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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4]하나님의 복음(롬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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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조회 12,067 2011.03.27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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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4]하나님의 복음(롬 1:1-17)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

로마제국의 카라칼라 황제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공포하여 로마시민과 속주민의 차별을 없애고, 제국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동등하게 로마시민권을 주었다. 이 칙령은 로마제국이 건국 일천주년을 35년 남겨두고 서기 212년에 공포되었다. 이 칙령으로 인해서 로마시민권은 더 이상 특권이 되지 못했다. 이 칙령의 공포로 인해서 노예를 제외한 제국내의 모든 자유민이 동등한 특권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들만을 선민으로 여기던 옛 시대의 특권을 새천년을 바라보면서 유대인과 이방인 가릴 것 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선민의 특권을 받는다는 바울의 복음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로마서 1장 1절,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씀은 바로 이 복음, 즉 누구나 차별 없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된다는 기쁨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자의식에 찬 말씀이다. 또 5-7절을 보면, 자신은 이 일에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든 이방민족에게 전파하여 그들이 예수님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게 하는 일에 노예처럼 충성한다고 하였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그 같은 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얼마나 큰 특권으로 인식되었을지는 당대의 로마시민권이 갖는 특권이 얼마나 컸는지, 특히 시민권을 갖지 못한 수많은 노예들과 점령지 주민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힘의 상징이었는지를 알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로마제국은 시민권의 개념을 혈통에 두기보다는 정신에 두었지만, 그렇다고 시민권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에 충성 봉사한 사람들이 종종 정부로부터 보상으로 시민권을 받았고, 의사나 교사와 같은 고급인력 또는 로마군단에 입대하여 16년, 20년 혹은 25년간 복무하고 제대해야 받을 수 있었다. 때로는 많은 돈을 주고 사기도 했다.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는 시민권의 개념을 혈통에 두었기 때문에 부모가 둘 다 아테네 시민이 아니면 아테네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아테네 시민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Lykeion)이란 이름으로 후세에까지 알려진 고등학교를 창설하는 등의 아테네 문화수준을 향상시키는 일에 공헌하였지만, 도시국가 아테네는 이 위대한 철학자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유대교에 개종하여 하나님의 선민이 되려고 하는 이방인들에게 개종침례를 받도록 했고, 남자는 추가로 할례를 받도록 요구했다. 또 모세오경에 담긴 613개의 계명과 39가지 범주의 안식일 법을 모두 지킬 것을 서약하도록 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준수나 혈통이나 돈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오직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기만 하면 값없이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오랜 기간 로마군에 종사하거나 돈을 줘야 사는 그런 값비싼 시민권이 아니라, 전혀 돈이 들지 않고 능력도 필요 없는, 값없이 은혜로 받는, 로마시민권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이것이 복음이다.

바울의 사명의식

하나님이 이방인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세전부터 그들의 구원을 계획하고 계셨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도 택한 민족이었던 유대인들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전혀 차별 없이, 유대인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방인들의 구원도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을 이들 이방인의 선교사로 파송하셨다는 강한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그 표현이 1절 하반절,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씀이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고 또 파송 된 사명자이다. 또 여기서 ‘하나님의 복음’이란 에베소서 3장에서 밝힌 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유대인들에 약속하셨던 여러 가지 복들을 함께 참여하고 누리게 하겠다는 기쁨의 소식이다. 이 기쁨의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달하는 사명을 받았는데, 그 사명 감당을 마치 노예가 주인에게 하듯이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함으로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였다. 이 표현은 또 노예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을 때 받게 될 무거운 책임을 의식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빚진 자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바울이 이 일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기쁨의 소식이, 16절을 보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는 값진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노예라서 마지못해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로 여겼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도 우리가 하는 일의 특성과 사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였다. 자기가 누군지, 왜 사는지, 살고 있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직업이 무엇이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자기가 누군지, 왜 보냄을 받았는지, 무엇을 위해 살라는 것인지 등의 소명의식과 사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의식들이 꼭 필요하다. 하나님이 왜 날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 왜 날 아무개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는지, 날 언제 부르셨고, 무슨 사명을 맡기셨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 목적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바울처럼 흔들림이 없는 뿌리 깊은 삶을 살 수 있다. 지루하거나 무료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이런 사람은 심심하거나 외롭다거나 하지 않고 목적 있는 삶을 살기 때문에 하루하루 바쁘게 산다. 부름을 받고 꼭 이뤄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가진 것에 상관없이, 재능에 상관없이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서 소명이 중요하고, 사명의식이 중요하다. 하면 즐겁고, 아무리 많이 해도 질리지 않고, 아무리 많이 해도 또 하고 싶은 일,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또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울은 이 충천한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신령한 은사, 즉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의 선물을, 11절을 보면, 로마인들과 나누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미리 약속된 복음

바리새파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설명한 복음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사와 같은 유대인들이라면 받아드릴 수 없는 주장이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바울이 주장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드리지 못했고, 상황은 지금도 같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이 메시아에 대한 이해의 차이 혹은 해석의 차이였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구약 예언서들에 있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메시아는 유대민족만의, 유대민족을 위한, 유대민족에 의한 모세와 같은 구원자이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영광의 대탈출과 가나안 땅 정복, 모세가 수천 년 전에 이끌었던 제1대구원사건 때처럼, 메시아는 유대인들에게 제2대구원사건을 이끌어야할 모세와 같은 인물이어야 한다. 따라서 메시아는 영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는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며, 십자가에 죽지도 않는다. 메시아는 단지 모세 혹은 모세보다는 기량이 떨어지지만 다윗이나 엘리야와 같은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묶는 지도자요, 가나안 땅을 유대민족의 땅으로 회복시킨 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끌어 모아 예루살렘과 시온에 모이게 하며,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예배를 회복시키며, 세계가 유대교를 국교로 삼고 율법대로 하나님을 믿게 할 인물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메시아를 구약 예언서들에 있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영적으로 해석한다. 유대민족은 물론이고,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로 해석한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 이 분은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인류의 죗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분으로 믿는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구약 예언서들의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영적으로 해석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영적인 것이 즉 하늘의 것이 땅의 것의 실체요 원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땅의 것은 하늘의 것의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지상의 예루살렘과 시온과 성전을 말할 때, 하늘의 예루살렘과 시온과 성전을 말하였으며, 유대인들이 지상의 가나안 땅을 말할 때, 기독인들은 천상의 가나안 땅을 두고 말하였다. 유대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지상의 가나안 땅 회복과 지금의 미국처럼 강력한 유다왕국건설을 위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으나, 기독교인들은 그분이 이미 2천 년 전에 오셨고,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교회에 속한 구원받은 성도들의 메시아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 바울이 2절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 바로 이 영적인 해석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내용이 3-4절의 말씀이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여기서 “그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뜻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며, 죽었다가 부활하지도 않는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민족의 영웅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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