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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26]남은 자의 구원(롬 9: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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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704 2011.07.2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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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26]남은 자의 구원(롬 9:19-33)

닫힘과 열림

하나님의 의지는 닫힌(숙명적인) 것인가, 열린(우발적인) 것인가?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기는 말씀들이 많다. 율법(Torah)이 대표적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와 같이 “~하라”와 “~하지 말라”는 계명들(Mitzvot),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에만 이런 계명들이 613개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 가운데 248개는 ‘~하라’는 긍정명령이고, 나머지 365개는 ‘~하지 말라’는 부정명령이다. 신학에서는 이런 명령들을 하나님의 훈계의지에 분류한다. 신약성경에도 “~하라”와 “~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많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먹게 하리라”(계 2:7),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와 같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이길 것을 권면하는 말씀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 “그 믿음이 의(義)로 여겨졌다”(롬 4:9)와 같이 자발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들,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참고: 막 1:15,11:22, 요 4:21,14:1)와 같은 말씀들이 있다. 이들 말씀들은 하나님의 의지가 닫혀 있음을 의미하는가, 열려 있음을 의미하는가? 만일에 인간의 운명이 닫혀 있다면, 인간의 책임과 선택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이 훈계들과 명령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5:30)와 같이 한 달란트밖에 받지 못한 자에게 물어야할 책임추궁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지는 굳게 닫혀 있어서 절대로 열리지 않는 운명이나 숙명이 아니다. 타고난 운명이나 숙명이 있는 반면에 또한 열려있는 부분도 많다. 그것이 설사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목적의지)대로 결정하시거나 처리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시지만(훈계의지처럼) 인간이 그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것들(계명들)이 많고, 인간이 원하고(죄악들) 하나님이 마지못해서 허락하시는 일도 많다. 사람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 무엇인가? 긍정의 변화가 아닌가? 운명이나 숙명처럼 닫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면, 긍정의 변화는 절대 기대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어서 정해진 대로 이뤄져야한다면, “~하지 말라”와 “~하라”는 계명들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흑암이 변하여 빛이 되고, 혼돈이 변하여 질서가 되고,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는 변화는 닫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열려 있기 때문에 가능한 기적이다. 사람들이 기적을 믿지 못하는 것은 자연(因果)법칙이 시공(時空)에 닫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닫혀있다고만 믿으면, 긍정의 변화란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숙명과 운명을 함부로 결정하지 않으신다. 복에 관한 것이면 몰라도 저주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부활과 긍정과 열림과 살림의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유다가 은 30세겔에 예수님을 판 것은 욕심(본능)에 이끌린 때문이고, 베드로가 배반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역할을 배정하신 때문은 아닐 것이다.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것과 미리 정하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미리 아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미리 아셨으면 반드시 아신 대로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마음대로 결정하실 수 있다. 그래서 자유만 있고 제한은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가 쉽다. 실상은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인간보다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실 수가 있다. 인간에게는 실수와 허물이 허용되지만, 하나님께는 그것들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것이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시는 반면, 인간에게 자유는 허용된 것이지만, 불완전하기 때문에 방종에 빠지기가 쉽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완전한 자유자이시기 때문에 또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에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을 스스로 제한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정하실 수 있지만, 한번 정하신 것을 번복하거나 바꾸실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결정하시지 않는다. 만일 결정하신 후에 번복하거나 바꿀 일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게 된다. 따라서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일단 무언가를 정하시면, 그것을 번복하거나 바꾸실 수 없게 된다. 번복하거나 바꾸실 수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제한적인 자유를 갖고 계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함부로 인간의 운명이나 숙명을 이렇게 저렇게 예정하시지 않는다. 만일 인간들의 운명을 모두 결정해 버리시면, 하나님은 인간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게 되고, 그 오랜 자비를 베푸실 수 없게 된다. 비록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모든 것을 정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오랜 자비를 베푸실 자유를 누리시기 위해서 많은 일들을 미리 정해놓지 않으시고 열어 두신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탕자의 행불행의 운명을 미리 정하시지 않고, 열어두심으로써 그가 언제라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과 같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유를 누리시는 방법이다. 만일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것이 있다면, 신학자 칼 바르트 식으로 말하자면, 돌아온 탕자처럼 누구든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자를 큰 기쁨으로 맞이하시겠다는 자비의 결정일 것이다.

하나님은 목적하신 일에 따라 독자적으로 결정하시고 행하시는 일도 있지만, 대개는 천지창조와 자연법칙 또는 구세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과 같은 큰일들이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독단으로 결정하시기보다는 계명들을 주시고 지키게 한 후에 상벌을 주시거나 인간이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방법으로 관계하신다. 이것을 훈계의지와 허락의지라 부른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상당부분 열어 놓고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한 때 복을 내리셨던 인간에게 벌을 내리실 수가 있고, 반대로 벌을 내리셨던 자에게 복을 내리실 수도 있다. 개개인의 운명으로 상벌을 미리 정하시기보다 선악에 따라 상벌을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이면,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고 임시적인 결정들을 하실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선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로마서 9장 19-33절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 말씀이다. 한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귀히 쓰일 그릇과 긍휼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이방인들도 긍휼의 대상이란 점, 하나님의 오랜 자비에는 차별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그릇을 빚을 수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자비를 베푸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그릇들을 만드셨는데, 선교의 도구로 귀히 쓰일 그릇을 만드셨다. 그 그릇이 이스라엘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반면에 이방인을 대표하는 이스마엘과 에서는 천히 쓰일 그릇들이었다. 이방인들은 선교의 도구가 아니라 대상이었다. 선교의 대상보다는 도구가 귀한 그릇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히 쓰일 그릇과 천히 쓰일 그릇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바울이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는 말씀과 같다. 이 그릇들이 다 귀(貴)하지만, 하나님께는 귀한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며, 귀하다고 자동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천한 그릇인 이방인들이 “믿음에서 난 의”(30절)를 얻었다는 것과 귀한 그릇이었던 유대인들이 “부딪칠 돌에 부딪쳤다”(32절)는 말씀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또 한때 이스라엘은 긍휼의 그릇이었고, 이방나라인 이집트는 진노의 그릇이었다. 이들 그릇들에 대해서 창조주 하나님께 그 누구도 항의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19-21절). 왜인가? 차별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 때문인가, 아니면, 전혀 차별하지 않으셨기 때문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실 때에 바로가 순순히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면, 진노의 그릇이 되었겠는가? 하나님은 강퍅한 바로에게조차도 열 번이나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22절)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또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23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광의 땅 가나안을 약속하시고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신 긍휼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와 동일한 원리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자들, 즉 귀한 그릇 유대인뿐 아니라 천한 그릇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은 차별 없이 긍휼을 베풀어 구원하신다고 말하였다. 귀하든 천하든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그 오랜 자비를 입은 자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것이다(24절).

그래서 바울은 25-33절에서 호세아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이방인 구원의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25-26절)한 호세아의 글을 인용하였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을 것이라”(27-29절)는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였다. 구원의 원리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던” 방법, 즉 “믿음에서 난 의(義)”였다(30절). 한때 귀하게 쓰일 그릇이었고, 긍휼의 그릇이었던 유대인들이 구원공동체인 ‘남은 자들’에 속하지 못한 것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한 때문이었다(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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