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규범)의 중요성(롬 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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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규범)의 중요성(롬 7:1-25)
관점의 차이
미국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를 보면,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이 끼어든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362쪽)고 하였다. 그의 이 말은 가치관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관이란 값을 매기는 관점을 말한다. 그런데 이 값을 매기는 관점이란 것이 일정치 않아서 마치 색안경과 같다.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색깔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관점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기준이 달라서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기준이 있는가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아예 기준이 없기도 하다. 기준이 있으면 객관성이 높아지고, 기준이 없으면 주관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그 기준이란 것이 종류가 다양해서 과연 무엇이 믿고 따를만한 것인가를 알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
아무튼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의 기준에 따라 관점을 갖고 있고, 그것에 따라서 가치에 대한 판단을 다르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각기 다른 기준을 하나로 통일시킬 방법은 없을까? 통일된 기준, 통일된 관점, 통일된 가치관을 갖는 것이 가능한가?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통일성에 관심을 갖는가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다양성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 각기 다른 기준, 다른 관점, 다른 가치관도 서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중립적인 사람들은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주장하기도 한다. 다양성은 인정하되 그 속에서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 전부터 토라(율법)를 기준으로 삼고 있어서 아마 세계에서 가장 높은 민족적 통일성과 연대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과 모슬렘교인들도 유대인들처럼 규범적인 경전을 갖고 있다. 경전은 규범적인 판단기준을 제공한다. 경전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판단의 엄격한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인끼리는 상당한 통일성을 갖는다. 그러나 경전들 사이에도 질적 차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공공선, 공동체의 행복, 사람들의 미덕에 끼치는 영향이 어떤가에 따라서 그 가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밖에도 정치적, 철학적, 윤리적 주의나 주장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들이 있다. 절대주의, 공리주의, 실용주의, 자유지상주의 등이 여기에 속한다. 경전은 규범을 제공함으로 경전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절대주의가 되지만, 공리주의, 실용주의, 자유지상주의 등은 사실상 규범이 없으므로 유용성(principle of utility)이나 실용성과 같은 결과가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믿음의 내용(교리)으로 삼는다. 여기서 믿음의 내용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의 신념이고 관점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소유권이 창조주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 몸의 결정권조차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삶, 나의 노동, 나의 가족, 나의 소유, 이 모든 것이 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고, 나의 것이 아니며, 나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 즉 성경적 가치에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낙태, 자살, 안락사 등을 함부로 할 수 없다.
공리주의
세속주의 가운데 한 가지가 공리주의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자연신론의 영향아래 제러미 벤담이 주창한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 여기서 최대 행복은 가치나 질에 상관없이 쾌락의 크기를 말한다. 이 쾌락의 크기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다. 쾌락이 크면 선이고, 고통이 크면 악이다. 따라서 공리주의에는 보편적인 기준(규범)이 없다. 동기나 수단에 상관없이 결과가 기준이다. 결과란 쾌락(행복)을 극대화시키고 고통을 극소화시킬 수 있는 유용성(실용성)을 말한다. 추가될 것이 있다면, 쾌락의 지속성, 강렬성, 확장성이다.
공리주의는 쾌락의 양을 키우는 것이 정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성경적 가치, 개인의 권리와 인권 혹은 존엄성이 무시된다는 약점이 있다. 예를 들면, 담배회사인 필립 모리스는 체코정부가 흡연에 따른 의료비 증가를 우려해 담배에 부과하는 세금을 높이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 흡연이 체코의 국가 예산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비용과 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에 매달렸다. 그 결과 흡연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는 정부의 의료비 예산을 높이지만, 상대적으로 일찍 죽기 때문에 노년층을 위한 의료 연금 주거 부분에서 막대한 예산이 절감됨으로 흡연이 오히려 국가에 막대한 이익을 준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또 포드 자동차가 1970년대에 ‘핀토’라는 소형차를 만들어 대량 판매하였는데, 추돌사고 때 연료탱크가 쉽게 폭발하는 결함이 있었다. 실제로 500여명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화상을 입었다. 그런데 회사는 이미 이 결함을 알고 있었고, 안전장치를 새로 부착하는데 대당 11달러가 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회사는 이를 방치했다. 차량 폭발로 입게 되는 인명과 재산의 손실가치보다 팔려나간 전체 ‘핀토’에 안전장치를 부착하는 비용이 훨씬 더 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기업이윤의 창출수단(도구 혹은 기계)으로 삼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유용성(결과)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처럼 사람의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도덕성의 문제까지 야기한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 성경적 가치가 배제된다는 것,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가 무시되는 실용성, 즉 도덕적 문제를 모조리 쾌락과 고통이란 기준으로 저울질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례이다.
