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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증거(마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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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183 2010.07.28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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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증거(마 1:1,17)

유대교인들의 믿음의 특징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 대까지 총 40대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다. 17절을 보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가 열네 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열네 대였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희망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이뤄졌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특이한 족보이자, 아브라함과 그리스도 사이에 이어지고 있는 희망의 끈을 보여주는 족보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출생연도를 유대력으로 1948년(주전 1813년)생으로 보고 있다. 아브라함이 나이 75세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그분의 마음에 가나안 땅에 대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셨다(빌 2:13).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희망을 품은 때가 나이 일흔다섯이었고, 2010년 8월은 유대력으로 5771년이므로 그 때가 주전 1738년이었고, 지금으로부터 3748년 전의 일이다. 아브라함의 출생부터 그리스도의 출생까지 걸린 시간이 1813년,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후부터 그리스도의 교회가 출범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768년이다. 이 1768년은 기독교 시각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희망이 정확하게 이뤄지는데 걸린 시간이다.

아브라함이 나이 일흔다섯에 가나안 땅의 희망을 품었다는 사실도 놀랍고, 또 그 희망이 1768년 만에 이뤄졌다는 사실도 놀랍다.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 시각에서 본 것이고, 유대교 시각에서 볼 때, 그들의 희망이 아직 완벽하게 영적으로까지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세속적으로 겨우 이뤄지는데 걸린 시간이 주전 1738부터 주후 1948년까지 무려 3686년이다. 이것은 유대교인들의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지,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기다렸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희망을 간직했는지를 말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믿음의 특징은 결단코 접지 않는 희망과 불굴의 인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약속을 받고 다윗 왕이 그 약속을 성취하는데 걸린 시간이 14대 임을 말해준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을 가장 강성한 나라로 일으켜 세운 임금이었다. 따라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정치군사적인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상 아브라함의 약속이 가장 근접하게 이뤄진 때가 다윗 임금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 왕국은 14대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굳건하게 섰던 왕국의 터가 처참하게 허물어졌다. 임금으로부터 백성들까지 모두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로부터 다시 14대만에 허물어진 터를 굳건하게 다시 세우고, 완벽하고 강성한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그분의 왕국은 더 이상 세속국가가 아니었다. 그분이 세우신 나라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활동했던 예언자들이 예견한 메시아 왕국이 유대교의 성전예배를 중심으로 한 영적인 나라일 뿐 아니라 완벽한 세속국가라고 믿는다. 이 해석의 차이가 바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이후 14대만에 찾아온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지 못하고 다시 2천년의 시간을 유배와 떠돌이로 보내야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믿음의 특징이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정치적이며, 그것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 단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특징

떠돌이 아브라함의 마음에 가나안 땅의 희망이 생긴 이후 무려 1768년이나 된 이 오래 묵은 꿈이 주후 30년 오순절 날에 이뤄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였다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다.

17절의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는 이스라엘 왕국의 출범과 발전기를 말한다.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이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모세가 싹을 틔어 다윗이 통일왕국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 그리고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는 왕국의 쇠퇴기와 멸망을 말한다. 솔로몬사후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졌고, 북이스라엘 왕국이 먼저 망한 지 136년 만에 남유다 왕국도 망하였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는 노예와 떠돌이였던 아브라함이후 모세 때처럼 예언자들은 새로운 희망 또는 두 번째 희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희망의 싹을 틔운 분이 모세였다면, 두 번째 희망의 싹을 틔운 분은 예수님이었다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다. 그리고 바울이 가나안 땅의 국경을 온 세계로 그 지경을 넓혔고, 예루살렘과 유대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는 기독교왕국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 오늘날까지 이 왕국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가나안 땅을 지독하게 아주 눈물겹게 집착하는 유대인들로서 바울과 같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희망의 지경을 예루살렘과 유대뿐만 아니라 (혹은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포기할망정)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넓혔다는 것도 놀랍고, 교회가 출범된 지 283년 만인 주후 313년에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고, 그 후 79년 만인 주후 392년에 당시 천하였던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는 사실도 놀랍다. 불법종교에서 합법종교가 되고 다시 국교가 되기까지 걸린 362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무수히 많은 탄압과 핍박을 받아야 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꺼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죽음을 당할망정,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평화의 왕국을 희망하며, 그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며”(히 10:33-34),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히 11:35-37).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나라를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기다렸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희망을 간직했는지를 말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특징이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희망과 불굴의 인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장 39절은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속에 치우쳐 기독교 신앙을 얕잡아 볼 뿐 아니라,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모든 믿음의 용사들처럼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히 12:1-2).

인류의 희망과 증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희망이요, 그 증거임을 보여주는 것이 마태복음이다. 또 마태복음은 작게는 유대인들의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이뤄졌고, 그 나라가 그리스도의 왕국 또는 천국임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 이르는 족보로 시작하여 예수님이 전하는 천국복음과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많은 말씀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417)는 외침의 소개로 시작하여 크게 다섯 개의 설교가 소개되고 있다. 중심 장인 13장에는 천국 비유 8개가 실려 있는데, 천국의 본질과 성격을 말해준다. 또 5-7장 산상설교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를 설교하고 있고, 24-25장에는 종말에 관한 비유 8개가 실려 있는데, 천국이 임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 10장은 천국의 시작을, 18장은 천국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이스라엘 왕국이란 한계를 뛰어넘는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 천국을 말하고 한다. 아브라함이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모세가 싹을 틔어 다윗이 통일왕국의 열매를 맺게 하였지만, 결국 쇠퇴하고 멸망한 유한하고 실패한 일시적인 나라가 아닌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 유대인들이 지독하게 또는 눈물겹게 집착하지만, 외침이 끊임없고 가난과 지진과 전쟁으로 흔들리는 불안한 가나안 땅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나라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희망이요, 증거가 된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의 희망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인류의 희망에로 지평을 넓히고 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의 희망인 다가올 세계의 성격을 유대인들의 것과 달리 이해하였다. 그들이 꿈꾸는 육체적인 물질세계의 다가올 세상을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하였다. 임시적이고 유한한 것에서 무한하고 영원한 것에로 눈을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마태가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한 희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속적인 희망에 매어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강성한 나라를 꿈꾸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의 본질이요 특성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희망은 철저하게 현실 중심, 팔레스타인 중심, 예루살렘과 시온과 지상의 성전 중심이다. 그들의 희망은 철저하게 이 땅에서 이뤄지는 지상의 나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태복음의 천국복음을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가? 오랜 시간 하나님을 믿었으면서도 과연 마태복음의 천국복음을 이해하고 있는가?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가? 또 사도들이 이해했고 실천했던 믿음을 우리는 실천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철두철미하게 믿지만, 그들의 희망이 지나치게 세속적인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의 개념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마태복음과 히브리서를 비롯한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고, 지병 때문에 하나님이 없고, 작고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고, 환란과 역경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제대로 된 희망을 품고 있고 또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고민하고 점검해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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