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가치기준(미 6: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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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가치기준(미 6:6-16)
영혼의 무게
현대인들은 집안에 체중계를 놓고 거의 매일 체중을 달아본다. 체중을 관리하여 적정한 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건강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중이 불어나는 것을 걱정한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관련된 책들이 많이 팔린다. 우리가 매일 빠뜨리지 않고 재고 있는 이 체중은 그러나 죽으면 흙 속에서 썩고 말 육신의 무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원히 썩지 않고 살아남게 될 영혼의 무게에 대해서는 정작 소홀히 한다. 우리가 썩어 없어질 육신의 무게를 재는 것은 너무 많이 먹어서 영양과다로 체중이 오르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우리가 너무 먹지 않아서 체중이 한참 미달되고 영양실조에 걸려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영적 건강상태를 걱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데 문제가 심각하다.
<천칭저울을 손에 든 여인>이란 제목의 명화가 있다. 이것은 1662-63년에 네덜란드인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가 그린 유화이다. 이 그림을 보면, 부드러운 빛이 왼쪽 창을 통해 여인의 얼굴과 앞면을 비추는데 그 얼굴이 경건하고 자애롭다. 탁자 위에는 보석함이 열려있고, 보석류들이 흐트러져 있다. 여인의 손에는 작은 천칭저울이 들려 있는데, 마치 보석의 무게를 달아보려는 듯이 저울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여인의 배는 만삭이 된 듯이 불러 있고, 여인의 오른쪽 벽에는 최후의 심판을 그린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다. 최후의 심판을 그린 이 그림은 미켈란젤로나 아드리엔 콜레르트가 그린 <최후의 심판>과 동일하게 상중하 삼면, 즉 천국과 지상과 지옥으로 나뉘어져 있고, 중앙에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왜 베르메르는 천칭저울을 손에 든 여인 옆에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그림을 삽입하였을까? 가톨릭에서는 미카엘 천사장이 최후의 심판의 날뿐 아니라, 매일 발생하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천국으로 보낼지, 혹은 지옥으로 보낼지를 저울에 달아 결정한다고 믿고 있다. 베르메르의 <천칭저울을 손에 든 여인>에서 여인의 저울이 바로 미카엘 천사장의 저울과 같은 것은 그녀의 저울에 아무것도 올려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것은 미카엘은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뭇 영혼들을 저울에 달아보지만, 이제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이 저울에 달아봐야할 차례란 것이다. 그녀의 저울이 비어있는 것은 그녀가 지금 자신의 영혼을 달아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 탁자 위에 널려 있는 보석들은 영혼의 무게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질없는 것들이므로 저울에 오르지 않는다. 저울에 올라 무게를 내는 것은 경건한 생활로 살찌운 영혼이다. 그리고 그 몸에는 이미 생명이 잉태되고 있다. 영원한 새 생명을 위해서 지금 이 여인이 제일 시급하게 해야 될 일은 자신의 영혼을 저울에 달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속세의 물욕에만 눈을 돌리지 말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에 오르게 될 날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체중감량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저 하늘에서의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체중을 늘리는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도덕적 가치
도덕적 가치란 도덕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한 것. 즉 정직, 용기, 선, 의, 덕과 같은 것들을 말한다. 우리 국민은 정의(옳음), 선(좋음), 정직, 미덕과 같은 것들에 과연 얼마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까? 지난 대선 때 우리 국민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표를 던져 대통령으로 뽑은 가치기준은 무엇이었는가? 경제였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사람에게 표를 던졌던 것이다. 우리 국민은 그 어떤 다른 것보다 돈과 재물 즉 부유하게 사는 것에 더 가치를 둔다. 우리 기독교인들조차 돈과 재물 즉 부유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비해서 미국 국민들은 지난 2004년 대선 때 다른 어떤 현안보다도 도덕적 가치에 기준을 두고 투표권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테러리즘이나 이라크 전쟁, 경제 등과 같은 주요 현안을 제치고 도덕적 가치가 표심을 좌우했다고 한다. 조지 W. 부시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의 80퍼센트가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국민과 미국 국민의 의식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근자에 한국의 대형교회들에서 여러 가지 불미스런 사건들이 여러 건 있었다. 폭행사건, 고소고발사건, 헌금 유용사건, 성추행사건 등 많은 사건들이 사회에 노출되고 있어서 기독교가 존경의 대상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모두가 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가치의 붕괴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도덕적 가치를 재고해야할 때이다.
