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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17]이방인의 하나님(롬 3: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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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326 2011.06.0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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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17]이방인의 하나님(롬 3:27-31)

유대인의 하나님

유대인들은 두 가지 점에서 하나님을 독점하려고 했다. 첫째, 하나님을 자기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독점하려고 했다. 온 인류의 하나님을 자기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묶어버리고, 유대민족의 신(神)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하나님은 결코 소수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으로 제한될 수 없는 이 우주에 한분밖에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유대인들의 큰 장점은 하나님을 자기 조상의 하나님으로 믿어왔다는데 있다. 모세오경에는 ‘조상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12회 정도 나온다. 그만큼 ‘조상의 하나님’은 유대민족의식 깊이에 자리 잡고 있는 사상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120대 3,800년이 넘도록 믿어왔던 하나님이다. 아버지가 믿었고, 할아버지가 믿었고, 증조부가 믿었고, 증조부의 할아버지가 믿었고,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믿어왔던 하나님이다. 그런데 문제점은 그 하나님을 자기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믿었다는데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 자신만의 하나님으로, 그들 조상만의 하나님으로, 그들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독점해버렸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다.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들과는 교제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613개의 계명이외에 안식일법, 정결법, 음식법, 손씻기법과 같은 수많은 울타리법들과 관습법들을 만들어 방어막을 겹겹이 쳤다.

둘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성막이나 성전에 가둬두고 독점하려 했다. 유대교가 성전을 단 한 곳 예루살렘에만 둔 것도 하나님을 독점하고 가두는 처사였다. 하나님은 특정 인간이 독점한다고 독점되실 분이 아니며, 가둔다고 갇히실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을 성막이나 성전의 지성소라는 특정 장소에 국한하려 한 것은 성전을 장악하여 백성을 통치하려는 정치적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하루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게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성전시대에 들어서면, 성소를 둘러싼 뜰과 담이 접근을 겹겹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성소가 들어선 뜰을 제사장의 뜰이라 하여 제사장들만 출입할 수 있었고, 그 바깥뜰을 이스라엘의 뜰이라 하여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들에게만 허용되었으며, 남성의 뜰 바깥에 유대인여성들에게만 허용되는 여성의 뜰이 있었다. 이방인들은 여성의 뜰 바깥에 있는 넓은 이방인의 뜰에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로부터 가장 가까운 영역에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제사장들이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이방인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성전의 뜰과 뜰을 분리하는 담들은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일종의 차단막, 곧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는 휘장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성소는 대제사장에게만 일 년에 단 하루 출입이 허용되었다.

신약성경은 그 같은 차별의 담들을 헐어버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한다. 우리 이방인들조차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히 10:19-20)고 말한다. 민족의 담, 성별의 담, 신분의 담, 계급의 담을 헐고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지성소의 법궤) 앞에 담대히”(히 4:16)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된다고 말한다.

이방인의 하나님

로마서 3장 2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라고 선언하였다.

수천 년간 조상의 하나님을 고백했던 엄청난 신앙유산을 가진 유대인들이 기독교에 추월당하고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위대한 신앙유산을 물려받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옛 언약공동체로 무시해버린 기독교신앙에 뒤진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하나님으로 묶어버리고, 소수 유대민족의 신으로 제한해 버린 때문이 아니겠는가? ‘조상의 하나님’ 신앙이 유대민족의 결속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민족신(民族神)으로 묶어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그들 조상에게 계시하셨던 하나님은 결코 소수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으로 제한될 수 없는 이 우주에 한분밖에 없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오랜 역사와 완고한 전통 속에 있던 유대교를 뛰어넘어 기독교시대를 연 인물이 바울과 헬라파(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계시와 부름을 통해서 유대인의 하나님을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유대인의 구원의 하나님을 이방인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그 지평을 넓혔다. 그는 에베소서 2장 19절에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고 했다. 로마서 10장 12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라고도 했다. 에베소서 3장 6절에서는 “그 비밀이라는 것은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함께 약속을 받은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라고도 했다. 일찍이 유대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런 파격적인 선언이 계시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말한 내용이라고 했고,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신 것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다른 세대의 사람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이 자기 민족만의 하나님이란 편협한 사고에 빠진 유대인들을 말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 유대인도 예수님을 믿어야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과 동등한 자격을 얻는다는 것,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등하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것, 이것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 3:8절)이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였던 비밀의 경륜”(9절)이며,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11절)이라고 했다. 이런 파격적인 대 선언 때문에 바울은 수없이 옥에 갇히고, 수없이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유대인들에게 39대의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고, 날마다 교회들을 위하여 염려 속에서 살아야 했다(고후 11:23).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시려고 친히 화목제물이 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며,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써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며, 한 분 하나님은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분이시란 점을 바울은 로마서 3장 27-31절에서 피력하였다.

이 본문 속에 두 가지 사상이 녹아 있다. 첫째, 사랑이 많고 공평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결코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그래서 구원에는 남녀차별 신분차별 연령차별 빈부차별 민족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이 ‘선택’이란 이름으로 유대인에게는 열려있고, 이방인에게는 닫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행사로 인해서 무조건적으로 특정인에게는 열려 있고, 나머지에게는 닫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조건아래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차별 없이 기회가 열려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3장 22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고 하였다. 또 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요한도 복음서 3장 16절에서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누구나”와 “누구든지”는 구원의 복음이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뜻이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가진 사람이나 갖지 못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남녀 신분 연령 빈부 민족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져있다는 뜻이다.

둘째, 유대인들이 누려온 특별한 하나님의 선택이 구원에로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미 하나님의 선민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언약의 말씀인 율법과 그 증표로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엄수했던 유대인들에게조차 믿음이 없이는 의롭다함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한 바울의 증언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선택은 구원에로의 선택이 아니라, 선교도구로써의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말할 때, 구원에로의 선택인지, 도구로써의 선택인지를 분간해야 하며, 구원에로의 선택을 말할 때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선택인지(믿음 전 선택),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인지(믿음 후 선택)를 판단해야 한다. “누구나”에게 공평하신 하나님, “누구든지”에게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에로 선택하실 때 그 사람의 믿음을 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을 상기해야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이란 ‘믿음 후 선택’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은 성도라면, 비록 그가 공평하고 차별 없이 주어진 기회를 잡았다할지라도, 받은바 은혜가 지극히 크므로 그 같은 은혜를 입도록 믿음을 주신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믿음 전 선택’을 신앙고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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