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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16]십자가와 하나님(롬 3: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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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155 2011.06.06 15:10

본문

[롬강16]십자가와 하나님(롬 3:25-26)

왜 십자가를?

로마서 3장 25-26절은 십자가가 인간에게 왜 필요했는가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십자가는 모든 수직과 수평적 만남을 상징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신뢰와 신실함의 만남, 성(聖)과 속(俗)의 만남, 정의와 사랑의 만남, 주인과 노예의 만남, 지배와 피지배의 만남을 상징한다. 여기서 하나님, 신뢰, 성(聖), 정의, 주인, 지배는 수직적이고, 인간, 신실함, 속(俗), 사랑, 노예, 피지배는 수평적이다. 이들 수직과 수평의 만남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깨지고 원수가 된 관계를 회복되고 화목하게 된 관계로 만드는 만남이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정의와 사랑이 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속성을 각각 따로 갖거나 숫자 십일(11)처럼 서로 마주보게 갖지 않으시고, 교차로처럼 혹은 열십자(十)처럼 두 속성, 즉 정의와 사랑이 겹치게 갖고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본래 정의와 사랑은 경쟁적이어서 공존이 쉽지 않다. 사랑이 웃으면, 정의가 울고, 정의가 웃으면, 사랑이 운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도 고민거리가 생겼다. 배반자인 인간을 용서해 주자니, 정의가 희생되고, 죄를 벌하고 징계하자니, 사랑이 희생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해 주는 동시에 그들의 죗값도 함께 치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하셨다. 그 방법이 십자가였다. 하나님이 친히 예수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을 대신해서 벌을 받아 십자가에 죽는 방법이었다. 십자가는 죄인을 징계한다는 측면에서 정의를 실천할 수 있고, 회개한 인간을 용서한다는 측면에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으며, 또 깨진 관계를 회복시켜 화목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지난 2천 년간 십자가는 인간을 살리는 더하기(十) 표식이 되었고, 사람을 살리는 복음(+1)이 되었다.

로마서 3장 26절을 보면,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 중에서 '자기도 의로우시고'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신다'는 구절은 십자가가 인간에게 왜 필요했는가를 알게 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이유가 '자기도 의로우시고,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신 때문'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도 의롭게 하신다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 즉 정의와 사랑을 모두 만족시킬 절묘한 방법이 하나님의 전지하신 지혜에서 나왔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신앙인들은 십자가가 죄인을 위해서만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십자가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십자가가 죄인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의 본질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했다. 하나님도 의롭게 하셨고(Just),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의롭게 하셨다(Justifier).

하나님의 정의의 속성

정의란 단어의 원뜻만 고려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 보복정의든 분배정의든 정의의 원뜻만 고려한다면, 고대근동세계의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대로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출 21:23-25) 갚는 것이 보복정의가 될 것이다. 또 유용성과 실용성에 근거하여 좋은 결과와 성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자들과 능력과 재능을 숭배하고 사유재산권을 엄격하게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사람에게 주는 것이 정의란 개념을 통해서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엄청난 행운이나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의 처참한 불행조차도 분배정의의 실현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본다면,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마 16:27, 롬 2:6, 딤후 4:14, 계 22:12)와 “죄의 삯은 사형이다”(롬 1:32, 6:23)고 말씀하신대로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엄격하게 심판하고 처벌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정의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완전하시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와 허물을 징계하셔야만 한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죄와 허물을 완벽하게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인간은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 심판이 즉시 올 수도 있고, 먼 훗날에 올 수도 있다.

하나님의 정의의 속성은 죄와 허물에 대한 징계를 통해서 만족되어진다. 행한 대로 상벌이 주어지고, 죗값에 사형언도를 내려야 하나님의 정의는 충족되어진다. 부족한 인간의 죄는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저주를 요청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사형을 받으신 것은 정의를 실현시켜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해결책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하신 것은 하나님의 정의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들의 죄를 엄격하게 심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반드시 죗값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정의는 죄를 용납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죗값을 묻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정의롭지 못하시다. 하나님이시라면 죄의 대가를 반드시 지불받게 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정의롭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십자가의 방법을 택하셨고, 대속의 가능성을 지닌 완전한 신(神)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온 인류의 죗값을 대신 받게 하셨다. 이렇게 하셨을 때에 하나님은 의롭게 되실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신앙인들은 십자가가 죄인만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십자가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십자가가 죄인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의 본질을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도 의롭게 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의롭게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하나님의 정의가 죄를 용납지 않고 죗값인 사형을 요구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죄인을 용서하라고 요구한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정의롭고 사법적인 의분을 풀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죗값을 예수님께 지불케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만족시키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자비와 용서와 은혜와 축복이다. 사랑은 죄인이 멸망 받기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로마서 3장 25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시고,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에서 나타났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누구도 멸망 받기를 원치 않는다(벧후 3:9; 딤전 2:4).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서 멸망을 당한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만족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만족되지 않는다. 이런 곤경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도 의로우시고, 또한 하나님을 믿는 자도 의롭게 하실 최선책이 필요했다. 예수님이 인간의 죄 때문에 또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희생양이 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었다. 베드로전서 2장 42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했다. 또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했고,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인간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그가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는 의미는 그가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사랑과 용서로 돌이켜 놓으셨다.

이로써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었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며,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짊어지신 죄의 대가가 그분의 것이 아닌 것과 같다(고후 5:21). 이 큰 축복이 우리에게는 거저 주어진 선물이지만, 하나님께는 그것이 거저가 아니다. 하나님은 값없이 은혜로 사랑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값으로 정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을 외아들을 통해서 치러야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고 우리 죄를 사하셨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누워 떡먹기 식의 값싸고 쉬운 것이 아니라, 의롭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보혈의 대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간구한 죄 사함이 응답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형벌이 치러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형벌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을 얻는다. 우리 죄가 단순히 씻기거나 떨어져나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형벌을 받음으로써 용서되어진 것이다.

<이 오랜 주님의 자비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살길을 찾았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흑암에 앉은 백성들, 목자 없는 양떼처럼 방황하는 무리들, 바람에 흔들리는 상한 갈대 같은 민초들, 폭풍만난 제자들, 소경들, 앉은뱅이들, 문둥병자들, 다섯 남편가진 여인, 38년 된 병자, 혈류증을 앓던 여인 등, 앞 못 보고 걷지 못했던 상하고 찢긴 자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영적인 모습일 수 있다. 주님의 자비를 입었던 자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다. 이 오랜 주님의 자비가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여 우리의 상처가 싸매지고 씻기는 고침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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