미국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Public Philosophy)를 보면, 미국 국민은 개인의 자유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동시에 공정성과 공공선이란 도덕적 가치 즉 공정한 사회와 공동체의식을 중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도덕이나 정의와 관련된 이야기는 애써 피하고 정책과 정부 프로그램에만 매달렸던 민주당이 대선에 번번이 패배했다고 분석한다. 그나마 민주당에서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정직과 도덕성을 회복시키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고,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정치의 종교적 정신적 중요성에 대한 예리하고도 본능적인 포용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도덕적 가치 또는 사람의 가치가 정보화지식산업사회의 새로운 경쟁력이자 최후의 경쟁력이라고 하였다. 판매망의 예를 들면서 “단순히 친절하고 가격이 우월하다는 것으로 판매망이 유지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자기 양심을 파는 것이다. 물건을 주고받고 대가를 지불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사실은 그 인간의 양심을 사는 것이다. 양심을 판다는 의미는 이제 양심적이지 않으면 물건도 팔 수 없다는 그런 의미이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물건을 얹어서 파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관계가 곧바로 판매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용교환과 생활연관의 시스템, 그것이 미래적 마케팅 시스템일 것이며 커뮤니케이션 마케팅은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 커뮤니케이션 마케팅의 궁극적 지점은, soul marketing-영혼마케팅으로 전이 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미래사회 특히 선진사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도덕성이 얼마나 고가의 가치를 지니는가를 우리 모두가 인식할 때이다.
기독교적 가치기준
세상이 아무리 선진화되고,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게 된다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적 가치 또는 기독교적 가치와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분별하지 못하면 세속적 가치에 휘말리게 된다. 민주사회일수록 정부는 충돌하는 가치에 대해 중립원칙을 지키게 되고, 상반된 의견을 가진 진보보수 좌파우파 사이에는 가치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세속주의자들은 생명을 인간이 만든 창조물로 여기면서 인간의 의도에 따라 자율적으로 삶을 살거나 죽음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그 생명을 가진 개인의 소유물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낙태나 자살이 개인의 선택사항 즉 개인의 권리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은 의무감을 갖고 그 생명을 기키는 청지기라고 믿는다. 또 인간은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될 신성한 선물이므로 함부로 낙태를 하거나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지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속주의자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사생활보호권, 자율권, 자기결정권 등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런 요구 속에는 동성혼과 안락사도 포함된다.
현대사회에서 도덕적 가치나 윤리의식은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기술 의술 등 모든 분야가 도덕적 가치의 기반에서 출발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우리나라도 제반 분야에 윤리위원회를 설치하고 활동하게 하고 있다. 이럴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해야할 것은 도덕적 가치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준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치수를 속인 잣대나 용량을 속인 됫박과 같아서 한번 기준치수가 잘못되면 언제나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그럴싸한 논리로 옳음과 좋음을 말하고 윤리와 도덕을 말한다할지라도 바른 기준을 갖지 못하면 기만하고 기만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경적 가치기준 또는 기독교적 가치기준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부가 평등하게 다시 분배된다할지라도 거래가 시작되는 동시에 평등은 끝난다는 말이 있다. 운 좋게 혹은 환경적인 영향에 의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거래를 잘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만큼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능력과 욕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완전한 평등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철학자 왈저는 복지는 궁핍한 사람에게, 명예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정치적인 힘은 도덕성을 가진 사람에게, 직책은 적임자에게, 사치품은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신의 은총은 독실한 신자에게 돌아가야 공정한 분배라고 주장하였다. 정치철학자 롤스는 타고났거나 물려받은 재능은 운이 좋았을 뿐이지 자신의 공이 될 수 없으므로, 개인의 노력부분은 인정한다할지라도, 운동선수, 기업가, 주식중개인, 학자, 전문가 등에게 부여하는 포상과 명예를 우수한 미덕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전관예우를 받아 월 1억 원의 월급을 받았던 사람이 감사원장에 임명되거나 대기업의 회장직과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을 그의 자녀가 낙하산승계하는 것이 부도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옳고 좋음의 판단기준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비록 해석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언제나 성경에 둬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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