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행 20: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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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행 20:17-35)
정약용의 경험
정약용은 22세(1783, 1762년생)에 과거에 합격하여 냉혹한 정치세계에 입문하였다. 다음해인 23세(1784, 매형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해)에 큰 형님의 처남인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와 서학에 관하여 듣고 그해 음력 9월에 매형 이승훈으로부터 요한이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이 때 둘째 형인 약전도 함께 세례를 받았는데, 진산사람 외사촌 윤지충에게 권고하여 신앙을 갖게 하였다. 24세 때인 1785년 봄에 중인 김범우의 집(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에서 신앙집회를 갖던 중에 발각되어 훈방조치를 당한 바가 있고, 26세 때인 1787년에는 매형 이승훈과 함께 반촌(泮村)에서 공부를 핑계로 천주학을 강습하다가 이기경에게 발각되어 문제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친구 이기경은 목만중 홍낙안과 함께 원수로 변하였다.
29세(1790)에 베이징 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조선로마가톨릭교회에 제사금지령을 내렸고, 정약용의 외사촌 윤지충은 자신의 외사촌인 권상연과 함께 신주를 불살랐으며, 다음해(1791)에 어머니 권(權)씨가 죽자 위패를 폐하고 제사를 금한 것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에서 참수되어 조선천주교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정약용, 정약전보다 2년 늦게(1786) 전도를 받은 셋째 정약종(순교자)을 제외한 약용과 약전 두 형제는 물론 상당수의 양반학자들이 제사를 금하라는 북경주교의 금지령과 윤지충과 권상연의 진산사건에 충격을 받아 천주교를 떠났다. 정약용은 배교하기 직전(1790-1795)에 금정(金井)으로 좌천되어 임금의 의도대로 금정의 천주교인들을 탄압하였으나 정적(政敵)들의 비방과 상소가 끊이지 않자, 36세(1797)에 자기의 배교를 명백히 밝히는 상소, 일명 자명소(自明疏)를 써서 임금에게 바쳤다. 이 글에서 자신은 진산사건(1791) 이후에 천주교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고 밝혔다. 이로 보건데 정약용은 정적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짧게는 8년, 길게는 11년까지 가톨릭신자로 남아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정약용의 직접적인 배교의 동기를 자신을 두텁게 신임하고 총애했던 임금을 배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천지대군 하나님을 버리고 작은 조선의 임금을 택했던 것이다.
정약용과 남인세력을 견제하고 질투하던 집권세력 북인벽파는 1800년에 정조가 죽자 다음해에 가톨릭신자가 많았던 남인시파를 향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약용을 죽이기 위한 숙청의 칼을 뽑아들었다. 1801년 초봄에 시작된 박해 때에 상당수의 남인 정치인들이 천주학도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는데, 40세의 정약용과 형들인 약전과 약종, 매형인 이승훈 등이 포함되었다. 정약용이 제기할 수 없도록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킨 정약종에게 극형을 추가하였고, 이승훈을 처형하였다. 정약용은 약전과 함께 유배를 당하였으나 동년 겨울에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백서사건으로 체포됨으로써 약용과 약전을 황사영과 함께 엮어서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다. 이때에도 극한의 고문과 회유를 물리치고 살아남아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자기를 기어코 죽이려한 서용보 일당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학문에 정진하였고, 유배지에 머문 18년 동안 <목민심서> 48권을 비롯해서 무려 492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오늘날의 책으로도 십 수권에 이른다. 유배지에서 보낸 한가로운 시간들이 없었다면 성취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위기가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정약용의 개혁(改革) 이상(理想)과 실천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첫 절에서 “다른 벼슬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牧民)의 벼슬은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목민(牧民)’이란 백성을 돌보는 것이지만, 교회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목회(牧會)를 뜻한다. 따라서 목민관과 목회자는 양떼를 돌보는 것과 같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목사)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감독자와 목자라 하였다. 그러면서 장로(목사)들에게 자기 자신과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하였다. ‘삼가다’는 말은 ‘조심하다,’ ‘정신을 바짝 차리다,’ ‘자신을 살피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약용의 ‘목민의 벼슬을 구하지 말라’는 바울의 ‘자신을 살피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유배지에 묶인 죄수로서 “목민(牧民)할 마음은 있지만,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心書)라 제목을 붙였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청렴, 절용(절약), 근면을 강조하였고, 무당, 귀신붙이, 불교의 미신행위들을 배척하였다. 그는 정선의 글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은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뭇 가난한 자들을 그에게 부탁하려 함이요, 하나님은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뭇 천한 자들을 그에게 부탁하려 함이라”고 하였고, “제 힘으로 먹고 살면서 제 일을 경영하고 제 피땀으로 얻은 것을 받아쓰는 빈천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보살핌이 너그러울 테지만, 벼슬을 갖고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만민의 피땀을 받아쓰는 부귀한 자는 하나님이 그 허물을 엄중이 따질 것이라”고 하였다.
