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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실상(히 1:1-2,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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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818 2010.09.1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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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실상(히 1:1-2, 11:1)

예수님에 대한 믿음

희망의 실상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신실하게 따르는 믿음이다. 히브리서 11장 1장은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광야에서 40년을 떠돌던 히브리인들이 간절히 희망했던 것은 가나안땅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희망했던 가나안땅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그들의 후손인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의 희망을 품은이후 지금까지 3748년 동안 가나안땅을 간절히 희망했고,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자유민이 되기를 희망하였지만, 3748년 가운데 3000년 정도는 그것이 그들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고, 그들의 손에 잘 잡히지도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이 “보지 못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희망의 끈을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보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면 희망을 포기할 사람이 없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으면 포기할 사람이 생긴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노예 신분으로 처참하게 지내던 히브리인들에게 희망하던 것을 실현시켜주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해준 하나님의 사람이 모세였다. 따라서 모세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제1 대구원사건을 실상으로 만들어낸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바벨론유배이후 유대인들은 제2 대구원사건을 실상으로 만들어낼 새로운 그리스도를 믿고 기다렸다. 히브리서는 그가 바로 예수님이란 점을 설파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이 사막의 모래바람과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와 의심의 구름과 불신의 그늘과 싸우며 모세를 믿고 따라야했던 것처럼, 또 기어코 가나안땅에 들어갔던 것처럼,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라야만 희망하는 것들을 실상이 되게 하고, 보지 못하던 것들을 증거가 되게 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희망의 증거가 된 자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희망의 증거가 된 자들은 구약시대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아니지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는 충분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수준의 믿음이 아니라, 그 어떤 시련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믿음,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신실한 믿음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갈렙과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모세를 보좌한 것과 같다. 그런데 옛적 즉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히브리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고,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다고 하였다(1:1-2). 그러므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12:1-2)고 하였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예수님을 믿는 데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지속적으로 그분을 주목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속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데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믿음의 모범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장차 받아 누릴 영광을 위해서 달게 받으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는 보상을 받으셨다.

장차 올 기업의 상속

히브리서에는 상속자란 말이 몇 번 나온다. “만유의 상속자”(1:2), “구원 받을 상속자”(히 1:14), “의의 상속자”(히 11:7)가 그것들이다. 기업이란 말도 몇 번 나온다. “이름을 기업으로”(히 1:4),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히 6:12,17), “영원한 기업의 약속”(히 9:15),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히 11:8),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히 12:17) 등이 그것들이다.

여기서 기업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올람 하바,’ 장차 올 좋은 세상을 말한다. 히브리인들이 애급을 탈출하여 광야에 이른 것은 최종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도달해야할 목적지는 가나안땅이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따로 불러냄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최종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도착해야할 목적지는 하늘 가나안땅이다. 히브리서 12장 18-28절을 보면,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 도달할 곳은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란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오름의 행진과 방향은 저 팔레스타인 땅의 시온산과 예루살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시온이다.

이렇게 말씀하는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희망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희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장차올 좋은 것’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하였는데, 6장 9절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더 좋은 것이 있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좋은 소망’(7:19), ‘더 좋은 언약’(7:22), ‘더 좋은 약속’(8:6), ‘장차올 좋은 일’(9:11), ‘장차 나타날 좋은 것’(10:1)을 연이어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11장에서는 역사를 수놓은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더 좋은 것을 사모’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였다’고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시고, 미리 세워둔 ‘더 좋은 계획’에 따라(40절) 그들을 위한 ‘한 도시’ 곧 하나님의 나라를 마련해 주셨다(16절)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바라지 않았다’(35절)고까지 말한다.

‘장차올 좋은 기업’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신실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은 게으르지 말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이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고(12절),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을 확실하게 받게 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17절)고 말씀한다. 또 11장은 허다한 성도들이 비록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만 의지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서 나아갔다고 말씀한다.

참 안식의 땅

유대교사상 가운데 중요한 테마가 안식이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의 땅은 가나안이다. 그래서 히브리 떠돌이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땅에 진입한다. 그들의 후손들이 애급에서 탈출하여 진입한 곳이 가나안땅이다. 가나안땅은 오랜 떠돌이와 노예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얻는 안식의 상징이다.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 흩여져 사는 유대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땅이 아닌 곳은 그곳이 아무리 살기 좋은 곳일지라도 자유를 빼앗긴 유배지에 불과하다. 이방인들의 눈에 가나안땅은 불모지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의 눈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희망의 땅이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요, 거룩한 땅이요, 영원한 안식처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해마다 유월절 밤이면,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고 희망을 노래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국민은 국가를 통해서 “동쪽 끝자락을 향해서 시온에로 눈은 향하고,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천년을 간직한 희망은 우리 자신의 땅에서 시온과 예루살렘 땅에서 자유민이 되는 것”이라고 희망을 노래한다.

이런 간절함 때문에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으로 거침없이 향한다. 이것을 ‘알리야’(aliyah)라 부르는데 ‘오름’이란 뜻이며, 예루살렘과 시온에로 오르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 희망이 이뤄질 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믿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가나안 땅에 오름, 이것은 분명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이자 원형이며, 끈질긴 집념이면서 절대 신앙이다. 이것이 그들을 유대인이 되게 하는 조건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이 안식에 대한 희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시각이다. 유대인들의 안식개념은 지나치게 민족적이고, 토지 중심적이며, 현세적이다. 이런 안식개념을 우주적이고 내세적이며 영적인 개념으로 승화시킨 것이 신약성경이다. 이 땅에는 그 어떤 곳에도 진정한 안식이 없다. 이 땅에는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없다. 이 땅에서는 갈등과 전쟁과 질병과 자연재해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세상의 가나안땅에서는 결코 젖과 꿀이 흐를 수 없다. 이 세상의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 결코 될 수 없다. 이 땅의 요단강에서는 정의와 평화가 넘칠 수 없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영원한 안식, 참 안식을 이 땅 가나안에서 찾지 않고 하늘 가나안땅에서 찾으며, 이 땅 예루살렘에서 찾지 않고, 하늘 예루살렘에서 찾는다. 이 땅 요단강에서 찾지 않고, 하늘 생명수강에서 찾는다. 유한한 것, 일시적인 것, 불완전한 것, 지엽적인 것에서 안식을 찾지 않고, 무한한 것, 영원한 것, 완전한 것, 근본적인 것에서 안식을 찾는다.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의 안식을 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막힌 담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길과 오직 믿음과 은혜로 법적인 속죄는 물론이고 양심까지 깨끗케 사함 받는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복을 풍성히 채워주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주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확실하게 가져다주실 우리를 위한 우리의 편이신 구세주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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