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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6]복음의 주제(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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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883 2011.04.1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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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6]복음의 주제(롬 1:17)

바울의 하나님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는 처음부터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절대자 신(神)이시고,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시고,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죄인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실수나 오류가 없으므로 거룩하시지만, 인간은 오류나 실수가 많으므로 죄를 짓게 된다. 의(義)란 ‘거룩’이란 뜻이다. 만일 하나님의 거룩하심 또는 의로우심이 우리 인간에게 동일한 수준의 거룩함 또는 의로움을 요구한다면, 인간은 아무도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요구 수준이 100점이라 할 때, 사람마다 능력이나 성품 등의 차이가 있으므로 학교에서 시험을 치렀을 때와 마찬가지로 점수의 차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이 시험은 학교에서 치르는 학업테스트와는 달리 아무도 100점을 맞을 수가 없다. 시험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이다. 100점은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인데, 인간은 피조물이어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할지라도, 신(神)일 수는 없다. 완전한 신(神)만이 도달할 수 있는 점수이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은 그 점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613개의 율법(계명)뿐만 아니라, 개개의 율법에 따른 많은 울타리(게자이라) 법들까지 만들어 지키기를 강요하고 또 눈물겹도록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바울의 깨달음은 이렇다. 맞추지도 못할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놓고 못 맞히면 벌주겠다는 그리스-로마 신화식의 율법 지키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 않냐는 것이다. 신(神)만이 도달할 수 있는 100점을 그 어떤 노력 그 어떤 경우에도 도달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요구하고 있다고 유대인들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멍에를 무겁고 괴롭게 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 멍에를 가볍고 쉽게 하는 분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멍에를 가볍고 쉽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총을 일컬어 바울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의(거룩)’라고 표현하였다. 대다수 인간들은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엄격하시고 철저하실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100점 만점을 요구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그 반대일 수 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인간에게 전혀 돈도 들지 않고, 전혀 힘도 들지 않는, 오직 믿음의 방법으로 공평과 사랑으로 대하실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거룩)는 곧 하나님의 은총이요 사랑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거룩)의 역설이라고 주장하였다.

바울의 이 깨달음에 기초한 것이 기독교이다. 우리는 지금 이 위대한 바울의 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게다가 바울은 이 하나님의 의(거룩)가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온 인류에게 만백성에게 공평하고 차별 없이 적용된다고 믿었다. 일찍이 유대인들이 깨달았던 유일신 야훼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된다는 위대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기독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거룩)는 보복정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과 공평하심을 뜻한다.

하나님의 의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을 직역하면 기쁨의 소식에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났다는 뜻이다. 여기서 복음은 구원의 소식 혹은 해방의 소식을 말하는데, 구원의 소식 혹은 해방의 소식에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났다고 하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아서 혼란을 겪기도 한다.

원래 의(義)란 옳음 혹은 거룩을 뜻한다. 정의란 말과도 일치한다. 정의란 보복의 뜻이 있어서 행한 대로 그 대가를 받게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 보복정의를 사람들에게 적용하시게 되면, 로마서 6장 23상반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의 말씀대로, 죄의 대가는 죽음이 된다. 그래서 16세기경에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의’란 말에 대해서 공포감을 크게 느꼈고, 하나님을 무섭고 냉정한 정의의 심판자로 여겼다. 그러나 성경연구를 거듭한 끝에 ‘하나님의 의’란 뜻이 로마서 6장 23하반절,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다.”는 말씀대로 죄인을 의롭게 하신다는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죄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정의가 아니라, 죄인에게 생명과 구원을, 죄의 노예에게 해방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는 것을 깨닫고,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복음의 주제란 것을 알았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義)란 그들이 지키던 613개의 계명을 모두 지켰을 때의 결과를 말한다(롬 8:4; 10:4). 613개의 율법을 모두 완벽하게 지켰을 때의 상태를 일컬어 ‘의인(義人)’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실수나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아무도 완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인이 될 수가 없고, 필연적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로마서 1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의”라고 썼을 때, 이 하나님의 의는 613개의 계명을 모두 지킨 것과 관련되지 않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사이의 관계회복에 관련된 말이다. 이 관계회복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되기 때문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 믿음으로 되는 의(義)를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부른다. 613개의 계명을 모두 지켰기 때문에 의인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값없이 받기 때문에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엡 2:8) 받는다고 말한다. 온라인으로 돈을 계좌 이체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의로움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이체시켜주시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의 의의 전가(?嫁)라 부른다.

그 대신, 비록 하나님의 계명대로 철저하게 살지는 못하지만, 정욕(情慾)과 육욕(肉慾)을 죽이는 생활, 이웃사랑, 경건생활 등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화(聖化)라 부른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하나님의 의(義)의 전가(轉嫁)인 칭의(稱義)에 대한 보답 또는 감사의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 성화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될 수 없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때 육체는 쇠하여지지만, 영은 날마다 새로워진다.

인간의 의

로마서의 특징은 인간의 죄를 부각시킨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부각시킨 데 있다. 따라서 로마서는 인간의 죄와 구원을 대조시키거나 인간의 불의(不義)와 하나님의 의(義)를 대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서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받는 구원’과 ‘행위를 통해 율법의 완성으로 얻으려는 구원’을 대조시키고 있고, ‘하나님의 의로 받는 구원’과 ‘인간의 의로 받는 구원’을 대조시키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의란 유대인들이 613개의 계명들을 모두 지켜 하나님 앞에 의인(義人)으로 인정받으려 했던 것처럼, 거룩한 삶의 결과를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이 피조물이고, 실수와 오류를 피할 수 없으므로, 아무도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고, 따라서 아무도 의인이 될 수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의란 무용지물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일까?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설명을 로마서에서 하고 있다. 피조물이어서 오류와 실수를 피할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이, 만일에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써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운 은총과 사랑으로써 받는 것이며, 또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속성은 오히려 우리 인간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므로,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써 받는 것이며, 우리가 잘나서 또는 거룩하기 때문에 보상(報償)으로 혹은 대가(代價)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우리에게 전가(轉嫁)시켜 주시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인류의 죗값을 이미 지불하셨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공덕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의(義)는 “믿음으로 하나님한테서 난 의”(빌 3:9), 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된 의(고후 5:21)일뿐이다. “믿음으로 하나님한테서 난 의” 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된 의와 같은 표현은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잘 믿어서, 우리가 거룩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義) 곧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받는 것이며(롬 1:17; 3:21; 10:3),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고, 또 우리가 그 사실을 믿음으로 된 의(義)를 뜻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의로움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받는 것이며,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우리의 의로움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로마서의 메시지는 우리가 형벌을 받았다, 우리가 지옥에 간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써 받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義)는 그리스도를 인류의 속죄를 위해 대속제물로 삼으신 데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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