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강2]약속의 자녀(요 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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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2]약속의 자녀(요 1:12-13)
역사를 신앙적 의미로 풀이하기
인류의 시작이 하나님이 빚으신 아담 한 사람에 의해서 된 것처럼, 대홍수 이후에는 노아 한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인류가 노아의 아들들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인류가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형제자매인 것을 깨우쳐준다. 바울도 사도행전 17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회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고 설교하였다.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아들들에 따라 크게 세 민족으로 나누어 야벳의 후손, 함의 후손, 언약백성인 셈의 후손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열방과 민족의 뿌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인식할 때, 국수적이고,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지역감정, 민족감정, 잘못된 인습과 문화의 틀을 깨버릴 때, 계시록 7장 9-10절의 말씀처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께 있음을 찬양할 수 있다.
창세기 10장에서의 족보는 다른 족보들에 비해서 상당히 포괄적이다. 가계 중심의 족보라기보다는 민족중심의 족보라고 할 수 있다. 노아를 새로운 인류의 나무뿌리로 제시해 놓고, 그 나무의 세 줄기를 노아의 아들들인 셈과 야벳과 함으로 소개하였다. 그런 다음에 이들 세 줄기로부터 70개의 종족의 명단을 언급하였다. 이 숫자는 우연의 일치이기보다는 완전수라는 유대인의 개념에 따른 것으로써 문자적인 역사기술이기 보다는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한 해석으로써의 역사기술이다. 성경에서 이집트에 들어간 야곱의 가족을 70명으로 설명한 것도 그렇고,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 때까지를 40세대로 설명한 것도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삶을 신앙적 의미로 풀이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사기술방법을 ‘해석으로써의 역사’라고 부른다. 함석헌 선생은 이 해석의 역사를 요리사의 맛난 요리와 화가의 그림에 비교하였고, 이런 식의 역사가를 요리사와 화가에 비교하였다. 역사라는 재료를 잘 배합하여 깊은 의미를 담아낸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해석이 없는 역사기술은 밥그릇에 익히지도 아니한 쌀을 담고, 무 파 배추 등을 조리도 하지 아니한 채 상에 차려 내놓고 맛있게 먹으라고 말하는 무정한 요리사와 같다고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사>에서 말하였다.
창세기 10장의 족보가 민족의 개념과 지리적 개념을 포함한 족보로 기술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른 족보들에 비해서 창세기 10장의 족보에는 종족과 지역의 이름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 있는데, 인류가 하나님께서 빚으신 아담에서 비롯된 가족임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고, 아담을 통해서 종족이 퍼져나갔듯이, 홍수이후에도 노아를 통해서 다양한 종족들이 퍼져나갔다. 비록 피부색과 언어가 다르고 거주지역이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가족 구성원들이다. 그것은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한 아버지에게 착실한 맏아들이 있었고, 집나간 둘째아들이 있었는데, 재산을 탕진해버린 못난 둘째아들일지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극진히 온 마음으로 환대한 것에서 보듯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의 삶이 어떠했든지 간에 모두 존귀한 자들로 바뀌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요 1:12).
기쁨의 소식(복음)
2천 년 전 기독교가 시작되기 이전,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보면, 인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형제자매요 존귀한 자란 기독교사상이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대단하고 놀랍고 기쁜 소식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만 해도, 인간의 목숨은 파리 목숨과 같았다. 특히나 노예들은 자기 운명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다. 오늘날 다수의 사람들이 투우를 일컬어 잔인한 동물학대라며 당장에 멈출 것을 주장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대의 로마인들은 검투장에서 뿐 아니라 상류층 가정에서조차 주인의 손에 운명이 맡겨진 노예들이 펼치는 죽음의 향연을 즐겼다. 그들이 일으키는 희뿌연 모래먼지와 칼에 베이고 찔려 피가 허공에 솟구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며, 목이 잘려 나갈 때마다 즐겁다고 광란하였다. 인간이 소 돼지만도 못하고 파리 목숨보다 못했던 것이다. 소나 돼지처럼 노예시장에서 팔려나갔고, 주인이 때리면 무조건 맞아야 했고, 수시로 지하 감옥에 갇혔으며, 여자들은 수시로 겁탈 당하였다. 그들의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예들이 고대 로마에 자유민의 30-5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인간적이고 이성적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자유민의 삶도 순탄하거나 평화롭지가 못하였다. 전쟁이 일어나 언제 정복군의 노예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고, 무력 앞에 무릎을 꿇어야할지 알 수 없는 배고프고 고단한 삶이었다. 더욱이 유대인처럼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는 속주민의 신세로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그 형편이 더욱 비참하였다. 바로 이때에 인류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사랑받는 고귀한 자녀라는 기쁨의 소식이 전파되었다. 하나님이 노예를 해방시켜 자유를 누리게 하고, 인간답고 이성적인 대접을 받게 하며, 가난과 질병과 사망의 그늘에서 빛의 세계로 옮기기 위해서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인류를 대신하여 죗값을 치르게 하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대 선포가 있었다(요 3:16). 실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엄청난 선언,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었다. 이 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도달하여 우리 또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선포한 이 복음이 지난 2천년 동안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크고 놀라운 소식이 되었는지 모른다.
