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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시작, 성탄(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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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140 2010.12.17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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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시작, 성탄(마 2:1-12)

희망을 찾아서

작고한 이윤기의 작품, <그리스 로마 신화: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이 2010년 10월 15일 유고(遺稿) 작으로 출판되어 서점에 나왔다. 이 책의 내용은 영웅 ‘이아손’(제이슨)이 콜키스 땅에 있는 금양모피(황금양의 가죽)를 찾는 과정에서 겪는 모험담이다. 콜키스는 일찍이 헬라인으로서는 누구도 가본 적이 없고,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르는 머나먼 땅이었다. 그런데도 이아손은 이곳 미지의 땅으로 가기위해서 아르고 원정대를 꾸려서 험한 바다에 배를 띄웠다.

지중해에 배를 띄운 지 얼마 못되어 이아손의 아르고 원정대를 실은 배는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을 동서로 갈라놓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스탄불의 서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이다. 이 보스포루스 해협은 지중해에서 흑해로 혹은 흑해에서 지중해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신화에 의하면, 보스포루스 해협 입구에 두 개의 바위섬이 있었고, 이곳을 지나는 배는 반드시 이 두 개의 섬 사이를 통과해야 했었다. 그러나 이곳은 통과하는 배들을 십중팔구 싸늘한 역풍과 물보라로 휘감아 산산조각을 내고 마는 악명 높은 해협이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입구 좌우에 자리 잡은 이 두 개의 섬들은 배가 됐든, 새가 됐든, 무엇이었든 간에 그 사이에 들어온 것들을 향해서 양쪽, 즉 동과 서에서 부딪쳐 오는 쉼플레가데스, 일명 충돌하는 바위섬들이었다. 인간들이 그들의 힘과 용기와 지혜로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바닷길로 나가지 못하고 연자 맷돌에 들어간 낱알처럼 뭉개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아손이 영웅인 까닭은 그가 그의 원정대를 이끌고 이 협로를 무사히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이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원정대는 흑해를 지나 금양모피가 있다는 콜키스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충돌하는 바위섬들을 지나 콜키스 땅에 도착한 이아손은 또 다시 세 가지 큰 난관에 부딪쳤지만, 그것들을 모두 극복하고 결국 금양모피를 손에 넣었다. 이 과정에서 이아손은 풍랑도 만났고 암초도 만났다. 높은 산도 넘고 물도 건넜다. 금양모피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했던 과제들에 직면하기도 했었다. 그가 맞닥뜨렸던 이 모든 장애물들은 어쩌면 우리가 겪고 있는 우리가 풀어야할 과제들일는지도 모른다. 우리 앞을 흑해가 가로막고 있고, 충돌하는 바위섬인 쉼플레가데스가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들이 두려워 길을 떠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금양모피는 없다. 험난한 검은 바다 흑해와 역풍과 물보라를 내품는 쉼플레가데스는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쉼플레가데스를 통과해야하고, 우리의 흑해를 건너야 한다. 출발도 하지 않고, 모험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금양모피라는 희망을 손에 넣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넘어야할 산과 바다는 험악할 수 있고, 우리가 건너야할 강은 거센 물살일 수 있다.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을 좇아 길을 떠났던 동방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별을 보고 원정대를 꾸려 먼 길을 떠났던 그들은 사막의 모래바람에 맞서야 했고, 강도들의 위협과 맞서야 했으며, 임시 텐트에서 추운 밤을 보내야 했고, 수주나 걸리는 머나 먼 이국땅을 향하는 길을 낙타 등에 의지해야 했다. 그 결과 그들은 별이 가리킨 갓 태어난 희망, 곧 인류의 희망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희망의 나라로

예수님 탄생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다. 인간 세상을 희망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들 가운데 한 가지가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순례이다. 그들은 유난히 빛나는 별의 출현을 보고 원정대를 꾸려서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 무작정 그 별이 이끄는 대로 모험을 나섰다. 그들의 긴 여행은 희망을 찾아 나선 순례였다. 이들 동방박사들은 아마도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빌론에 전쟁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이들 동방박사들은 바빌론보다 더 먼 페르시아 쪽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전 539년 바빌론제국이 페르시아제국에 귀속된 이후 다수의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에 살고 있었다.

