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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23]성화의 원리2(6:1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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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744 2011.07.2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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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23]성화의 원리2(6:15-7:25)

믿음과 침례와의 관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가 침례를 소홀히 해도 좋을 것처럼 받아드려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구원에 관계가 있든 없던 침례는 교회론, 구원론, 종말론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성례이며, 우리 주님께서 친히 받으셨고, 또 행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명령을 소홀히 취급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지상의 하나님나라이다. 초기성화(중생, 칭의)에서 출발하여 완전성화에로 나아가는 도상의 나라이며,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여기 지상에서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앞당겨와 맛보고 경험하는 선취적인 나라이다. 교회는 교인으로 구성되는데 통상 침례를 받았거나, 유아세례 후 견진례를 거친 자들에게 주어지는 자격이다. 이 성례를 받지 아니한 자들은 입교준비교육 또는 교리문답교육을 받고 있는 예비자들이다. 3세기 초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는 입교준비기간을 통상 3년, 짧게는 1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지체 없이 침례를 받고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피침수자들 대부분이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었거나 유대교에 입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침례를 받아야 입교자가 되고 피선거권이 주어지며,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진다. 입교자는 교회론의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자이다.

침례식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믿고 그 신앙을 증인들 앞에서 고백한 후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믿음이 없이는 결코 침례를 받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수정난이 먼저 만들어져야 출산이 가능해지는 것과 같다. 믿음을 수정란에 침례를 출산에 비교할 수 있다. 또 믿음을 사랑에 침례를 혼인에 비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침례식을 통해서 하나님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베드로전서 2장은 침례식의 서약(신앙고백)을 옛 시내산 언약(舊約)에 비교하여 새 언약(新約)으로 암시한다.

수정부터 출산까지가 새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이듯이, 믿음부터 침례까지는 중생에 이르는 한 과정이다. 출산 후에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성장의 과정을 거치듯이, 침례 후에 교회와 성령님의 보호를 받으며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 성장과정을 밟게 된다. 침례 후에 시민권자(입교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시작하기 때문에 이를 신학에서는 시작된 종말 또는 종말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종말의 시작은, 형식적인 면에서, 침례를 통해서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실질적인 면에서, 이 축복은 믿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침례는 서로 별개의 것이거나 어느 것 한 가지만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과정 속에 있는 동일하게 중요한 요소들이다. 침례는 믿음에 의한 행위이자, 믿음의 고백이며, 믿음의 결과이다. 신자의 구원에 믿음과 침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를 받는 과정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과정이다. 믿음은 영원하다. 바울은 믿음을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침례는 신뢰의 믿음에서 신실한 믿음에로 건너가게 하는 다리이다. 복중의 태아를 험한 세상에로 보내는 것이 출산인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의미

만약 우리가 율법아래 있지 않다면, 왜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가? 어떤 법도 우리를 얽매거나 묶지 못할 것이 아닌가(6:15)라는 반박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로마서 6장 15절부터 7장 6절에서 밝혔다.

로마서에 언급된 자유는 순종의 의무에서 면제된 자유를 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받는 심판을 받지 않을 자유를 말한 것이다. 율법이 정의실현과 질서유지에는 가치가 크지만, 구원의 수단으로써는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권세로부터 절대자유나 자율을 주장하는 자유주의는 죄악이며 거짓자유이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을 말한다.

율법에서 자유하다는 의미는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 율법준행의 의존으로부터의 자유, 율법주의동기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데, 의무가 아닌 사랑과 감사와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누구를 섬기느냐에 따라서 섬김을 받은 자의 종이 된다고 말했다. 죄를 섬기면 죄의 종이 되고, 의를 섬기면 의의 종이 되며,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6:16)고 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순종의 종 혹은 의의 종이 되었다(6:18,22)고 했다. 전에는 사망의 왕인 사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생명의 왕인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다. 따라서 은혜 아래서도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할 의무는 변치 않는다. 순종의 본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어기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어기신 것이 있다면, 율법사들이 만들어 지키게 한 장로들의 유전(gezeirah) 즉 울타리 법들이었다.

성도들의 순종의 동기는 사랑과 감사와 자원함이다. 이제는 의무로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미 구원의 열차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6:17,7:1-3). 우리가 율법아래서도 최선을 다했거든, 하물며, 은혜아래서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6:19-20), 우리가 사망의 삯을 위해 죄를 섬겼거든, 하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6:21-23)라고 바울은 말했다. 비록 우리의 육체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고, 그래서 여전히 연약하지만,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6:19)고 권했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다”(6:22-23)고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차별 없이 선물로 주신 구원의 목적이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다”(7:4)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위의 삶이요, 수고와 노동의 삶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라고 했다. 더 이상 사망의 열매를 맺어서는 안 된다(7:5-6). 사망의 열매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것들이다”(갈 5:19-21)고 하였다.

율법의 성격과 성화의 갈등

율법의 순종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면, 율법에 이상이 있거나 율법이 악하단 말이 아닌가라는 반박에 대해서 바울은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할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다고 말했다.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고 의롭다함을 받고 거듭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육체의 본능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했고, 그 후손들이 범했던 죄와 허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의 죄지을 성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렇지만,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7:12)고 바울은 밝혔다.

또 바울은 율법이 죽음의 원인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인간의 죽음의 원인은 인간의 죄 때문이고,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했다. 율법(계명)은 오히려 신령하다(7:14)고 했다. 반면에 우리가 순수한 동기로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해도 우리 몸의 죄지을 성질이 이를 만만히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죄와 허물을 피하지 못하고 죄에 팔리는 것은 우리 몸이 아직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활은 인간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책이자 구원책이다.

구원을 받았어도 죄지을 성질에서 아직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 자신도 육체의 연약함에 대해서 로마서 7장 15-25절에서 탄식을 금치 못했다. 본문에서 묘사된 “나”란 사람은 바울 자신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대표이다. 탄식의 원인은 아직 해결 받지 못한 육체의 죄성(罪性)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내 속에 거하는 죄”는 죄성(罪性), 죄지을 성질, 또는 육체의 본능을 말한다. 구원을 받은 성도이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것이 있다. 믿는 자들에게 성화를 이루기 위한 갈등과 탄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성화의 완성에 두지 않고, 초기성화(중생, 칭의)에 둔다. 구원의 확신은 초기성화에 있지, 완전성화에 있지 않다. 따라서 성화를 이루기 위한 갈등과 탄식은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행함이 믿음이 있다는 증거의 조건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는 성화를 이루고자하는 갈등과 탄식이다(7:22).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의지를 찾고 계시지 완전성화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신다. 죄지을 성질인 육체의 본능을 극복하는 완전성화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을 해야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것을 담보로 성결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명대학교 오우성 교수는 본문의 “나”는 중생한 자의 관점에서 본 중생 이전의 상태가 아니라, 중생한 자로서 성령님의 영향력 아래서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 실존의 모습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중생을 체험했지만,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율배반적인 갈등 속에서 고뇌하는 모습이라고 말하였다. 이 상황에서 바울은 율법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내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죄의 세력, 그리고 이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극복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고 설명하였다<로마서 7장 14-25절의 주석사>. 여기서 죄의 세력은 아담이 겪었던 육체의 본능이요, 육체가 죽고 영혼이 낙원에 이르거나 육체가 부활하면 사라질 일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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