수천 년의 세월과 고립된 문화로 인해서, 기후와 계절의 차이로 인해서, 피부색이 달라지고, 또 달라진 것이 유전되고, 언어와 문화와 문명의 격차가 생겼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다 하나님의 가족이요, 형제자매들이다. 다만,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에게 착한 맏아들과 허랑방탕한 둘째가 있었던 것처럼, 인류도 ‘하나님께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가 있다. 탕자로 대표되는 ‘땅에 속한 자들’의 핵심은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품을 떠났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직도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계신다. 땅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께 버림당한 것이 아니라,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자들이다. 비유에서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우리도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탕자의 형, 맏아들처럼 마음을 악완하게 먹지 말고, ‘세상에 속한 자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군들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정체성
탕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이 넘치는 마음과 탕자의 회개와 겸손의 마음을 본받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맏아들은 착실하고 순종적이었지만, 율법적이고 오만하며 배타적이었다. 그러나 둘째는 비율법적이고 불순종한 탕아였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 회개한 사람이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그의 관심을 이방인들, 특히 가난하고 죄 많고 소외당하고 병든 사람들, 고아와 과부와 여자들과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같은 사람들에게 두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이 얼마나 자주 이런 이들을 위로하고 관련된 말씀을 하셨는가를 적고 있다. 탕자의 비유를 포함하여 거만한 기도를 올린 바리새인과 가슴을 치며 회개한 세리의 기도, 지옥에 간 부자와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 강도만난 자를 돌본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등 예수님의 선교비유를 14개나 실었다.
신약성경을 보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특별한 민족임을 자부하면서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이방인들을 죄인 취급한 유대인들에게서 동일성을 찾지 않고, 탕자처럼 죄가 크지만, 회개한 자들 또 그런 이방인들에서 정체성을 찾았다. 또 유대인들의 조상 야곱이 형으로부터 적통(嫡統)을 빼앗고, 신앙의 뿌리를 이어간 것처럼, 초기 기독교인들은 장자인 유대교로부터 적통을 빼앗고, 참 하늘에 속한 백성, 천국의 길을 걷는 하나님의 선민공동체로 정체성을 설정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가족은 혈통으로 적통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결정짓는 것임을 암시한다. 에서와 야곱의 사건이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과 유대교와 기독교에 닮아있다. 맏아들인 에서가 적통에서 멀어지고, 둘째인 야곱이 적통을 잇듯이, 후발주자인 기독교가 선발주자인 유대교의 적통을 빼앗고 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인들을 ‘옛 언약’ 선민, 자신들을 ‘새 언약’ 선민으로 인식하였다. ‘구약’이란 말과 ‘신약’이란 말이 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줄임말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적자(嫡子)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민족으로도 혈통으로도 색깔로도 문화로도 종교로도 성씨로도 결정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부족을 알고 잘못을 뉘우치며 아버지 하나님께 겸손히 회개하고 애통하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결정된다. 그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 탕자의 비유이다.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도 에서와 야곱처럼, 맏아들과 탕자처럼 전혀 상반된 길을 걷게 될 수 있다. 야곱도 탕자처럼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자신의 잘못과 부족을 회개하였다. 그 일이 있고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 인간적으로 많이 부족했지만, 야곱은 신앙 하나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약속의 자녀로서의 적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남길 족보는 무엇인가? 혈통에 의한 족보인가, 신앙에 의한 족보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것인가, 혈통과 학벌과 명예와 권세에서 찾을 것인가, 하늘 길을 걷는 신앙에서 찾을 것인가? 우리에게 도달된 기쁨의 소식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 전달될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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