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마 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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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마 8:18-22)
본회퍼의 경험
디트리히 본회퍼(1906.2.4~1945.4.9)는 명문가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정신과 의사로서 베를린 대학의 교수였다. 친가는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였고, 외가는 목회자와 신학자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잘 쳐서 음악가로 대성할 것이라 예견되었으나 군에 입대한 형이 제1차 세계대전 때 부상을 입고 죽자, 부모님이 크게 상심하는 것을 본 12살 때 이후로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고, 15살 때 히브리어를 선택과목으로 택하여 공부하였으며, 17세(1923) 때 튀빙겐 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고, 21세(1927) 때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4세(1929) 때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25세 때 루터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본회퍼가 27세 때인 1933년에 히틀러 정권이 들어섰는데, 조직적인 유대인 학살이 이뤄졌고, 독일의 모든 교회들을 제국감독이 지배하는 제국교회로 통합하려는 음모를 꾀하였다. 이 당시 독일교회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면서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보내셨고, 경제 사회적 구원을 위해서는 히틀러를 보냈다면서 히틀러를 우상시하였다. 이때부터 본회퍼는 히틀러정권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독일교회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뿐 아니라, 전쟁에 몰두하는 살벌한 히틀러 정권아래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근거를 둔 평화주의를 외쳤다. 그런 그가 부득불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하였고, 폭탄이 터지지 않아 거사에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서 37세(1943) 때 체포되어 갖은 옥고를 치렀고, 히틀러가 항복을 선언하고 자살하기 15일 전 1945년 4월 9일 새벽에 39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았다. 수감생활에서조차 시종일관 남을 위해서 살았던 그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쓰고, 신앙은 모름지기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또 그대로 실천했던 목사요 신학자였던 그가 어떻게 히틀러 암살계획에 참여할 수 있었느냐면서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정신을 잃은 운전자가 인도를 덮치려고 한다면 나는 기다렸다가 차에 치인 병자를 병원에 데려가고 뒷수습하기보다는 제정신을 잃은 운전자를 차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그 차를 향해 뛰어 들것이다.”
본회퍼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다니며, 세계교회일치운동에 힘썼고, 영국에서 목회까지 했었기 때문에, 원하기만 하면,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얼마든지 도피할 수 있었다. 또 초청을 받고 미국에 갔을 때 유니온신학교 교수로 남아 평안하게 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초청해준 라인홀드 니버 교수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나는 우리 민족사의 힘든 시기를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이 시대의 시련을 나의 민족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후 독일에서 기독교적인 삶을 복구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독일의 패전에 동의하여 기독교 문명을 더 향유할 것인지, 아니면 전쟁에 동의하여 우리의 문명을 파괴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섬뜩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나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안정된 삶을 산다면, 내가 원하는 쪽을 선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값싼 은혜
본회퍼는 암울했던 시기를 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힘썼던 실천적인 인물이었다.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마 8:21)는 결단을 미루는 제자가 아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를 나를 따르라”(마 8:22)는 주님의 말씀에 즉시 결단하는 참 제자로 살려고 힘썼던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산상수훈을 연구하였고, 평화주의를 성찰하였으며, 날마다 성구를 묵상하고,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엄격한 경건실천에 힘썼다. 본회퍼는 예수님 중심의 신학을 하면서 예수님을 본받는 일에 가치를 두었으며, 교회도 그리스도를 본받느냐 마느냐에 따라 평가하였다. 그는 “교회는 늘 참인 원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참인 계명을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늘 참인 것이 오늘 참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늘 오늘의 하나님이시다.”고 하였다.
본회퍼는 교회를 개혁하고 목사의 처우를 쇄신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목회자 후보생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핑켄발데 신학원(1935-37)을 세워 원장을 맡아 가르쳤는데, 개신교가 중독되어버린 값싼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값비싼 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쳤다. 이 무렵 제국교회는 생일을 맞은 히틀러에게 “목회자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바쳤다. 이로써 히틀러에 불복종했던 고백교회 목회자들조차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졌다. 따라서 상당수의 목사들이 안수 때 했던 서원을 저버렸다. 이에 본회퍼는 “무죄한 자들의 피가 하늘을 향해 절규하건만 교회는 외쳐야할 자리에서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폭력과 불법이 자행되는 것을 수수방관하였다.”고 한탄하였다.
본회퍼의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는 1937년에 출간한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담겨 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은혜, 헐값의 용서, 헐값의 위로, 헐값의 성만찬이다. 그것은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몰지각한 손으로 생각 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이다. 그것은 대가나 값을 치르지 않고 받은 은혜다....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세상은 자신의 죄를 감싸줄 값싼 덮개를 값싼 교회에서 얻는다.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을 부정한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 함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함이다.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모든 것이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 까마귀처럼 우리는 싸구려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그 시체의 독을 받아마셨다. 그 결과 예수를 본받는 삶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 은혜에 관한 교리가 비할 데 없이 신격화되어 그 교리가 하나님 자체, 은혜 자체가 되어 버렸다.... 한 민족이 기독교인이 되고 루터교도가 되었지만,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고 가장 싼값을 치러서 된 것이다. 결국 값싼 은혜가 이긴 것이다.... 오늘날 헐값에 얻은 은혜의 필연적인 결과로 제도권 교회가 붕괴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치러야할 대가가 아니겠는가?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본회퍼는 자기 자신과 자기시대를 위해서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는 절박한 물음을 지속해서 물었다. 그가 연구한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존재’였다. 그것이 본회퍼가 던진 필생의 물음,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에 대한 답변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만인가, 아니면 따름의 대상만인가, 또 아니면 믿음의 대상이자 또한 따름의 대상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만의 대상인가, 아니면 순종만의 대상인가, 또 아니면 믿음의 대상이자 또한 순종의 대상인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 하나님이 죽고 안 계신 것 같은 세상,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세상에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주님이 되실 수 있는가?
본회퍼와 동시대의 인물이자 선배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이 서야 할 죽음과 저주의 자리에 대신 설 자로 선택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 범한 인간에게 영생의 축복을 마련하시고, 자기 자신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몫을 당신께서 받는 대신에 당신의 몫을 인간에게 주기로 결정한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가 본받고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 하나님이 죽고 안 계신 것 같은 세상,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세상에서 고통 중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주님이 되게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속적으로 값싼 은혜에 만족하고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신론자인 포이에르바흐는 종교를 인간의 자기분열 현상이라고 말하면서 신들을 만든 것은 인간인데, 오히려 인간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다고 비방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생명이 없는 흙과 나무와 돌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우상에 부여된 신율에 지배를 받는다는 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값싼 은혜의 신학을 우상으로 만들어놓고 그 논리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고 본회퍼는 되묻고 있다.
만일 우리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속적으로 값싼 은혜에 만족하고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신론자였던 칼 마르크스는 종교가 고통당하는 인민의 한숨을 대변하는 것이고, 무정한 세계에 주는 감정이며, 영혼 없는 세계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또한 아편처럼 인민을 중독에 빠지게 하는 독약이라고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값싼 은혜는 아편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안락의 중독에 빠지게 할 독약일 수 있다. 값싼 은혜의 중독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고 본회퍼는 심각하게 되묻고 있다. 그리스도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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