피그말리온은 석상을 사람이 되게 하였지만, 오만방자하여 신의 노여움을 산 니오베는 자기 자신이 석상이 되고 말았다.

‘임마누엘’과 무소부재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무소부재와 다르다. 하나님의 무소부재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자연계시 혹은 일반은총에 속한다면, ‘임마누엘’은 특정인에게 미치는 특별계시 혹은 특별은총에 속한다. 예를 들면, 마리아가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입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것과 같다. 이처럼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특별한 은총이다. 그러나 무소부재는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계시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햇볕이나 공기가 어느 곳에나 있듯이,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계신 것을 뜻한다. 그리고 ‘임마누엘’은 햇볕을 쬐기 위해 고의로 양지를 찾거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산행을 하는 사람처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미치는 은총이다. 따라서 ‘임마누엘’의 체험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고 계심을 강하고 특별하게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한 이들의 신앙고백서이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일상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특별한 은총을 성경을 읽음으로서 선배 신앙인들과 영적으로 교류하고 검증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함께하고 있어도 의식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공기나 불가시광선과 같다. 확률로 보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있다’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없다’보다 배나 유리하다. 만일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없다면, 그것을 믿었던 사람이 믿지 않았던 사람보다 손해를 본 것처럼 느낄지 모르나 실상은 유익이 더 많았다고 느껴야 옳다. 그의 긍정의 태도가 삶에 대단한 플러스 요인으로, 삶을 윤택한 방향으로, 행복지수를 높이는 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손실을 능가하는 유익을 보게 된다. 하물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있고 그것을 깊이 체험한다면, 그 축복이 얼마나 크겠는가? 돈으로는 살수 없는 엄청난 기쁨과 행복이 보너스로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재물과 명예와 권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에게 절실한 것이 하나님의 임재체험이다. 일상에서 하던 일들을 조금씩 줄이고, 매일의 기도와 성경읽기와 개인묵상에 좀 더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시도해 보지 않고, 자신의 영성개발에 투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침묵을 불평하는 것은 섣부른 행위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침묵에 몸부림치면서, 수없이 겪는 어려움들 속에서,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포악을 떨면서, 그러한 부정의 고비를 수없이 겪으면서, “산중 깊은 곳에 향기 짙은 난이 피어 있을 때, 눈으로 발견하기 전이라도 가까이 갈수록 난의 존재를 확신하며 이끌리게 되듯이,” 점점 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신하게 된다고 했다. “코의 능력도 천차만별이어서 멀리서도 난향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척에 가서나 겨우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난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멀리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는 영성의 필요를 언급한 말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소리를 듣고 있어서 듣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있어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알렉산더 캠벨은 가시(可視)거리, 가청(可聽)거리, 보고 들을 수 있는 공간과 거리 안으로 들어가야 보고 들을 수 있다고 하였다. 아무리 향이 짙은 난이 피어있다고 해도, 후각거리에 들어서지 않으면 그 향을 즐길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그분이 눈에 들어오고, 그분의 음성이 귀에 들리기 시작하며, 그분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벼랑 끝 위기에 몰린 우리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여야 하고, 그 상황을 벗어나게 할 날개, 즉 임마누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구원의 날개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어디에나 어느 곳에나 계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불평합니다. 당신께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고, 그러나 그들은 당신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꺼려합니다. 그들은 너무 멀리 있어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동산에 난향이 진동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면, 누구의 향기가 되겠습니까? 벼랑 끝 위기에 몰렸지만,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누가 당신께 날개를 구하겠습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불평합니다. 당신께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고, 그러나 당신은 구원의 날개시오, 우리를 업어 바다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로 인도하실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은 동산을 거닐고 계시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면, 누구의 친구가 되겠습니까? 벼랑 끝 위기에 몰렸지만, 당신께 구하지 않는다면, 누가 당신께 날개를 얻겠습니까?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존귀와 영광을 세세무궁토록 받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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