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강10]내버려두심(롬 1: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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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10]내버려두심(롬 1:24-32)
하나님의 내버려두심
로마서 1장 24절, 26절, 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또는 부끄러운 욕심에 또는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어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적고 있다. '내버려두셨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온다.
이 말은 하나님의 허락의지를 보여준다. 허락의지란 인간이 결정한 일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 하나님의 허락의지가 갖는 의미는 두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의 허락의지에 표현된 내버려두심의 의미는 보복정의이다. 인간이 결정하고 행동한 결과에 상당하는 보응을 말한다. 인간이 완전하게 살 수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인간은 피조물이어서 오류와 실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탕자처럼 자신을 제어할 방법인 신앙에서 떠나면 인간은 자신의 정욕과 욕심에 끌려 불의하고 추악한 일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 당연한 귀결에 대한 정당한 보응이 멸망이다.
둘째, 하나님의 허락의지에 나타난 내버려두심의 또 다른 의미는 칼뱅이 말한 ‘유기(遺棄)’가 아니라,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기다림’이다. 아버지는 탕자가 재산상속을 받아 독립하고자 했을 때, 이를 허락하였고, 집을 떠난 탕자가 방탕한 생활의 결과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는 동안 아버지는 집나간 탕자를 걱정하며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참고 기다렸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목적이 인간타락에 대한 심판과 보응에 있기보다는 하나님의 간절한 기다림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만일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목적이 타락한 인간들에게 상당한 보응을 받게 하는 것뿐이라면, 굳이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목적이 칼뱅이 말한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본능이 요구하는 욕구로부터 오류와 실수를 피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의 오류와 실수에 일일이 보응하시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어지므로 이를 특정시간 즉 하나님이 정(定)한 시간까지 참으셨다가 심판하시게 된다. 책정한 시간까지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본능이 요구하는 것들을 허락하신다. 이 허락의 시간이 하나님으로서는 인간들의 통회를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이요, 기다림의 시간이다. 분노와 격분의 시간이 아니라, 집나간 탕자의 아버지처럼 연민과 애정의 시간이다. 노아시대의 홍수심판과 아브라함시대의 유황불 심판은 모든 기다림이 다 끝난 후에 하나님이 결정한 시간에 이뤄진 사건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탕자가 경험했듯이 고통의 시간이요, 시련의 시간이며, 회개의 시간이다.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갔듯이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다. 이 기회의 시간을 놓치게 되면 홍수심판과 유황불 심판 때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죄지을 성질
인간은 근본이 선한가, 악한가? 왜 인간은 타락하는가? 왜 인간은 죄인이 되는가? 죄를 갖고 태어나기 때문인가? 죄를 지을 성질을 타고나기 때문인가? 이런 물음들에 대한 해답은 인간이 피조물이란 점에 있다. 피조물은 만들어진 것이고, 만들어진 것은 완전하지 않다.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부족하다는 뜻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오류와 실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하여 만물을 만드실 때, 그 만드신 것들이 모두 보시기에 좋았다고 친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근본이 선하다는 뜻이다. 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게 되면, 세상만물은 근본이 선하고 악하지 않다. 그러면 인간을 비롯하여 세상은 왜 타락하였는가?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피조물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잘못 만들었거나 그 만드신 것이 미완성이어서가 아니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것은 신(神)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처럼 완전할 수 없고,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거룩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이 아니기 때문에 타락할 수밖에 없고,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죄를 갖고 태어나지는 않지만, 죄를 지을 성질을 갖고 태어난다. 그 죄를 지을 성질은 모든 피조물의 특성이다. 특히 인간이나 천사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태어난 영성(靈性)을 가진 존재일수록 더욱 그렇다. 아담과 이브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 어떤 형태의 죄를 갖지 않았다. 그들이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과 약속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선악과나무는 전혀 선이나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아니란 점이다. 수많은 열매 맺는 나무들 가운데 한 나무였을 뿐이며, 동산 중앙에 있어서 하나님과 아담이 계약의 증거로 삼기에 아주 적합했을 뿐이다. 그 나무의 열매는 먹음직했고, 보암직했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런 것이었다. 인간의 본능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훌륭한 나무였다. 그 나무에는 아무런 마력도 숨어있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나무에 불과했다.
둘째, 아담과 이브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되어 하나님과의 계약을 잊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그들이 악하거나 타락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냥 불완전한 인간들이었을 뿐이다. 그들이 그 열매를 먹은 것이 문제가 되어 죄인된 것은 하나님께 먹지 않기로 약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기로 한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을 어겼으므로 죄인이 된 것이다. 법이 없었으면, 죄도 없었을 테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관계든 하나님과의 관계든 관계유지를 위해서 합의에 의한 계약법이 불가피하다.
그러면 왜 인간은 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가? 죄를 지을 성질을 타고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지을 성질을 갖고 난다. 그것이 육체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신(神)일뿐 아니라, 육체가 없으시지만, 모든 피조세계는 육체(형체)를 갖고 태어난다. 이 육체는 유한하며, 생존욕구에 필요한 본능(本能)을 갖는다. 이 본능은 필연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이 본능이 선택의 기로, 즉 옳고 그름 앞에서 죄를 짓게 하는 성질이다.
본능(本能)
죄 지을 성질을 가진 본능은 그러면 악한가? 그렇지 않다. 본능은 모든 동식물이 갖는 일종의 유전적 생존능력이자 하나님의 선물이다. 동물이 본능에 충실했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경우는 없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경우는 계약법을 만들 수 있는 인간들에게 국한된다. 동물이 본능에 충실해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법이 있고, 법에 직면하여 본능을 통제할 이성(理性)이 있다. 이 이성이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이다. 인간에게는 동물의 것보다 특출한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사회성이 별도로 더 있다. 그러나 이 이성이란 것도 피조물의 범주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다. 그리고 매번 본능을 완전히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를 피할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은 정한 심판의 때까지 인간의 범죄를 내버려두신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 된다. 인간은 1-2세 무렵부터 자의식을 갖는다고 한다. 자의식을 갖는 순간부터 인간은 옳고 그름을 부모로부터 배우며 자란다. 부모의 말을 어겼을 때 아이들은 죄의식을 갖게 되고, 책망을 듣거나 매 맞는 것을 두려워한다.
신학적으로 갓난아이가 유죄인지 무죄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자의식조차 없는 갓난아이에게 죄의식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죄 지을 성질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이미 죄인의 범주에 속할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즉 모든 인간이 본능을 지닌 육체를 갖고 태어난다는 점에서 조상들의 죄를 타고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피조물은 불완전하고 부족하며, 이 불완전하고 부족함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1-2년간의 시간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학적으로도 아담이 얼마나 오랫동안 선악과를 먹지 않고 잘 버텼는가가 이슈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가 선악과를 먹었다가 이슈가 된다. 죄를 모르는 갓난아이도 마찬가지이다. 갓난아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죄를 모르고 지냈느냐가 이슈가 아니라, 그가 성장하면서 반드시 죄인이 된다가 신학의 이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이론적으로 갓난아이는 아직 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신학적으로는 이미 그가 죄인인 셈이다. 또 한 가지는 우리 인간이 감히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비록 자의식이 없던 갓난아이 때였다고 할지라도, 죄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고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죄가 없어서이기보다는 그들이 그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자의식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또는 부끄러운 욕심에 또는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어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격자로 만드시고 그로부터 배반당하고 계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고통 중에 인간을 대신해서 죽게 하실망정 인간을 인간답게 대우하시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은 실로 엄청난 희생이며 위대한 사랑이다. 이 세상에 죄악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 하나님의 희생과 기다림과 사랑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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