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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09]새천년시대의 윤리기준1(마 5: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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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289 2012.02.0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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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09]새천년시대의 윤리기준1(마 5:13-48)

새천년시대를 위한 산상수훈

복음서 저자들마다 강조하는 예수님의 특징이 조금씩 다르다. 마가는 ‘~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 특히 헤라클레스처럼 능력에 권위가 있으신 분으로 소개함으로서 고난에 처한 교회와 성도를 능히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으신 분으로 강조하였다. 누가는 예수님을 성령님이 충만하신 분,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시는 분, 자주 배척을 받으셨지만, 극복하시고 승리의 영광을 쟁취하신 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분으로 소개함으로써 예수님을 성도의 모범으로 강조하였다. 요한은 예수님을 창세전부터 존재하셨던 분,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신 분, 하나님의 계시자, 독생하신 하나님, 빛과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였다. 반면에 마태는 예수님을 구약의 모세와 율법보다도 더 권위가 있으신 분, 특히 말씀에 권위가 있으신 분으로 소개함으로써 예수님과 기독교복음이 모세와 유대교율법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산상수훈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뿐만 아니라, 마태는 예수님을 ‘~보다 더 큰 이’로 소개하면서, “세례 요한보다 큰 이”(11:11), “성전보다 더 큰 이”(12:6), “요나보다 더 큰 이”(12:41), “솔로몬보다 더 큰 이”(12:42), 다윗보다 더 크신 분(22:45)으로 강조하였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문자적으로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교회 즉 지상천국의 성도들이 진리와 불법이 혼재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높은 차원의 윤리적 삶의 기준들이다. 그 내용이 크게 5개 즉 8복(5:1-12), 구약법과 신약법의 차이(5:13-48), 바른 신앙생활(6:1-34), 순전한 삶의 원리(7:1-12), 결론(7:13-27)으로 나눠진다.

이 산상수훈에 대해서 순수하고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동시에 이 세상나라와는 담을 쌓고 사는 메노나이트 그룹, 특히 아미쉬와 같은 평화주의자들은 산상수훈을 문자 그대로 지키기를 원한다. 메노나이트 그룹이 아니더라도, 사랑에 기초한 평화주의자 톨스토이, 비폭력불복종운동을 펼친 간디와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도 산상수훈에 깊은 영향을 받은 자들이다. 산상수훈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일반 평신도가 아닌 종교지도자들과 금욕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에게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가톨릭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산상수훈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며 그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는 루터주의자들도 있다. 또한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 재림 후에 문자적으로 회복된 ‘올람 하바’ 곧 이스라엘나라에서 지켜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시대구분설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의 교회 즉 지상천국의 성도들이 진리와 불법이 혼재하는 이 세상에서 지켜야할 윤리적인 삶의 기준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산상수훈대로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울이 언급한대로 육신의 연약함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점진적으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높은 윤리기준에 도달하려는 선의의 노력들을 할 수 있다. 선의(善意)란 구원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성령님으로 도장 찍음과 보증금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함에서 비롯된 것을 말한다.

새천년시대의 착한행실

마태복음 4장 16절을 보면, 메시아의 출현은 “흑암에 앉은 백성”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큰 빛이었다. 마태복음 5장 13-16절에서 예수님은 새천년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큰 빛을 비취시고 위대한 맛을 낸 소금이셨다면, 그분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빛과 소금들이다. 예수님은 소금이 맛을 잃지 않아야 하며, 등불은 사람을 비출 수 있는 곳에 배치되어야 한다고 권면하셨다. 또 예수님은 16절에서 소금의 맛과 등불의 빛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이 무엇인가? 마태복음 5장 3-12절에서 예수님은 이미 지적하셨다. 심령을 가난하게 하는 것, 애통해 하는 것, 온유한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긍휼히 여기는 것, 마음을 청결히 하는 것, 화평케 하는 것,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이요, 소금의 맛이며, 빛의 일이다. 이런 일들을 행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약속하신 8복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 조차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예수님께서 20절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좋은 의(義)는, 다름이 아닌 앞에서 열거한 8가지 것들, 즉 심령을 가난하게 하는 것, 애통해 하는 것, 온유한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긍휼히 여기는 것, 마음을 청결히 하는 것, 화평케 하는 것,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다. 이 8가지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17절의 말씀처럼,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요, 18절에서처럼,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빠짐없이 지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義)는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지상의 모든 것, 동식물은 물론이고, 음식과 물건들까지도 부정한 것(treyf), 정한 것(kosher), 거룩한 것(kodesh)으로 구분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합당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유대교인들은 정한 것만 먹고 정한 것만 사용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일지라도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천한 사람들을 부정한 사람들로 보았다. 이들 부정한 사람들과 교제를 끊고 멀리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거룩함(kodesh)이고 의로움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유대교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비난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3-12절의 8복에서 강조하신 것이 바로 유대교인들이 버린 사랑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사랑과 긍휼을 베풀고, 정의를 바로 세우고, 화평케 하는 일을 하며, 이를 위해서 핍박까지 감수하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좋은 의로움이다. 또 이 8가지 행실을 제대로 하는 것이, 48절의 말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새천년시대의 신약법(新約法)

마태복음 5장 21-48절까지의 말씀은 구약법(舊約法)과 신약법(新約法)의 차이를 설명한 글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십계명 가운데 제3,6,7계명에 대해서 언급하셨고, 그밖에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과 피의 보수법(報酬法)에 대해서 언급하셨다.

21-26절에서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확대해석하여 남을 미워하거나 욕하는 것, 남에게 원망을 받을만한 작은 일조차도 지옥에 떨어질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큰 잘못만 잘못이고 작고 소소한 잘못들은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는 도덕불감증을 지적하신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살인죄 못지않은 죄가 된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을 이용수단으로 삼거나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가 비도덕적이라고 하였다.

27-32절에서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확대해석하여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혼과 그 영혼을 담는 그릇인 육체의 순결을 기뻐하신다. 임마누엘 칸트는 간음에 반대하였는데, 간음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상대방을 성욕충족의 수단으로 삼으며, 인격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몸은 개인재산이 아니므로 자기 멋대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목적으로 삼아야지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33-37절에서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는 제3계명을 확대해석하여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늘로도 하지 말라,” “땅으로도 하지 말라,”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제3계명의 내용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인데, 유대교인들은 이 계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 혹은 경박한 맹세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망령되게’로 번역된 단어는 문자적으로 ‘거짓말’을 뜻한다고 한다.

38-42절에서 예수님은 동해보복법과는 반대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다. 정의란 단어의 원뜻만 고려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복정의의 원뜻만 고려한다면,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대로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출 21:23-25) 갚는 것이 정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정의로 보시지 않았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정의라고 여기셨다.

43-48절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미워하라”는 피의 보수법에 반대하면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아랍인들의 복수의 집념은 대단하다고 한다. 누군가가 살해당하면 그 피살자의 친인척에 속한 모든 남자들은 복수의무를 지니게 되며, 이 복수의무가 주어진 혈연집단을 '카므사'라고 부른다. 만약 복수하지 못하면 그 카므사의 명예는 형편없이 추락하여 그 카므사와는 교역도 결혼도 기피한다고 한다. 이런 ‘피 보상’의 개념이 유대인들에게서는 ‘고엘 하담’이란 말로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를 피로 갚으라.’는 사막의 계율을 바꿔서 ‘피를 용서로 갚으라.’고 교훈하셨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이요, 그분의 온전하심을 이루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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