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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의식(눅 10:25-37, 딤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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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957 2010.06.10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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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의식(눅 10:25-37, 딤후 3:16)

윤리의식

윤리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또 모든 분야, 모든 직종에 필요하다. 남편에게는 남편윤리, 부인에게는 부인윤리, 부모에게는 부모윤리, 자녀에게는 자녀윤리, 국민에게는 국민윤리가 필요하다. 또 종업원에게는 종업원윤리, 기업가에게는 기업윤리, 정치가에게는 정치윤리, 의사에게는 의사윤리, 법조인에게는 법조윤리, 과학자에게는 생명윤리, 목회자에게는 목회윤리,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윤리가 필요하다. 또 실제로 그러한 윤리들이 존재한다.

모든 분야, 모든 직종에는 그에 걸맞은 윤리지침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의사윤리지침이다. 의사윤리지침은 문서로 명확하게 명문화되어 있다. 심지어 세속인문주의자들조차 인문주의자 성명서들(Humanist Manifesto 1,2)에 그들의 신념과 실천윤리를 명문화시켜 놓고 있다. 그런가하면 국민윤리, 정치윤리, 생명윤리, 법조윤리, 기독교윤리, 목회윤리 등은 그 이론과 실제를 책들에 설명해 놓고는 있지만 별도의 지침서는 대부분 없다. 낙태, 안락사, 사형, 전쟁, 생명의학과 같은 윤리적인 이슈들에 견해차가 크기 때문이다.

국민의 의식수준은 국민의 윤리의식에 정비례한다. 오늘날 우리 국민은 생활수준은 크게 높아졌지만, 의식수준과 윤리의식은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공부와 성공에만 최우선의 가치를 두기 때문에 학교와 가정에서 윤리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려면 윤리의식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윤리의식이란 행동과 실천에 있어서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이다. 진위(眞僞) 곧 참과 거짓을 파악하는 일은 과학이나 조직신학의 영역이고, 미추(美醜) 곧 아름다움과 추함을 파악하는 일은 미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선악(善惡) 곧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파악하는 것은 윤리의 영역이다. 따라서 윤리적으로 좋거나 선한 것은 옳은 것이며, 윤리적으로 나쁘거나 악한 것은 그릇된 것이다.

윤리는 참과 거짓에 있어서 옳고 그름과는 차이가 있다. 윤리는 참 그 자체가 아니고, 참에 근거한 옳은 행동과 실천이다. 따라서 옳음의 행동, 옳음의 실천을 위해서는 먼저 참과 진리에 대해서 잘 알아야한다.

참과 옳음의 근본은 세속인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피조물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들만이 인간의 윤리적인 행동과 실천의 규범이 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들은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성경에서 발견된다. 윤리의 근본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는 것이 수천 년에 걸쳐서 수많은 나라들과 수많은 종족들의 삶과 실천을 통해서 검증되고 입증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유대교는 윤리의 근거를 모세의 가르침과 구약성서에 두고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윤리의 근거를 예수님의 가르침과 신약성경에 두고 있다.

유대교인의 윤리의식

일상의 행동과 실천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가장 명확하게 구별하여 가장 잘 실천하는 사람들이 유대교인들이다. 유대교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윤리의식이 강하고 가장 율법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토라(Torah)라 불리는 모세오경이 있고, 그 속에 하나님이 “~하라” 또는 “하지 말라”고 명하신 613개의 계명들(mitzvot)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계명들을 우발적으로 혹은 실수로 범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랍비들이 제정한 수많은 울타리법(gezeirah)들을 갖고 있다. 이런 모든 법들, 곧 계명들과 울타리법들 또는 모든 관습법들, 유대인들의 일상의 행동과 실천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모든 규정과 시행세칙들을 통틀어서 할라카(Halakhah)라 부른다. 할라카는 “사람이 걷는 길”이란 뜻이다. 여기에는 일상의 모든 것, 즉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행하는 모든 것,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입을 수 있는 것과 입을 수 없는 것, 손 씻는 방법, 그릇 씻는 방법, 몸치장하는 방법, 업무를 보는 방법, 결혼과 이혼, 축일들과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 하나님과 이웃과 동물을 취급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규제하는 법들이 포함된다.

