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능력(눅 1:1)
본문
희망의 능력(눅 1:1)
나그네의 희망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인들의 이집트탈출과 광야생활 그리고 가나안 입성이 누가문서의 역사기술방법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만일 연관성이 있다면, 누가는 예수님의 짧은 생애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모세와 히브리인들의 이집트탈출의 관점에서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모세의 실체가 되고,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인들의 실체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지상에서의 삶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 이르러 가나안땅에로 가는 행진(여행) 혹은 나그넷길의 원형이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기까지 겪었던 고난의 행군, 이집트에서의 배척은 물론이고, 광야생활 중에 이웃 민족들로부터 받았던 배척, 또 그들과 싸워야했던 투쟁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악세상을 떠나 천성에 들어가기까지 겪어야하는 사단의 유혹과 불신자들의 배척 또 그들을 싸워 물리쳐야하는 투쟁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이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후부터 광야에서 40년간 지내면서 만나를 먹고 반석의 샘물을 마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성막예배를 드렸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악세상을 떠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아 40년으로 상징되는 일생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 주의 만찬을 먹고 마시며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특히 히브리인들의 광야생활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지시한 양식대로 이동성막을 짓고, 하나님이 지시한 방식대로 예배를 드렸던 광야교회시대와 하나님의 성령님의 상징인 불기둥과 구름기둥(Shekinah, 하나님의 현현)의 인도를 밤낮으로 받아 가나안땅에로 향한 시대는 누가가 현시대를 교회시대로, 성령님의 시대로, 은혜시대로, 천성을 맛보고 즐기는 종말론시대로 설명한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교회시대란 마치 히브리인들이 노예의 사슬과 속박에서 벗어나 홍해건너편의 광야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받던 광야시대요,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가나안땅을 희망하며, 가나안땅의 축복을 미리 맛보고 즐기던 히브리인들의 종말론시대의 원형과 실체를 말한다.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쉐키나(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과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와 타민족의 배척과 두려움과 의심과 유혹과 싸우면서 가나안땅을 향해 중단 없는 전진을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성령 충만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며 그 어떤 무서운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하늘 가나안땅을 향해서 하늘 가나안땅을 희망하며 하늘 가나안땅의 축복을 미리 맛보고 즐기면서 중단 없이 전진하는 순례자들이 될 것을 강조한다.
히브리인들은 끝내 가나안땅의 희망을 이뤘고 다윗왕국 때는 그 영광이 최고조에 달했으나 불행히도 다윗왕국은 망했고 예언자들이 빼앗긴 가나안땅의 회복을 희망한 이후 그 두 번째 희망이 교회시대를 통해서 이뤄졌으며, 이를 은혜시대, 성령시대 혹은 종말론시대라 일컫는데, 교회시대야말로 인류에게 활짝 열린 새 천년시대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 누가복음 1장 1절이며, “우리 중에 이뤄진 사실”이다.
희망의 능력
히브리인들의 희망의 능력은 하나님이셨지만, 보이지 아니하심으로, 계시의 형태 즉 성막 법궤뚜껑(보좌) 위로 쏟아 오른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대신하셨다.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현현 또는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이었다. 민수기 9장 15-23절을 보면,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지시한 양식대로 성막을 세운 날로부터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머물렀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히브리인들이 구름이 앞서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텐트를 치고 머물렀다.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을 인도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바로 이 하나님의 구름 또는 쉐키나 영광이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먼저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였고, 나중 것은 하나님의 종을 통한 지시였다. 이 쉐키나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님이시다. 광야에서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행진하는 히브리인들에게 쉐키나가 희망의 능력이었듯이, 교회에서 하늘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행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님이 희망의 능력이다. 이점을 간파한 분이 누가였다. 그래서 누가는 광야시대가 쉐키나시대였듯이, 교회시대를 성령시대로 보았고, 광야시대가 하나님의 은혜시대였듯이, 교회시대를 하나님의 은혜시대로 보았다. 광야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듯이, 교회 역시 박해와 환난을 극복해야할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광야의 길이 가나안땅을 향해 행진하는 순례의 길이었듯이, 기독교 신앙의 길 역시 하늘 가나안땅을 향해 행진하는 순례의 길임을 누가는 그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고난의 행진을 해야 하는, 가시밭길을 걸어야하는 신앙의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희망의 능력이 되신 성령님의 지시를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것임을 누가는 권면하고 있다. 성령님의 지시를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 성령 충만의 조건이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조건이다.