이들 디아스포라 유대인 박사들이 찾아 나선 희망은 그들이 살아온 세월보다 훨씬 오래된, 그들의 집단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려진 조상대대로 품어온 희망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에 시작된 희망이었다. 그들은 목축을 생업으로 하는 떠돌이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목축보다는 희망을 키우는 떠돌이 민족이었을 것이다. 목축은 그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희망의 내용은 아니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떠돌이의 삶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희망을 찾아 떠나는데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가나안 땅이었다. 그 가나안 땅을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 생각해왔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고, 그 가나안 땅을 불가시적이고 내세적인 것으로 생각해왔던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희망이 처음 성취된 것은 모세 때였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희망의 나라 가나안에 이르기 위해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사막을 지나 요단강을 건넜다. 이아손의 아르고 원정대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은 바다와 강을 건너기 위해서 배를 띄우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라진 바다와 갈라진 강을 육지를 걷듯이 건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바다 못지않게 거칠고 험난한 광야사막이란 가시밭길이 있었다. 그리고 먼 훗날 그들은 그들의 희망을 바빌론제국에 빼앗겼고, 그리고 다시 580여년 만에 유난히 빛나는 별의 출현을 보고 페르시아의 유대인 박사들이 원정대를 꾸려서, 이아손의 아르고 원정대처럼, 희망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현제명의 작사 작곡 가운데 “희망의 나라로”가 있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산천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찬 곳, 희망의 나라로. 밤은 지나가고 환한 새벽 온다. 종을 크게 울려라. 멀리 보이나니, 푸른 들이로다.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찬 곳, 희망의 나라로. 희망의 나라로.

이 노래는 희망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험한 바다 물결에 배를 띄어야 하고, 돛을 달고 부는 바람 맞아 캄캄한 밤도 지나야 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도 금양모피를 찾아 떠난 이아손처럼, 또는 별빛을 따라 희망을 찾아 나섰던 동방의 박사들처럼 뭔가 모를 목마름을 호소하면서 희망을 찾아 거친 바다 험한 산과 힘겨운 싸움을 해왔는지 모른다. 그 희망이 예수님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희망의 시작, 성탄

예수님 탄생의 의미는 인간 세상을 희망의 나라로 만드는데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은 희망의 시작을 의미한다. 별을 관측하던 페르시아 유대인 박사들이 유난히 빛나는 특별한 별을 처음 보았을 때, 그들의 마음이 흥분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희망의 증거, 곧 메시아의 출현을 상징하는 징조였기 때문이다. 동방박사들은 늘 별을 관측하며 메시아가 출현할 때를 찾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물질과 시간을 투자하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별을 좇아 길을 나섰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그들은 갓 태어난 아기를 보았다. 그들이 본 것은 희망이었고, 희망의 시작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희망의 시작에 있다. 우리가 이 성탄절에 똑바로 봐야할 것도 희망이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모셔진다면, 그것은 곧 희망의 시작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모셔진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희망의 등불이 밝혀졌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마 4:16). 니고데모가 변했고, 수가성 여인이 변했으며,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다. 크리스마스는 이처럼 우리에게 희망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어둠이 빛이 되고, 혼돈이 질서가 되며, 죽음이 생명이 되어야 한다. 슬픔이 기쁨이 되고, 절망이 희망이 되어야 한다. 미움이 용서가 되고, 불열이 일치가 되며, 싸움이 평화가 되어야 한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출현이 희망의 시작임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나이 일흔 다섯에 가나안 땅을 희망한 이후 그 첫 번째 희망을 가시적으로 성공시킨 인물이 모세였고, 절정에 도달했던 다윗왕국이 멸망당하고 가나안 땅을 빼앗긴 이후 예언자들이 가나안 땅의 회복을 희망한 이후 그 두 번째 희망을 가시적으로 성공시킬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따라서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복음이란 기쁜 소식을 말한다. 왜 기쁜 소식인가? 그것이 다윗왕국이 멸망당하고 가나안 땅을 빼앗긴 이후 예수님의 공생애 출범 때까지 612년간이나 오래 묵은 두 번째 희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탄생 시점은 다윗왕국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가나안 땅의 희망이 처참하게 짓밟힌 지 무려 580여년 만이었다. 모세가 이집트에 등장한 시기처럼 예수님의 등장시기역시 흑암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모세 때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의 노예였던 것처럼, 예수님 때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압제를 받고 있었다. 이 압제는 바벨론제국, 페르시아제국, 헬라제국, 로마제국에로 6백년이 넘도록 대물림되어 온 것이었다. 실로 그들은 흑암에 앉은 백성이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었다. 또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자들이었다. 특히나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시기는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붕괴되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당하던 시기였고, 동시에 로마에서는 극심한 기독교 박해가 네로에 의해서 저질러지던 시기였다. 이뿐 아니라, 당시의 세계는 끊임없는 전쟁과 혼란과 가난과 전쟁노예들로 인해서 가정이 붕괴되고 도덕과 윤리와 기강이 무너진 시기였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알리고 있고, 새로운 희망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성탄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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