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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발전(행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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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183 2010.09.01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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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발전(행 1:8)

우주적 교회시대의 개방

사도행전의 중요성은 이 책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관에 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로마가 천하를 호령하던 당대를 교회시대(광야시대)로 이해하였다. 당시 교회는 이단시 취급될 뿐 아니라, 탄압을 받던 아주 작은 공동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를 이 겨자씨와 같은 공동체의 시대 곧 교회시대로 조망(眺望)하였다. 놀라운 것은 누가가 내다본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10여 차례의 대 환란을 겪고서도, 주후 30년 예루살렘 교회가 출범된 지 360여년 만에,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대로마제국을 기독교왕국의 새천년시대로 만들어버리는 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새롭고 놀라운 새천년시대의 출범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어떻게 불법종교로써 박해를 받던 작은 공동체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될 수 있었는가? ‘가톨릭’(우주적, 보편적) 교회라는 호칭을 문서에 등장시키고, 이 호칭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인물들이 있었다. 동시대에 태어나 같은 시기에 죽었던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들이다.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7 혹은 340-397)는 본래 밀라노에 주재했던 집정관이었으나 삼위일체를 믿는 정통교회와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을 부정했던 아리우스파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주교직 경합 때 중재를 맡았다가 추대되어 374년 30대 후반에 침례 받고 일주일 만에 주교에 임명된, 말 그대로 급조된 주교였지만, 주교로 재임했던 20여 년간 정치 종교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기독교의 위상을 크게 높였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시켜 침례를 베풀어 성인이 되게 한 인물이다. 암브로시우스의 활동은 가히 영웅적이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와 이교에 맞서 싸웠고, 원로원에 승리의 여신 니케 상을 세우려한 심마쿠스 황제에 대항하였으며, 두 개의 대성당을 아리우스파에게 넘기려 했던 황제의 군대를 격파시켰다. 또 양민들의 대학살을 명령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47-395) 황제를 굴복시켜 참회시킨 일은 가히 영웅적이었다.

390년에 그리스 데살로니가에서 주민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총독을 살해하고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를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7천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암브로시우스는 즉시 서한을 황제에게 보내 공개적인 참회를 요구하면서 참회 때까지 예배당에 오지 말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를 묵살한 황제는 부활절 날 예배당에 행차하였고, 암브로시우스는 출입문을 가로막고 황제의 입당을 저지하였다. 암브로시우스의 단호한 저항에 막혀 테오도시우스는 발길을 돌렸고, 8개월이 지난 성탄절에 다시 예배당에 행차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번에도 입구에서 황제를 제지하며 데살로니가에서 자행된 주민학살을 참회토록 하였다. 결국 황제는 자신도 인간에 불과함을 깨닫고 주교의 명령에 굴복하여 맨머리에 베옷을 입고 참회하였다. 그 후에야 그는 주교로부터 주의 만찬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2년만인 392년에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암브로시우스의 용기 있는 행동과 테오도시우스의 국교 선포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모두 우주적 교회시대를 활짝 열고자한 희망 즉 가나안땅의 희망을 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새천년의 교회시대

테오도시우스는 원래 동로마제국의 황제였으나 4개월에 불과했지만 서로마제국까지 함께 다스렸던 마지막 황제였다. 그 후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리가 고착되어 다시는 통일되지 못했다.

379년경 테오도시우스가 통치하던 동로마 제국 내에는 삼위일체론(니케아 신조)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 사이에 적대 관계가 고조되면서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심한 병에서 회복된 뒤 380년 침례를 받았고, 그 누구의 자문을 구하지도 않고 모든 로마시민들이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라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삼위일체론을 믿는 신자들만 우주적 혹은 보편적(가톨릭)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가톨릭이라는 호칭이 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듬해인 381년에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케 하여 주교 150명이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확정케 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가 로마 교구와 버금가는 명예와 위신을 갖게 하였다. 385년부터 테오도시우스는 동물제사를 엄격히 금지시켰고, 391년에 일체의 비기독교 의식을 금지시켰으며, 392년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숭배를 제국의 전역에서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이후 로마제국에서는 비기독교 신앙이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그 어떤 비기독교적인 진흥이 나오지 못하였다.

