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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1]두 개의 길(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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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080 2011.03.11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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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1]두 개의 길(눅 15:11-32)

인류의 혈통

신구약성경 66권은 두 길에 관한 이야기이다. 구약성경 39권을 지은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신약성경 27권을 쓴 기독교인들도 두 길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두 길은 서로 상반된 길로써 끝까지 가면 영원히 서로 마주칠 수 없는 길이다. 한 길은 약속(언약)의 길이고, 다른 길은 임의(자유)의 길이다. 한 길은 좁은(광야) 길이고, 다른 길은 넓은 길이다. 한 길은 순종의 길이고, 다른 길은 불순종의 길이다. 한 길은 생명의 길이고, 다른 길은 멸망의 길이다. 한 길은 하늘로 이어지는 길이고, 다른 길은 세속(世俗)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두 길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과 세상의 나라에 속한 자들로 나뉜다.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로 나뉜다. 생명의 자녀와 멸망의 자녀로 나뉜다.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 약속의 자녀, 생명의 자녀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발견하였다. 이 정체성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인류를 선민과 이방민족, 두 민족으로 나눴다. 기독교인들도 인류를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 두 민족으로 나눴다.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도 혈통을 중시하지 않았다. 혈통으로 말하자면, 인류는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인류의 시작은 하나님이 손으로 아담을 빚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어버이시다. 하나님의 첫 번째 피조물이 아담이고, 인류는 다 아담의 후손이다. 따라서 혈통이나 색깔이나 언어나 민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한 혈통이나 색깔은 의미가 없다. 인류가 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신앙이다.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문제가 된다. 탕자비유의 핵심은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이다. 아버지의 집을 지킨 맏아들도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이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도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이다.

이 두 아들에서 신구약성경의 차이점이 발견된다.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의 차이점이 발견된다. 맏아들은 유대교인들의 대표로서 이 맏아들의 입장에서 쓴 성경이 구약성경이다. 탕자는 기독교인의 대표로서 이 탕자의 입장에서 쓴 성경이 신약성경이다. 맏아들의 입장, 즉 선민의 입장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이해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고, 탕자의 입장, 즉 이방민족의 입장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이해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맏아들이든, 탕자든 다 아버지의 동일한 사랑의 대상이란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탕자 또는 이방민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율법적이 될 수도 있고, 복음적이 될 수도 있다. 율법적이란 맏아들의 태도를 말하고, 복음적이란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간 탕자의 태도와 밤낮없이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태도를 말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탕자도 하나님의 자식이란 점이다. 그는 버림을 받은 자가 아니라, 집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자이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 탕자를 일컬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하였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란, 칼뱅의 주장처럼,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은 탕자가 구원받게 하려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기독교인들은 탕자를 아버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가인의 가계

창세기는 아담이후 인류가 두 개의 길로 나눠진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그 초점이 약속(언약)의 자녀에 모아지고, 출애굽기부터는 전적으로 그들 선민에게 집중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9장 8절에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4장 28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하였는데, 구약성경에도 이 약속(언약)의 자녀 개념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구약성경에서 족보는 세속적인 족보나 혈통에 제한된 족보가 아니라, 영적인 족보, 언약에 바탕을 둔 족보, 약속의 자녀들의 족보라고 할 수 있다. 문자적인 정확성이나 혈통의 공유를 중시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공유, 정신의 공유, 언약의 말씀 토라와 그 가르침의 공유를 매우 중시하는 폭넓은 의미의 족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서는 “누가 과연 유대인인가?”를 판단할 때, 혈통보다는 유대교 신앙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혈통을 뛰어넘어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곧 그분과 언약한 자들을 형제자매로 보는 큰 틀의 역사이해를 갖고 있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보듯이 아담직후부터 인류는 두 개의 길로 나눠져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한 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는 길이었고, 다른 길은 인간이 임의(자유)로 가는 길이었다. 한 길은 생명의 길이었고, 다른 길은 멸망의 길이었다. 특히 창세기는 땅에 속한 자손과 하늘에 속한 자손,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에 관해서 기술해 놓고 있다.

