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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적인 신앙인(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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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084 2011.01.14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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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적인 신앙인(빌 2:5-11)

영웅의 조건

우리가 비록 헤라클레스나 이아손, 테세우스와 같은 영웅은 못되어도 험한 인생길을 헤쳐 나가는 모험을 즐긴다면 우리도 분명 영웅이다. 신화에서 신의 아들들로 태어난 자들이 모두 영웅인 것처럼,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우리는 영웅이 되어야 한다.

손에 창과 방패를 들고 있어도 전쟁터에 나가 싸우지 않는 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항구에 머물며 바다로 나가지 않는 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거친 파도와 폭풍과 싸우지 않는 이는 영웅이 될 수 없다. 가시밭길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이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높은 산 험한 길을 오르지 않는 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고난의 용광로에 들어가 달궈지고 녹아지고 제련되어 나오지 않으면 영웅(정금)이 아니다. 미궁에 빠져보지 않은 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불은 쇠를 시험하고 고통은 인간을 시험한다'는 말이 있다. 이 고통을 이기는 ‘호모 비아토르(떠도는 인간)’가 영웅이 된다. 그래서] 영웅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가 싸운다. 영웅은 거친 바다에 배를 띄우고 돛을 올린다. 영웅은 높고 험한 가시밭길 산을 오른다. 영웅은 미궁에도 빠지고 하늘도 날고 지옥에도 간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모한 짓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에게도 안전장치는 항상 있다. 어떻게 보면 바로 그 안전장치가 영웅을 낳게 하는 이유가 된다. 헤라클레스에게는 방망이가 있었고, 포세이돈에게는 삼지창, 아폴론에게는 백발백중하는 활이 그리고 아킬레우스에게는 방패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가진 무기 즉 타고난 재능이 그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천하의 영웅호걸이라도 아무런 도움 없이 맞닥뜨린 난관을 헤쳐 간 것은 아니다. 헤라클레스에게는 지혜의 신 아테나의 도움이 있었고, 테세우스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었으며, 벨레로폰에게는 아테나 신의 황금고삐가 있었고, 이아손에게는 헤라 신의 도움과 메데이아의 마법이 있었다.

이들 영웅들이 괴물들을 물리친 것은 자신의 재능이나 손에 쥔 막강한 무기 때문이 아니었다. 헤라클레스가 네메아의 사자, 레르네의 물뱀 히드라, 에리만토스 산의 멧돼지 같은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물리친 것은 활과 창과 방망이 때문이 아니다. 그의 승리의 배경에는 항상 지혜의 신 아테나가 있었다. 영웅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실타래를 입구 기둥에 붙들어 매고 철저하게 그 실에 의존했기 때문에 괴물을 물리치고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벨레로폰이 천마(天馬)인 페가수스를 잡아타고 괴물 키마이라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지혜의 신 아테나가 황금고삐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아손이 황금모피를 손에 넣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헤라 신과 메데이아의 마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잘나서 성공한 영웅은 없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다. 영웅이 과업을 완수하는데 절대적인 것은 신의 도움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영웅은 자신의 성공의 실체가 도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어리석은 영웅은 자신의 성공의 실체가 자신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오만에 빠진다. 그러나 오만은 영웅을 쓰러뜨리는 아킬레우스 건(腱)이다. 영웅은 남에게 패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내부의 적인 오만 즉 자기우상 때문에 고목처럼 무너진다.

영웅의 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7)을 쓴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John Campbell)은 영웅은 초인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혹은 바울처럼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말하였다. 그는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의 특징이 1)모험을 떠난다는 점, 2)모험 중에 큰 난관에 직면한다는 점, 3)난관을 극복하고 승리한다는 점, 그리고 4)이웃을 이롭게 할 수 있는 힘을 얻어서 돌아온다는 점이라고 말하였다. [이 네 번째가 영웅의 진위(眞僞), 즉 구세주냐, 폭군이냐를 결정짓는다. 이런 점에서 유대교의 모세와 기독교의 예수님이 진정한 영웅이다. 모세는 돌아온 영웅이고, 예수님은 돌아오실 영웅이시다.]

조셉 캠벨에 따르면, 영웅은 평온한 일상에 안주하지 않고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를 미지의 세계로 과감히 뛰어든다. 영웅은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상상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겪지만 불굴의 용기와 의지로 극복한다. 그리고 영웅은 과거보다는 훨씬 새롭고 좋은 그 무엇인가를 사회에로 가져온다.