이 무렵인 391년에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 354-430년)가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에서 장로(목사)로 장립되었고, 4년 후인 395년부터 공동주교를 거쳐 400년부터 단독 주교가 되어 430년 죽을 때까지 북아프리카의 교회들을 섬겼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천년시대의 끝과 새로운 천년시대의 시작을 경험한 행운아였다. 그의 시대에 교부시대가 끝나고 중세시대가 시작되었고, 기독교 박해시대가 끝나고 국교시대가 열렸으며, 자신의 영향권아래서 393년과 397년에 신약성서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되었으며,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로마제국이 망하고 하나님의 도성(神國, De Civitate Dei)이 열린 종말론시대였기 때문이었다.

히브리인들의 광야시대는 가나안땅을 바라보는 종말론시대였다. 동시에 광야시대는 하나님의 세키나(구름기둥)가 인도하던 이동성막교회시대였다. 이 광야교회는 기독교회의 예표였다. 기독교회시대는 하늘 가나안땅을 바라보는 종말론시대이다.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희망했던 교회시대가 바로 새천년시대였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서 순례하는 자들이었다. 암브로시우스와 테오도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희망했던 교회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광야시대와 가나안땅 시대 사이에 요단강 말고는 별도의 새천년시대가 없었듯이, 또 광야시대가 메시아의 예표였던 모세시대였듯이, 교회시대와 하늘 가나안땅사이에 별도의 천년왕국시대나 메시아시대가 있을 수 없다. 교회시대가 곧바로 메시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이다. 이것을 믿었던 인물들이 누가요, 암브로시우스요, 테오도시우스요,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교회시대를 새천년시대 곧 메시아왕국시대로 보았다.

광야의식

아우구스티누스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로마가 43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신약성서의 저자들처럼 이 세상을 가나안땅으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실감하였다. 그래서 그는 전쟁과 자연재해에 흔들리고 무너지는 유한하고 일시적인 가치들을 뛰어 넘어 영원불변한 세계를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걸어야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바로 순례자들의 광야의식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히브리민족 그리고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녀들은 그 약속이 다름 아닌 가나안땅 곧 하나님의 도성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약속 또는 이 희망을 바라보고 이 희망을 향해서 끊임없이 순례하는 떠돌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이런 의식이 곧 순례자들의 광야의식이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순례자의 모범으로 설명하였고,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 특히 바울을 순례자의 모범으로 설명하였다. 예수님과 바울은 순례자들로서 광야의식이 충만했던 분들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현 위치 또는 현주소는 광야이다. 아브라함이 떠나온 죄악세상 갈대아 우르나 하란이 아니다. 히브리인들이 떠나온 죄악세상 고대이집트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자녀들은 이미 죄악세상을 사이에 둔 붉은 바다 홍해를 건너버린 뽑힌 자들이다. 율리우스 시저처럼 붉은 강 루비콘을 건너버린 하나님의 군대의 용사들이다. 이미 주사위를 땅에 던진 사람들이다. 돌이킬 수 없고 돌이켜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다. 오직 전진만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를 외칠 일만 남겨놓은 사람들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이 그랬고, 율리우스 시저와 그의 용사들이 그랬듯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일만 남긴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쉐키나(구름기둥)를 신실하게 좇았던 것처럼, 성령 충만하여 신실하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하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며 하늘 가나안땅을 정복해야 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마 11:12)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다”(히 10:39).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외치며, 모세의 노래,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할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광야를 걷고 있다. 목적지 가나안땅을 향해서 걸음을 내딛고 있는지,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기독교 역사는 광야의식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곧 가나안땅시대, 새천년시대를 희망하는 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음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발전을 가져왔던 시기들은 대개가 새천년 가나안땅의 시대에 대한 희망이 충만했을 때였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기술한 역사가 바로 이것이었다. 누가의 강력한 메시지는 우리가 광야에 있고, 하늘 가나안땅을 향해서 행진하고 있는 순례자들이며, 성령 충만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면 새천년 역사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외치게 될 그 순간까지 전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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