또 정약용은 고아, 홀아비, 과부, 부양가족이 없는 노인, 노처녀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그 방법까지 적고 있고, 실천하였으며, 호적(戶籍)을 바르게 하여 부역과 세금을 균등히 하였다.
정약용은 대학자였지만, 사변에 머물지 않고 실천을 앞세운 실천적인 개혁가였다. 그는 시론(詩論)에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몰락보다도 시대의 몰락을 더 슬퍼하였다. 그러면서 몰락을 막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거의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었다. 그는 토지문제에 있어서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부자의 것을 덜어내어 가난한 사람에게 보태 주어 그 재산을 고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토지는 소수 양반지주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두에게 내린 공물(公物)이라 생각하였다.
정약용은 지배층이 백성들을 엄한 법과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백성들에게 살 곳과 일할 곳을 선택할 권한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전근대적인 신분차별과 지역차별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그는 사대부라는 특수신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양반이나 국가 권력자를 우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전문가를 우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신분과 지역차별을 없애고 재능이 있는 자를 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역차별과 신분차별은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암적 존재라고 믿었다. 정약용은 자기가 개혁하는 정의로운 일들이 불의하고 욕심 많은 관리들로부터 원망과 미움을 산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임지에 부임하면 즉시로 그간에 저질러진 모든 불의하고 불평등한 일들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편하게 해주었다. 백성이 있고 나라가 있지,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신앙(信仰)
1866년 순교하기까지 21년간이나 조선 땅에 숨어 지내며 선교했던 다블뤼는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참고하여 <조선순교사비망기>를 편찬하였는데, 정약용은 비록 배교하였지만, 내적(마음)으로는 신자였으며,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묵상과 단식과 속죄를 위한 고행으로 믿음생활에 전념하였고, 죽기 일 년 전 74세(1835) 때에 중국인 유방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참된 참회자로서 선종하였다고 적고 있다. 정약용의 아들 학연도 처음에는 가문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천주교라며 배척하고 원수로까지 여겼지만, 만년에 회개하고 영세를 받았으며, 정약용의 누이도 노년에 신앙을 갖고 조선인 최초의 신부 중 한 사람인 최양업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선종하였다고 적고 있다.
정약용이 신유년 봄 옥중에 있을 때 하루는 근심하고 걱정하다 잠이 들었는데, 꿈결에 어떤 노인이 꾸짖기를, “소무(蘇武, 중국 한나라의 충신)는 19년도 참고 견디었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괴로움도 참지 못한다는 말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출옥하여 날짜를 따져보니, 꼭 19일 만이었고,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햇수를 따져보니, 1800년 관직에서 물려난 때로부터 꼭 19년만이었다고 한다. 이에 정약용은 인생의 화복(禍福)이 신의 뜻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술회하였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쓴 책들을 받아본 형 약전은 동생 약용이 이룬 저술과 깊은 깨달음이 정약용이 스스로 알지 못했고, 혼자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닌, 하나님(상제)이 내려주신 복이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61세인 회갑년에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자서전 <자찬 묘지명>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회갑의 의미를 죄를 회개하고 수습하여 한 평생을 되돌리고자 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정밀하게 몸을 닦고 실천하여 하나님(하늘)이 준 밝은 명을 살펴서 여생을 끝마치려 하였다.
정약용의 인간론은 근본이 착하며 선악의 선택권이 있다는 성선설과 자유의지설이다. 그는 <심경밀험>(心經密驗, 1815)에서 인간의 마음은 신령하고 밝은(靈明) 하나님(上帝天)이 성령(道心)으로 내재(內在)하는 장소(所在處)이며, 하나님(상제천)의 성령(道心) 곁에 탐욕적인 인심(人心)이 병존하지만, 성령(道心)으로 인심의 잘못을 막고, 성령(道心)을 간직하여 하나님의 명령(天命)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영(神)과 육(形)으로 오묘하게 결합되어 있고, 몸(身)과 자기(己)가 있으며, 인간내면에는 신령이 거하는 곳(處靈)과 지각(知覺)이 있다고 하였다. 비록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는 않지만, 인간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신령하고 밝음(靈明)이 직통(直通)하고 마음을 비춘다(天之靈明 直通人心.... 照臨此室)고 하였다<중용자잠>(中庸自箴).
따라서 다산은 <중용>(中庸)의 머리글(首章)에서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바에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바에 두려워한다.”고 하면서 신독론(愼獨論)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목회자들에게 자기와 양들을 위해서 조심하라한 것처럼, 정약용은 인간관계(對神對人關係)에서뿐 아니라,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심으로 늘 조심하여 삼가야 하며, 성령(道心)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경청할 것을 가르쳤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서도 우리 자신을 늘 점검하고 성찰하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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