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상속(롬 4;13-16, 고후 5:1-5, 엡 3:1-13)
본문
희망의 상속(롬 4;13-16, 고후 5:1-5, 엡 3:1-13)
로마서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기쁜 소식)은 희망을 상속받는데 차별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가나안땅)에 차별이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희망을 상속받는데 차별이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바울은 민족 신분 성별 그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 한 가지 제약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2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 하였다. 또 10장 12절에서는 구원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선포하였다. ‘차별’의 반대말은 ‘선민’이다. 따라서 차별과 선민이란 단어는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뽑힌 민족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한분뿐이고, 그 한분뿐인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신(神)이므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란 결국 무신민족(無神民族)이다.
바울은 ‘기업’(가나안땅)과 ‘상속자’(후사)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였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3748년 전 가나안땅의 희망을 최초로 품은 이후 지금(2010년)까지 이 희망을 꺾지 않고 있다. 유대교용어로 기업은 ‘올람 하바’(다가올 세상)이고, 상속자는 이 다가올 세상에 들어가 살 자들이다.
아브라함은 3748년 전 가나안땅의 희망을 품었던 최초의 선민(이 희망을 품은 자가 선민이다)인데, 바울은 그의 행위와 믿음의 성격을 로마서 4장에서 설명하였다. 행위를 율법과 할례로 연결시켰고, 믿음을 의로움과 무할례로 연결시키면서 율법과 할례로 연결되는 행위가 구원에 무용함을 설파하였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집착하는 문자적인 지상의 가나안땅과 그 땅의 주인이 유대인들이라고 믿는 배타주의 그리고 율법에 매인 유대교 믿음의 한계와 문제점을 파헤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얻는 차별 없는 구원을 설파하였다. 로마서 4장 13-16절이 이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또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는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땅을 희망하며 가나안땅을 바라보며 가나안땅의 영광을 받기 위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난을 받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늘 가나안땅을 희망하며, 하늘 가나안땅을 바라보며, 하늘 가나안땅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을 설파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는 영광을 받으신 것과 같다.
고린도후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도 ‘기업’(가나안땅)과 ‘상속자’(후사)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고린도후서 5장 1절부터 10절까지를 보면, 바울은 지상에서의 집을 “장막집” 즉 천막집이라고 말씀하였다. 이것은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뿐만 아니라, 히브리 민족이 40년 광야생활에서 사용했던 임시거처였다. 그런데 바울은 이 장막집을 우리 몸의 육체에 빗되어 사용하였다. 이 땅에서의 삶이 유한하고, 임시적인 나그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장막집에 반대되는 더 좋은 집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또는 “영원한 집”이라고 하였다. 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또는 “영원한 집”은 유대인들이 희망하는 지상의 가나안땅에 있는 집이 아니라, 하늘 가나안땅에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광야를 떠돌던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땅을 얼마나 사모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땅의 것들보다 ‘더 좋은 육체’와 ‘더 좋은 세상’이 예비 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상속받을 자들임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5절에서 기업이란 말 대신에 ‘장차올 것’이란 표현을 썼다. 우리말 성경 5절은 “이것을(영원한 집)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로 번역하였지만, 영어성경은 “장차올 것을 보장하는 보증금으로써”(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성령님은 ‘장차올 좋은 것’ 즉 하늘 가나안땅에 대한 ‘약정’의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설명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고린도후서 1장 22절은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고 하였다. 여기서 하늘 가나안땅에 대한 약정의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성령님을 언급한 것은 성령님의 실수 없고 오류 없는 확실한 인도를 말한다. 그것은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히브리 민족을 가나안땅에로 인도한 것과 같다. 교회는 성령님의 보증과 인감 찍음으로 가나안땅(구원)의 약속을 받고, 그 축복을 함께 나누며 누리는 공동체이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 약속에로 나아가는 나그네 공동체이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 신앙인들이 현실에 안주하여 광야생활에 만족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도의 목적지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땅이기 때문이다. 또 낙심하거나 희망을 포기하거나 고난의 길을 피하려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4장 16-18절은 우리에게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씀하였다. 이 땅은 우리의 마지막 삶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낡아지는 것이고, 고난의 삶이며, 보이는 것이고, 잠깐에 불과한 것이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희망은 새로워지는 것이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며,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에베소서
에베소서 3장 6절은 놀랄만한 선언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희망하는 가나안땅,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 바울의 시대까지 무려 1800여 년 동안 기다려왔던 약속의 땅을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들으면 천인공노할 망언이라고 생각했을 법한 그런 엄청난 선언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바울의 이 선언은 지상의 가나안땅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늘 가나안땅을 두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적으로 지상의 가나안땅은 유대인들에게 국한된 땅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 하늘 가나안땅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모든 사람들, 모든 민족, 모든 남녀, 모든 신분의 차별 없이 누구나 상속받을 수 있는 땅이다. 기독교가 아니면 상상도 해볼 수 없는 엄청난 복음이다. “이 복음을 위하여”(7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바울 자신을 복음의 일군으로 삼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8-9절)고 하였다.
바울의 깨달음은 이렇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가나안땅의 적통 상속자가 아닌 외국인이었던 우리 이방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적통인 유대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아브라함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나눠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이 우리 이방인에게는 엄청난 복음의 기쁜 소식이요, 만세 전부터 감추었던 하나님의 비밀이며, 하나님의 경륜이란 것이다. 골수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이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 엄청난 복음이 바로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고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말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온갖 영적인 복을 주시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고 있다. 우리는 다 죄의 삯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람들이며, 세상풍조를 따라 살았고,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따라 살았으며,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던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명품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전에 우리는 육신적으로 이방인이었고, 유대인들로부터 할례 받지 못한 자란 소리를 듣던 자들이었으며,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도 없었으며, 선민의 약속도 받지 못했고, 그래서 아무런 희망 없이, 하나님도 없이 황야의 늑대처럼 살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 덕분에, 그분이 흘리신 보혈덕분에 하나님의 자녀까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늘 가나안땅의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 아니고, 나그네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집의 가족이라는 것이다. 이 땅의 가나안보다 더 좋은 하늘 가나안땅의 상속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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