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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12]율법의 문제(롬 2: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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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870 2011.05.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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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12]율법의 문제(롬 2:17-29)

신본과 인본

윤리학에서 도덕법의 기초를 신본(神本)에 뒀느냐, 인본(人本)에 뒀느냐에 따라서 입장차가 큰 것을 볼 수 있다. 절대주의(어거스틴, 루터)는 신본에 도덕법의 기초를 두고 있고, 공리주의(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실용주의(존 듀이), 상황주의(조셉 플레처)는 인본에 두고 있다. 한편 절대주의자인 철학자 칸트는 도덕법의 기초를 인간의 이성에 둔다. 공리주의, 실용주의, 상황주의는 이성을 도구로 취급하지만, 칸트는 순수 실천 이성으로 여긴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할 것을 주장한다. 사람 이외에 그 어떤 이익이나 목적도 도덕법의 기초가 될 수 없고, 인간을 이익의 수단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인본주의자였다. 공리주의자 벤담과 밀, 실용주의자 듀이, 상황주의자 플레처도 인본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을 성공의 도구로 삼는 것을 막지 못했다. 통하는 것, 돈 되는 것, 성공적인 것들을 유용성, 효용성, 실용성이란 이름으로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적 기초가 인본에서 출발했지만 인간이 이익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점에서 칸트의 절대주의는 좋은 인본주의이고, 공리주의, 실용주의, 상황주의는 나쁜 인본주의라 할 수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유대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신본주의에서 비롯된다. 예수님과 유대주의자들은 모두가 신본주의자들이요 절대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왜 다퉜을까? 동일한 신본주의요 절대주의였더라도 예수님은 인간을 목적으로 삼았고, 유대주의자들은 수단으로 삼았다. 예수님에게 율법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계명들이었지만, 유대주의자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수단이었다. 유대주의자들에게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613개의 계명(미츠보트)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자위적으로 만든 울타리(게자이라)법과 관습(타카나, 민하그)법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예수님과 유대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들은 하나님의 계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유대주의자들이 자위적으로 만든 울타리법과 관습법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을 목적으로 삼았던 예수님의 절대주의는 좋은 신본주의이고, 유대주의자들의 절대주의는 나쁜 신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신본이든 인본이든 하나님이든 인간이든 목적이 되면 좋은 것이고, 수단이 되면 나쁜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목적이 되고, 하나님이 이익의 수단이 되지 아니하며, 인간의 행복이 목적이 되고, 이익의 수단이 되지 아니하면, 로마서 2장 17-19절의 말씀대로,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 되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목적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익의 수단이 되며, 인간의 행복이 목적이 되지 못하고 이익의 수단이 되면, 21-24절의 말씀대로, 남에게 가르치는 것들을 자신은 지키지 않으며, 율법을 자랑하면서 율법을 어기며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들 때문에 불신자들로부터 모독을 받는다.

율법의 목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인간을 위한 것인가? 종교의 목적은 인간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율법도 종교도 모두 인간을 위한 것이다. 율법이나 종교나 인간을 위한 것이 되려면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아야지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동시에 인간을 목적으로 삼아야지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으시지, 영광을 받기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으신다. 인간은 하나님을 마땅히 예배와 경배를 받아야할 존귀한 분으로 섬겨야지 이익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시험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하고,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마땅히 돌려줘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예배와 경배를 드리되, 이익의 수단이 아닌, 예배와 경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신본주의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명을 주시되, 인간의 행복을 위해 주셨으므로, 율법은 인간의 삶에 행복의 도구가 되어야지 억압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인본주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수단으로 삼지 않으신다. 인간의 존재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도 하나님이 정한 강제적인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자발적이고 자원적인 목적일 뿐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셨다면, 그 수단은 실패로 끝난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영광은 고사하고 배신과 굴욕을 당하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골고다의 십자가이다. 동시에 골고다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광 받으시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으시고, 인간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으셨다는 증거이다. 배신과 굴욕을 당하실 만정,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만정,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고, 인간을 위해 희생당하셨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이용하여 자기의 유익을 꾀하지 않는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인간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인본주의자이시다. 반대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되, 부모의 재산을 바라고 한다면, 부모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바라는 것 없이 진심으로 효성을 다한다면, 부모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행복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신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유대주의자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도 인간도 아닌 율법을 목적으로 삼은데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613개의 계명이외에 그들이 자위적으로 만든 수많은 법들을 목적으로 삼음으로써 하나님도 인간도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 예수님의 진단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율법을 섬긴 것이다.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삼아야 할 율법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을 섬겨야할 법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아버렸다. 인간을 해방시켜야할 하나님의 계명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핑계로 인간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할례의 유익

유대인 남성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언약이 있다는 흔적을 몸에 표시하는 할례이다. 태어난 지 8일 만에 하는 할례의식(브리트 밀라)을 통해서 유대인 남성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언약 공동체임을 나타내는 흔적을 몸에 지니게 된다.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 열 명 이상이 모여서 이 의식을 진행하는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연대책임을 갖기 위함이다.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맺은 선민서약의 내용이라면, 그 언약의 증표가 할례이다. 할례는 언약의 증표일 뿐 할례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언약의 유무효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약의 내용을 잘 지키느냐, 잘 지키지 못하느냐가 언약의 유무효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2장 25-27절에서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였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의 흔적’을 자랑하는 자들이었다. 유대주의자들에게 할례의 흔적은 유일신 하나님이 그들만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랑의 표시였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이 할례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따라서 참 신자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에 새긴 ‘할례의 표’가 아니라, ‘심비(心碑)의 표,’ 곧 ‘예수의 흔적’임을 강조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였다.

유대주의자들의 문제점은 본질보다는 의식, 의미보다는 형식, 정신보다는 문자에 치우치는데 있다.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들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항상 본질과 내면에 관한 것이었고, 유대주의자들의 태도는 겉껍데기와 허례의식(외식)에 관한 것이었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아주 잘 지켰다. 최선을 다해서 지켰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의 행동은 알맹이가 없는 겉껍데기 허례의식에 불과했다. 안식일 법은 물론이고, 손 씻기 법과 그릇 씻기 법 등이 다 형식에 치우친 것이었다. 유대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만든 법들에 노예가 되어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억압하고 죽이는 일을 하였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듯이, 그들은 율법에 매여 정의(義)와 자비(仁)와 신실함(信)을 버린 자들(마 23:23),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하는 자들(마 23:25), 소경된 자들(마 23:26), 회칠한 무덤(마 23:27), 외식하는 자들(막 7:6),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막 7:7),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자들(막 7:8-9),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들(막 7:13),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막 8:18)이었다. 율법주의자들의 문제점은 신본인 척하지만 실상은 인본에 치우친데 있다. 진정한 신본은 인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본을 이유로 인본을 말살하는 데 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이유로 인간을 속박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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