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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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눅 10:25-37)
정의(justice)
15세기 말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 ‘정의의 여신’(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디케)은 천으로 눈이 가려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른 손은 칼을 치켜들고 있고, 왼손은 천칭저울을 들고 있다. 그리고 여신의 뒤에서 광대차림을 한 사람이 여신이 보지 못하도록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본래 이 그림은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소송을 일삼고 사법 기관의 업무를 마비시키는 브로커들을 풍자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법기관의 공평성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린 것은 사법기관이 공정성을 져버린, 즉 정의를 멀리한 부패의 상징일 수도 있고, 정의실현을 위해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공평무사한 태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른 손의 칼과 왼손의 천칭저울은 모두가 법의 심판을 상징한다.
정의에는 보복정의와 분배정의가 있다. 보복정의 가운데는 구약성경에도 나오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란 것이 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출 21:23-25)갚는다는 이 법은 피해자의 손해와 동일한 손해를 가해자에게 입힌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아직도 이 법이 종종 시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은 기독교신앙의 등장으로 그 힘을 잃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막의 계율이 사랑의 법으로 바꿨다.
최근의 관심사인 복지는 분배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다. 능력위주의 자유경쟁사회에서는 빈부격차가 큰 문제이다. 미국의 경우, 상위 1퍼센트의 부자가 미국 전체 부의 3분의 1을 소유하는데 이는 하위 9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그리고 상위 10퍼센트 가정이 미국 전체 소득의 42퍼센트, 전체 부의 71퍼센트를 소유한다고 한다.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부자세의 신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부자세는 일과 투자의욕을 꺾게 되어 생산성이 감소되고 경제이익이 줄며, 그로 인해 재분배의 양도 줄어든다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부자세를 반대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면서 정부규제에 반대하는데, 그 명분이 경제의 효율성에 있지 않고, 인간의 자유 즉 기본권과 소유권에 있다. 또 일부 공리주의자들은 부의 재분배 즉 부자세가 소수의 가진 자들의 행복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대신, 부자세로 인해서 얻게 되는 가난한 자들의 행복은 상대적으로 훨씬 커진다고 본다.
부자세 논쟁은 마이클 조던이나 빌 게이츠, 삼성의 이건희나 현대의 정몽구와 같은 부자들의 성공이 자신의 것이냐, 아니면 사회 공동체의 것이냐는 데 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소유권이 그들 개인에게 있으므로 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고, 평등을 옹호하는 전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 존 롤스는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발 더 전진해서 성경은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개인주의(정)와 공동체주의(반)의 변증법적 합이 복지의 관건이다.
차등원칙(difference principle)
인간사회가 계약 공동체란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대인(對人)관계뿐 아니라, 신인(神人)관계에서조차 계약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인간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의 경우, 부부가 결혼서약으로 시작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보다 큰 조직인 교회의 경우도 침례서약으로 이뤄진다. 이보다 훨씬 큰 이스라엘 역시 토라(율법)를 내용으로 하는 시내산 서약을 통해서 맺어진 공동체란 것을 구약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토라를 언약법, 계약법, 증거법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 법이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규범, 잣대, 원칙, 기준이 되고 있다. 비단 이스라엘뿐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국가들은 헌법을 비롯해서 각종 민법, 상법 등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17세기에 존 로크는 시민의 안전과 재산보호를 위해서 사회계약에 따른 국가권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국가법은 국민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법이다. 18세기에 임마누엘 칸트는 사회계약의 대안으로 가언적(조건적, 가설적) 합의를, 20세기에 존 롤스는 협상에서 어느 누구도 우월한 위치에 놓이지 않는, 즉 원초적 평등의 위치에서 이뤄지는 가언적(조건적, 가설적) 합의를 사회계약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롤스는 합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계약 그 자체가 도덕적이다, 공정하다, 혹은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합의만으로는 도덕적 의무가 수행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쪽으로 치우친 거래는 상호이익과는 거리가 멀어서 자발적인 거래라고 할지라도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하였다.
애초에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출발하더라도 출발과 동시에 이내 그 평등은 깨진다는 것이 롤스의 주장이다. 능력의 차이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더라도 출발선이 다르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가족의 도움을 받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 막대한 밑천을 가지고 시작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유리하다. 그래서 롤스는 차등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차등원칙이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부요한 가정에서 자란 학생과 동일한 기반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층이나 가정환경에 상관없이 동일한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말한다. 능력위주의 사회에서는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부의 분배가 결정되기 때문에 불평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차등원칙을 통해서 줄일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롤스의 차등원칙은 공산주의처럼 평등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재능과 소질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하되, 그 이익을 공동체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을 공동자산으로 여기고, 그 재능을 활용해 생긴 이익을 공유하자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이익을 혼자서 누리게 해서는 안 되며,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재능과 자격은 다르다. 재능과 능력을 타고난 사람일지라도 그럴만한 자격이 있거나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시작할 자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사람의 행운이 사회구조의 조정을 통해서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쓰이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런 이론이 국가정책에 반영되면, 복지정책이 세워지게 된다.
공동선의 추구(Pursuit of Public Virtue)
기독교의 박애정신은 자율적이고 자발적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하나님께 행한 바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께 행하는 것과 사람에게 행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잊고 지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 4:20)는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박애정신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강제성이 없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박애정신에만 의존해서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시킬 수 없다. 개인의 이익을 공동체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조세정책과 복지정책이 필요하다. 존 롤스의 차등원칙은 개인주의를 지양하고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정책, 즉 소외계층에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우대정책과 복지정책을 펼쳐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의롭고 선하다는 철학적 윤리적 근거를 제공한다.
존 롤스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날 자격이 있다거나 애초부터 사회에서 유리한 출발선에 설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샌델도 성공을 우리의 결과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줄어든다. 성공을 미덕에 대한 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믿음은 단순한 오해이며, 버려야 할 그릇된 통념이라고 말한다. 예수님 시절에 유대인들은 부와 건강과 명예와 권세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고, 가난과 질병을 죄 때문으로 여겼다. 따라서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요, 가난과 질병은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정 반대였다. 오히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들이 누리는 행운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하셨다(마 23:23).
우리가 정의의 원뜻을 생각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좋은 결과와 성공을 지향하는 공리주의자들과 능력과 재능을 숭배하고 사유재산권을 엄격하게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주는 것이 정의란 개념을 통해서 자신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행운이 정의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갖지 못한 자들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받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면, 더블어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혼자는 아니다. 혼자서는 부든 명예든 권세든 누릴 수가 없다. 개인이 누리는 부와 명예와 권세는 모두가 사회와 국가가 있음으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부인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재능과 능력이 뛰어나도, 그가 속한 공동체가 무너지면, 그도 함께 무너지게 된다. 공동체가 발전하면 개인도 함께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의 발전은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고, 공동체의 발전은 개인의 발전에 도움을 준다. 이 땅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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