유대교인 할라카의 특징은 그것이 단순히 세속적인 육신의 법에 국한되지 않고, 영성을 증대시키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법이란 점에 있다. 할라카 자체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포함하고 있고, 랍비들의 울타리법들까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유대교인들의 일상적인 행동과 실천은 물론이고 종교적인 행동과 실천까지를 통틀어 규제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인들에게 있어서 세속생활과 종교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다. 유대교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정(淨)한 것과 부정(不淨)한 것 그리고 거룩한(聖) 것으로 나누는데, 윤리적인 행동이란 결국 부정한 것들을 멀리하고, 정한 것들만을 가까이함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유대교인들의 윤리의식과 실천적 행위의 장점은 그들이 더 이상 잘 지킬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계명들과 울타리법들을 지킨다는데 있다. 단점은 근본인 하나님의 계명들에서 너무 동떨어진 울타리법들을 만들어 지킨다는데 있다. 유대교인들의 잘못된 윤리의식에 대한 사례들이 신약성서 이곳저곳에 실려 있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윤리문제를 질문하고 있다. 그 율법사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들은 잘 알고 있었고 또 실천하고 있었지만, 누가 이웃인지는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여기서 율법사는 유대교인들의 대표자이다. 유대교인들은 이웃의 개념을 정(淨)한 사람과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 세리, 이방인처럼 부정한 자들은 이웃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자를 그냥 지나친 것은 성전봉사를 수행해야할 자들로서 부정한 것을 만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제사장 가문인 코헨은 가족의 장례식조차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도만난 자가 부정한 자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웃이란 점과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강도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사마리아인야말로 올바른 윤리의 실천자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인의 윤리의식

유대교인들의 가장 큰 오류는 하나님의 계명들에다가 인간이 만든 수많은 법들로 방어막을 친데 있다. 그들이 구약성서의 모세오경에 실린 하나님의 계명들을 철저히 지키려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많은 인위적인 법들을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의 울타리에 추가하였다. 그것이 그들을 율법주의로 만들고 폐쇄적인 족쇄에 묶이게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율법들을 지켜왔지만, 살림의 일보다는 죽임의 일, 질서의 일보다는 혼돈의 일, 빛의 일보다는 어둠의 일, 생산적인 일보다는 소모적인 일을 더 많이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외식과 자기우상에 빠졌다는 것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판단이었고, 아놀드 토인비와 같은 역사가들의 판단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삶과 실천의 근본은 신약성서이다. 신약성서에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 실려 있다. 그것들은 복음적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충만한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윤리의 규범으로 삼아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는 유대교인들이 범했던 오류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이들이 있다. 신약성서의 가르침보다는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앞세우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신약성서의 가르침보다는 교단전통과 교단신학자의 가르침을 앞세우는 자들이 있으며, 신약성서보다는 성령님을 좇아 행한다면서 개인의 느낌과 주관적인 판단을 앞세우는 자들도 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성경의 가르침이 동일하다는 사실과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좇는 것이 성령님을 좇아 행하는 것임을 모른데서 생긴 오류이다.

기독교인의 윤리의식은 대중의 생각을 좇는데 있지 않고,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좇는데 있다. 대중의 윤리의식과 판단은 항상 자기에게 유리하고 성공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대중의 여론과 판단을 좇기보다는 성서를 읽고 성서의 가르침위에 설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도를 간구해야 한다.

또 기독교인의 윤리의식은 정당 정치인의 주장과 판단을 좇는데 있지 않고,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좇는데 있다. 정당의 정치인들은 정권창출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민심과 표를 얻기 위해 선전과 선동정치를 일삼기 때문에 또 표를 의식해서 대중의 뜻을 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좇는다고 볼 수 없다.

또 기독교인의 윤리의식은 연예인들이나 인기인들의 주장과 행동을 좇는데 있지 않고,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좇는데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기독교인의 윤리의식은 인기 있는 설교가의 주장과 가르침을 좇는데 있지 않고,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좇는데 있다.

윤리의식이란 행동과 실천에 있어서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이다. 참과 옳음의 근본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만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지정하실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세운 새 윤리질서만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행동과 실천의 규범이 될 수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옳은 행동과 실천에 대한 윤리의식을 가지고 세상에 끌려가지 않고 세상을 선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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