이들 조건이 갖춰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의 삶을 나그네의 삶 즉 타향살이로 보게 되고, 세상의 것을 천상의 것의 그림자와 모형으로 여기게 된다. 세상에서 보는 것은 동굴 속에 갇힌 죄수가 벽면에 비춰진 희미한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이 광야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행진하였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이생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참 세계, 빛의 세계, 영원한 본향세계를 바라보고 행진한다. 돌아갈 본향세계가 있기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에 험난한 나그네의 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견딜 수 있다. 가난이 부끄럽지 않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삶은 짧을수록 좋다는 믿음이 있다. 지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천상에 희망을 두고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상 나그네의 희망이다. 시인 천상병은 ‘귀천’(歸天)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희망의 성취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선교비유가 14개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선교란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고대 이집트의 히브리 노예들이 홍해를 건넌 후 자유인으로서 새롭게 시작하는 떠돌이 광야생활과 같고, 험난한 떠돌이 광야생활을 끝낸 후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땅에서 안정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삶은 노예로서의 삶이다. 두 번째 삶은 자유인으로서의 삶이지만, 삶의 터전이 없는 떠돌이의 삶이다. 세 번째의 삶은 자유인으로서뿐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축복의 삶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이 세 가지 삶을 위해서 두 개의 물을 건넜다. 홍해를 건넜고, 요단강을 건넜다. 따라서 물은 가진 것을 이편에 다 내려놓고 더 나은 저편 세상을 위해서 반드시 건너야할 경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60년에 율리우스 시저(BC 102-44)가 폼페이우스와 결탁하고 원로원에 대항하고 있을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서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을 평정하였다. 명성이 높아지자, 기원전 49년에 폼페이우스는 시저를 배신하고 원로원과 결탁하여 시저를 소환한다.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명령이었는데, 시저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쳐들어갔고,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군대를 물리치고 로마제국의 일인자가 되었다. 여기서 루비콘(Rubicon) 강은 라틴어로 '붉은 강'이란 뜻으로,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경계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시저가 붉은 강을 건너 천하를 얻은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붉은 바다 홍해를 건넌 후 가나안땅을 얻은 것과 비교된다. 아무튼 희망을 이루기위해서는 버릴 것을 버리고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이나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런 결단도 없이 그런 결의와 실천도 없이 희망을 이루겠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누가복음에는 돌아온 탕자(눅 15:11-32)와 거지 나사로(눅 16:19-31)의 비유가 있고, 세리장 삭개오(눅 19:1-12)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는데, 이들 이야기들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로 희망의 성취와 나눔, 둘째로 처음 것의 상실, 셋째로 새 출발을 말하고 있다. 먼저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께 물려받은 전 재산을 다 날리고 거지가 되어 돼지먹이조차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처참한 신세에서 아버지의 집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내 회개하고 돌아가 아버지의 품에서 새 출발함으로써 희망을 성취하는 이야기이다. 거지 나사로는 부와 건강을 잃고 가난하고 병든 거지로 살았지만,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을 보면 그가 천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삭개오는 탐관오리로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지만,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죄인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남의 것을 속인 것에 대해서는 네 배로 갚겠다고 하였다. 이들 이야기들에서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것들을 이편에 다 내려놓고 더 좋은 저편 세상에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 어떤 배척에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함과 쉬지 않는 기도로써 천성을 향한 행진을 쉬지 말아야 한다.
- 이전글 희망의 열매(요 1:1) 10.08.17
- 다음글 희망의 시작(막 1:1) 10.08.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