천재로 알려진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의 양적 공리에 반대하여 질적 공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자유론>에서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면서 개인을 보호하려 들거나 다수가 믿는 최선의 삶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하며,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행동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공동체의식이란 미덕, 즉 국가나 이웃에 대한 의무에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야기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이 타인의 행복, 즉 공동체를 위한 행복의 도구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오직 내게만 속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식이다. 내가 자살을 하든, 낙태를 하든, 마약을 하든, 매춘을 하든, 동성애를 하든, 콩팥을 떼어 팔든, 대리모를 사든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다. 내 몸의 결정권은 내가 가졌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낙오자를 보호할 안전장치가 없는 능력위주의 자유시장,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선을 장려할 거의 모든 수단을 배제하는 권한축소지향 정부, 합의에 의한 것이라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마저 상관없다는 무서운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자율과 타율
임마누엘 칸트는 18세기 독일의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은 철학자였다. 칸트가 사용한 용어에는 이성, 자유, 목적, 동기, 자율, 타율 등이 있다.
칸트는 인간이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라고 하였고, 오늘날의 인권개념에 막강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만일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라면 그 자체로써 목적이어야지, 수단이나 도구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인간을 존중하면 인권이 신장되지만, 인권신장 때문에 인간을 존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이 인간으로써 존중받지 못하고 인권신장의 도구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리주의는 인권신장이란 공리(결과)가 커지기 때문에 인간이 도구가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본다. 그러나 칸트는 동시대 사람인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공리(결과)를 따지는 것은 지나치게 계산적이기 때문에 동기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동기가 불순한 공리성(유용성)은 옳고 그름의 기준(규범)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또 만일 인권신장이 인간이 얻고자하는 욕구라면, 인권신장을 위해서 인간을 존중하는 행위는 타율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된다.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인 이성적 존재가 순수한 본래적 목적이 아닌 타의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때 인간은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가 된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성령의 법을 자율로 율법을 타율로 보았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면, 우리는 본래적 목적인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한다. 5-6절을 보면, 우리를 얽매였던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타율)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자율)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조문의 묵은 것(타율)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하였다. 또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자율)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타율)이 내 마음의 법(자율)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타율)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자율)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타율)을 섬기노라”(21-25절)고 하였다. 여기서 “영의 새로운 것,” “하나님의 법,” “내 마음의 법”은, 칸트의 의견을 빌리자면, 순수 실천이성에 지배를 받아 본래적 목적을 따르는 자율이고, “죄의 정욕,” “율법조문의 묵은 것,” “한 다른 법,” “죄의 법”은, 칸트의 의견을 빌리자면, 본능이 갖는 죄의 성질에 지배되는 타율이다. 성령의 법을 따르는 것은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하여 본래적 목적인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으려 하기 때문에 동기가 순수하지만, 율법을 따르는 것은 아직 받지 못한 것을 받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적이고 계산적이므로 동기가 불순하다. 동기가 순수한 것이 자율적인 것이고, 동기가 불순한 것이 타율적이다. 만일 우리 기독교인들이 본래적 신앙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거나 하나님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거나 이웃을 섬김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성질에 따라 타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믿음으로 회복한 영적 본래성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본래성마저 상실하게 된다. 결국 자유를 잃고 공허한 성공주의의 속박에 묶여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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