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강14]새천년시대를 여는 믿음 2(마 9:1-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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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14]새천년시대를 여는 믿음 2(마 9:1-8, 18-34)
믿음이 만든 기적들(2)
시너지효과(synergy effect)란 말이 있다. 상승효과(相乘效果)란 뜻이다. '1+1'은 2이지만, 2보다 효과가 크게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믿음이 만드는 기적이란 예수님의 능력에다가 병 고침을 원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더해져서 만들어지는 기적을 말한다. 마태복음 8-9장에 소개된 10개의 기적이 모두 낫고자한 이들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새천년시대를 개방하는 원동력이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들이다.
1-8절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적이다. 중풍병자 자신의 믿음이었는지, 침상까지 떠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안심하라.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병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이 그렇게 생각하신 것은 아니지만,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즉 당신께서 오실 자 메시아이신 것을 증명해 보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서기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곧 그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실 자 메시아이신 것을 입증해 보이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육신의 병을 고쳤고, 영혼의 죄를 사함 받게 하였으며, 서기관들이 포함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란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주는 시너지효과이다.
18-26절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병을 고치시고 또 어떤 공무원의 죽은 딸을 살리신 기적이다. 여인의 고질병을 고쳐내고 죽은 소녀를 살려낸 능력은 믿음이었다. 그 공무원은, 비록 자신의 딸이 방금 죽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딸의 몸에 손만 얹어주어도 살아날 것이라는 큰 믿음을 보였다. 죽은 아이가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예수님이 죽은 소녀의 손을 붙잡자, 그 소녀가 부친의 믿음대로 살아났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을 겪던 여인도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큰 믿음을 보였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인은 믿음대로 고질병으로부터 놓임을 받았다.
27-31절은 두 맹인을 고치신 기적이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를 부르는 호칭이다. 메시아는 다윗왕국과 예루살렘성전을 회복시킬 왕이므로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오도록 예언되어 있었다. 두 맹인들은 예수님을 오실 자 메시아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두 맹인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은 물으셨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러자 그들은 “주여,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고, 그들은 시력을 회복했다.
32-34절은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기적이다.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는 것은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가 예수님께로 오자 귀신이 쫓겨나고 혀가 풀렸다.
믿음과 죄 사함
믿음은 몸을 쓰지 못하고, 고질병에 신음하며,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도 고칠 수 있는 능력이다.
마태복음 9장의 기적들은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활동하실 당시 연령이 삼십대에 불과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성 환자에게는 “아들아,” 여성 환자에게는 “딸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추측컨대 이 표현 속에는 예수님이 그들의 주님이시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아들과 딸의 개념은 노예를 소유한 자로서의 주인개념이 아니라,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주인개념이다.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아들아” 혹은 “딸아”라고 부르신 것은 36절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와 35절의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말씀에서 읽을 수 있듯이 예수님의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 “네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전혀 예상치 못한 표현, 즉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다.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첫째, 인간의 모든 불행과 죽음의 원인이 아담의 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죄는 분명히 만병의 근원이다. 그렇다고 모든 불행이 죄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병을 갖고 태어난 갓난아기들처럼 죄가 없이도 불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 때문에 걸리는 질병도 많다. 그러므로 원죄든, 자기 죄든, 죄가 질병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예수님만 아시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병자가 예수님을 뵈었을 때 마음으로든 구술로든 “선생님,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둘째,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영적이고 내면적이며 근원적인 것보다 피상적이고 형식적이며, 문자적인 것에 치중하였고, 육체구원 못지않게 영혼구원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이미지는 정치적 군사적이었기 때문에 그가 병을 고치거나 죄를 사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새천년시대의 메시아 상(像)을 새롭게 각인시키는 의미가 있었다.
셋째,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 즉 사람의 아들로만 인식했지,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지를 못하였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란 따름과 실천의 대상일 뿐이었지, 예배와 섬김의 대상이 아니었다. 정치적 군사적 혁명가일 뿐이었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유일신 한분만을 믿었기 때문에 메시아의 신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란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게 해줄 모세와 다윗과 같은 영웅이었지, 그들의 죄를 사해줄 구세주이거나 성육신하신 독생자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와 “네 죄 사함을 얻었다.”는 예수님이 따름과 실천의 대상만이 아니라, 예배와 섬김의 대상도 되시고, 또 사람의 아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도 되시며,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으시다는 강한 메시지를 담은 말씀이다. 유대인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메시아 상(像)이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속에 있었던 비밀이었다.
믿음의 권능
믿음은 변화의 힘이다. 하나님은 변화를 일으키는 근원이시고, 예수님은 그 변화를 우리의 삶속에 가져오는 통로이다. 예수님께 채널을 맞추면 하나님과 연결된다. 북두칠성에 눈을 맞추면 북극성을 찾을 수 있고, 북극성을 찾으면 동서남북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연결된다. 하나님께 연결되면 긍정의 변화, 곧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믿음은 변화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힘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6).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인간 메시아로 믿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신성까지 믿는 것을 말한다.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사실은 물론이고, 메시아란 사실조차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들에는 두 가지 상반된 면이 있다. 한 가지는 예수님이 행한 기적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로 즉 신성을 입증하는 표적이었다는 점과 그분에게 병을 고치고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고, 다른 것은 사람의 아들 메시아란 것을 입증할만한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마 12:39,16:4)고한 것이다. 이 상반된 의견은 예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영육의 질병을 고칠 수 있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지만, 메시아인 사실조차도 믿지 않고 의심하고 시험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불신자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기독교성서의 이해>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예수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난 후에 사람들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로 기적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다. 기적은 구경이나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용한 마술을 본들, 마술은 마술일 뿐이다. 그것이 마술이 아니라 진짜 기적이라 해도, 그러한 마술 같은 기적들은 그냥 기적으로써 아무 의미 없이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나간다. 그것은 단지 ‘희한한 구경거리’였을 뿐이다.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없다면 기적은 그냥 ‘놀라운 사건’(astonishing events)일 뿐이다. 기적의 광경은 반드시 믿음과 함께 일어나야 한다.”
도올의 이 말은 기적을 보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기적을 보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갖게 되면 기적을 볼 수 있다. 도올은 이런 말도 했다.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꼬나보는 자들은 결코 기적을 볼 수 없다. 오히려 나의 한계를 절망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 직접 나에게 자유롭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을 때만이 기적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이 우리에게 보여준 교훈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믿음대로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은 믿는 자를 도우신다는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메시지는 구원하는 힘이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있다는 점을 밝혀준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우리들의 삶속에 끌어들일 권능이 믿음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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