영웅은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혹은 바울처럼 신의 부름(소명)을 받고 ‘호모 비아토르’ 즉 모험의 길을 떠나는 사람이다. 따라서 모험 즉 길 떠나는 것을 거부하면 영웅이 될 수 없다. 이때 영웅이 모험에 뛰어드는 것을 기존세계에서 벗어나 신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누구나 쉽게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문을 지키고 있는 자가 영웅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그가 제출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 오이디푸스도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풀고 나서야 인생행로를 계속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관문 앞에서 마귀로부터 세 가지 시험을 받고 통과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문에 들어서면 영웅은 자신의 한계를 처절하게 깨닫고 성찰하게 된다. 이것을 영웅의 각성이라고 하는데, 이 자기부족에의 각성이 영웅의 길을 가는 첫걸음이 된다. 소명을 받고 모험을 떠나 얻게 되는 깨달음은 번데기에서 벗어나 나비가 되는 과정이다. 나비가 되면 이상을 찾아서 훨훨 날아가 이상을 얻기까지 싸운다. 이때의 싸움은 매우 고독한 투쟁이다. 그래서 영웅은 고독하다. 기존의 틀도 버려야 되고, 기존의 행동습관도 버려야 한다. 나비가 자기를 감싸고 있던 껍질을 벗어버리듯이 자기를 보호했던 기존 세계와 단절해야 한다. 그러므로 고독한 것이다. 그리고 영웅은 성공을 거둔 후에 다시 돌아온다. 돌아오는 과정은 영웅에게 또 다른 시련이지만, 그의 귀환은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 된다.

영웅이 되고 못되는 차이는 결단에 달려 있다. 익숙한 기존의 삶의 방식에 안주하여 안락함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항구를 떠나 험한 바다로 모험을 떠나 환희와 자기 성장을 맛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는 없다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결단을 내린다면, 또 모험에서 자기 변화에 성공한다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영웅이 천개의 얼굴을 갖는 이유가 된다.

영웅 중에는 예수님처럼 순교자가 되어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 영웅이 있는가 하면, 폭군으로 변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치거나 정점에서 파멸하는 영웅도 있다. 조셉 캠벨은 “어제의 영웅이 오늘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지 못하면 내일은 폭군이 된다.”고 하였다. 오만이란 자기우상에 빠지기 때문이다. 오만에 빠진 자치고 패가망신하지 아니한 자가 없다.

영웅의 천적

대천사장 루시퍼와 인간에게 재앙이 되었던 ‘원죄,’ 곧 근원적인 죄, 원초적인 죄가 ‘오만’(Hybris)이었고, 오만은 인간을 패가망신시키는 병이다. 진위여부를 떠나서 대천사장 루시퍼가 교만에 빠져서 마귀가 되었다는 설은 굉장한 의미를 그 속에 담고 있다. 교만에 빠지면 가장 아름다웠던 것이 가장 추악한 것이 될 수 있고, 교만에 빠지면 가장 선했던 것이 가장 악한 것이 될 수 있고, 교만에 빠지면 가장 건설적이었던 것이 가장 파괴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지 말고, 우상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반드시 잡신만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생명도 없고, 숨도 쉬지 않는 돌부처와 같은 우상들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이다(잠 16:5). 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남을 무시하고, 남의 허물을 들춰내고, 용서할 줄 모르는 데 있다. 마치 자기가 완벽한 신이나 되는 것처럼, 남을 심판하고 지배하려는 자기숭배가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신이 아니라 죄 많고 허물 많은 죽을 운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칠 필요가 있었다.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을 해서가 아니라, 교만이 스스로에게 화를 불러들인다는 뜻이다. 자기우상 숭배자에게 응보가 따른다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자기우상숭배이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헤라클레스는 자신에게 부과된 12과업을 완수한 영웅들 중에 영웅이었지만, 신 앞에서 끝까지 겸손하였기 때문에 신들로부터 대대적인 영접을 받고 보상도 받지만, 벨레로폰이란 용사는 처음 신앙심 깊은 행동으로 큰 복을 받지만, 큰 복을 담을만한 그릇이 못되었던지, 오만이란 병이 도졌고, 신성을 참칭하려다가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벨레로폰은 인간을 괴롭히는 ‘키마이라’라는 괴물을 물리친 용사였다. 그가 이 괴물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그에게 페가수스라는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를 부릴 수 있는 황금고삐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황금고삐는 벨레로폰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재능이 때로는 큰 업적을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잘난 척의 문제점, 곧 오만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오만’(Hybris)이란 이름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조금씩은 앓고 있다. 문제는 그 병을 다스리지 못하는데 있다. 벨레로폰도 마음에 도진 이 고질병을 다스리지 못하였다.

오만이란 자기우상화는 업보가 따르게 되어 있다. 벨레로폰은 괴물을 물리치고 나서 페가수스를 타고 신들의 궁전을 향해서 오르고 또 올랐다. 제우스가 하늘궁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벨레로폰이 하는 짓이 우습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그래서 벼락을 던져 태워버릴까 하다가 생각을 바꿔서 말의 몸에 강력한 등에 한 마리를 만들어 페가수스의 꼬리 밑에 붙어서 피를 빨게 하였다. 그러자 페가수스는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을 쳤고, 그 바람에 벨레로폰이 천마의 등에서 튕겨 나와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날개 달린 페가수스가 몸을 날려 벨레로폰을 받아 줄만도 했지만, 신의 노여움을 산 자에게 자비를 베풀 수가 없었다. 재능의 날개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요 축복일 수 있지만, 자기우상에 빠진 자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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