창세기 4장에는 아담의 아들들인 가인의 가계와 셋의 가계가 나온다. 가인과 그의 7대손까지의 기록이 나온다. 이들은 ‘땅에 속한 자들’로서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셋의 가계, 곧 셋과 그의 아들 에노스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들은 ‘하늘에 속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먼저 드러난 가인의 가계에서 두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첫째, 가인의 가계는 불행하게도 살인자의 피가 흐른다. 가인의 살인(창 4:8)이 라멕의 살인(창 4:23)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인과 라멕의 살인행위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후에 눈이 밝아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죄악과 세속에 눈을 떴다는 뜻이고, 물 컵에 떨어진 먹물이 급속히 번지듯이, 선악과 사건이후 땅에 속한 인간의 역사는 생명파괴와 하나님을 대항하는 반역의 역사로 발전되어갔다.

둘째, 가인의 가계에 살인자의 피가 흐르고 있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타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에 속한 인간의 문명은 오히려 진보하였다. 가인이 성을 쌓는 기술을 발전시켰고(창 4:17절), 야발이 목축기술을 발전시켰으며(창 4:20절), 유발이 음악을(창 4:21절), 두발가인은 금속가공기술을 발전시켰다(창 4:22절). 그러나 인간문명과 기술의 발전은 불행하게도 라멕의 ‘칼의 노래,’ 곧 그의 살인행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을 대항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로 악용되었다. 인간문명의 발전은 대부분 살상도구나 전쟁무기의 개발에서 비롯되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는 선용(善用)이다.

셋의 가계

그러면 살해된 아벨을 대신한 셋의 가계에서 드러난 특징들을 무엇일까? 그 내용을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주신 셋부터 시작하여 에노스에 이르는 셋의 가계는 ‘천국에 속한 자손’ 곧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기록이다. 셋의 가계가 가인의 가계와 다른 점은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생명살림)의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셋의 후손은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절).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뜻은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뜻이자, 생명살림의 가업을 이어갔다는 뜻이다. 가인의 가계가 ‘땅에 속한 자손’이 이룬 물질문명의 세속적인 발전사라고 한다면, 셋의 가계는 ‘하늘에 속한 자손’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룬 하나님을 섬기는 신학과 윤리의 발전사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아버지 하나님은 이 셋의 가계와 혈통, 곧 약속의 자녀들의 혈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고, 지금도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성도들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켜가고 계신다.

가인의 가계에서 보듯이, 땅에 속하여 땅의 지배원리, 곧 타락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에 따라 살면서 스스로 멸망의 길, 곧 넓은 길을 걷는 부류가 있고, 셋의 가계에서 보듯이, 하늘에 속하여 하늘의 지배원리, 곧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법칙에 따라 믿음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행하며 소망 중에 인내하면서 구원의 길, 곧 좁은 길을 걷는 부류가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성도들이 걸어야할 길은 생명의 길, 살림의 길이다.

가인과 아벨이 상징하는 바는 가인으로 대표되는 세속사 또는 타락사, 그리고 아벨로 대표되는 신앙사 또는 구원사에 있다. 아벨이 가인으로부터 살해당한 것처럼, 기독교 역사는 칼을 가진 세상의 권세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왔고, 순교의 피를 많이 흘렸다.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선에 대한 악의 박해를 상징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아벨의 죽음이 개죽음이 아니라 의로운 순교란 사실이다.

우리 성도들은 아벨과 셋 그리고 에노스로 이어지는 천국에 속한 자손 곧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요, 생명의 길을 걷는 하나님의 선민이요, 순교자의 길을 걷는 거룩한 하나님의 신부들이다. 땅에 속한 자손들로부터 언제 어떻게 고난을 겪게 될지 알 수 없다.

천국에 속한 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 자들이다. 이 계보는 아담, 셋, 에노스, 노아,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솔로몬,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로 이어진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들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며,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의 제사를 바치는 자들이다. 이들은 영적인 존재들이고, 신앙세계와 종교문화를 대표하는 자들이며, 항상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하심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사는 자들이다. 하나님께 포상받기에 합당하게 살뿐 아니라, 이 땅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하나님의 통치가 머지않아 실현될 것을 소망하면서 하나님께 신실한 믿음을 보이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이들 약속의 자녀들의 영적인 혈통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어 오셨고, 지금도 하나님은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켜가고 계신다. 지금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으며, 어느 가계에 속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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