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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25]유대인들의 구원문제(롬 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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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160 2011.07.2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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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25]유대인들의 구원문제(롬 9:1-18)

복음전도의 우선순위

로마서 1-8장까지에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설명을 마친 바울은 9-11장에서 오랜 야훼 하나님신앙의 뿌리와 전통을 가진 유대인들의 구원을 심히 염려하였다. 바울은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한다”(1절)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3절)는 말로써 유대인 특유의 애족(愛族)정신과 그들의 구원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가를 피력하였다. 유대인들이 조상대대로 믿어온 민족신 하나님을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고 선포한 바울은, 이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전파하라고 하나님이 자신을 뽑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지만, 복음의 우선순위가 유대인에게 먼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참고. 2:9-10)는 표현을 세 번 사용했다.

바울은 이방나라들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항상 유대인들의 회당을 먼저 찾아갔다. 그 이유는 그곳에 복음을 수용할만한 자들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지만, 동족인 유대인들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수용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나라들의 유대교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행 13:16)는 말로써 시작하였다. 신앙에 관한한 유대인들이 먼저라는 의식이 바울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구원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깨닫는다면, 가장 가까운 친인척과 지인들의 구원을 심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바울이 동족의 구원을 염려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오실 자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오히려 탄압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예수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갖게 해준 모세 이후로 유대인들은 유대교전통을 지켜왔다. 바벨론에 약속의 땅을 빼앗긴 이후 흩어진 유대인들은 가나안회복의 희망(Ha-Tikvah)을 지속적으로 품어왔다. 제2의 모세가 나타나 그들의 한 맺힌 희망을 꼭 이뤄줄 것으로 믿었다. 그 인물, 제2의 모세가 인류의 죗값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요, 그가 회복시킨 가나안땅이 지상나라가 아니고, 천국이라고 했을 때, 또 그 나라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를 못하였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그들의 구원이 전체적인 것이면 바울의 염려는 기우에 불과할 것이지만, 그들의 구원이 개인적이면 바울의 염려는 지극히 타당한 것이 된다. 4-5절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의 특권들, 즉 양자됨(출 4:22, 19:5), 영광(출 16:10, 40:34), 언약들, 율법, 예배, 가나안을 포함한 많은 약속들, 믿음의 조상들과 같은 자랑거리들이 복음을 수용하는데 큰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이 누린 특권이 그들에게 구원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

바울의 입장은 분명하였다.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더욱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란 주장이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았다”(6-8절)고 주장하였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여러 아들들 가운데서 오직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요, 그의 씨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장을 펼친다. 여기까지는 유대인들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자신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며, 하나님의 언약백성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울이 아브라함을 혈통이 아닌 믿음에 의한 조상으로 세우고 있다는데 있다.

이삭과 야곱과 유다가 모두 장자들이 아니었다. 이삭과 야곱은 둘째이고, 유다는 넷째였다. 장자들이 아닌 이들이 유대민족의 조상들이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이요, 아브라함처럼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은데 있다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혈통에 의한 이스라엘의 조상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영적 이스라엘의 조상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문자적이든, 영적이든, 동일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나라들이지만, 혈통에 의한 문자적인 이스라엘은 믿음에 의한 영적 이스라엘의 예표요, 모형이며, 그림자라는 관점에서 유대인들이 누린 특권조차도 하나님의 자비의 선택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사도 바울은 믿음에 의한 의롭다하심의 원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또 아브라함을 믿음에 의한 영적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해서 혈통이나 행위가 아닌 신뢰와 신실의 믿음, 즉 아브라함처럼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는 자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며, 또 그럴 능력과 권한이 있으시다는 입장을 11-18절에서 피력하였다. 하나님이 부르시고(11절), 자비를 베푸신 자(15-16절)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다”(16절)고 주장하였다.

바울은 11-18절에서 하나님께는 선택하실 자유도 있고 버리실 자유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버리신 사람들이 구원을 위한 것이었는지, 도구로 쓰기 위한 것이었는지, 문자적인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는지, 영적인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판별하는데 있다.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려 한 것은 유대민족의 선택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선택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들에게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가나안을 나라로 주신 것에서처럼, 이방인들을 영적인 이스라엘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따른 것이란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혈통에 의한 문자적인 이스라엘의 선택은 영적인 이스라엘의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이며, 단체로 구원을 주기위한 선택이 아니라, 열방선교의 도구가 되게 하려는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 이스라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혈통에 의한 문자적인 이스라엘 백성이고 또 하나님의 자비의 선택을 입은 백성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구에로의 선택과 구원에로의 선택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은 민족과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 관점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는 구원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교의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이다(6-9절).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이삭뿐 아니라, 많은 서자들을(창 25:2) 자손으로 두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을 택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예비하셨고, 이스마엘과 서자들은 이방민족을 형성하도록 내버려두셨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야곱은 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셨으며(10-13절),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셨다(15-16절; 출 33:19). 야곱은 긍휼의 그릇으로, 에서는 진노의 그릇으로 선택되었다. 바로 왕도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으로 선택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구속사역의 도구가 되었다(17-18절; 출 7:3; 9:12, 16; 14:4,17).

참고로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에 있어서,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의 등장은 자기 민족을 선민으로 보는 이스라엘 역사가(歷史家)의 신앙관점에서 본 민족사, 즉 민족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신학적 해석으로 본 역사 또는 민족사관에서 이루어진 신앙고백이란 점이 수용된다면, 문자적인 이스라엘을 위한 이삭과 야곱의 선택, 그리고 이웃 경쟁국을 이룬 이스마엘과 에서의 버림(遺棄) 사상은 충분히 납득이 될 수 있다.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입장에서 선택과 버림을 주장한 칼뱅의 신앙고백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칼뱅이 주장한 선택과 버림은 결과론에 입각한 연역적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결과를 보고 필연 혹은 숙명의 입장에서 하나님 중심의 계시신학을 취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나 우발성이 개입될 여지를 철저히 차단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의 속성을 지지할 뿐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를 주는 강점을 갖고 있으나, 인간의 모든 불행의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 있는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때문에 하나님이 결코 모든 것의 원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에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목적의지도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간이 결정하는 훈계의지도 있으며, 인간이 원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허락의지도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분이시지만, 당신을 낮추시고 제한하시는 분이시며, 피조물을 찾아와 관계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의 제한이다. 피조물은 만들어졌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다. 또 완전하지 못한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완전하지 못함 그 자체가 곧 죄이다. 따라서 주권의 제한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피조물 세계를 두실 수 없으며, 특히 배반을 일삼는 이성적 동물인 인간을 두신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피조물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서 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피조물이 완전하다면 하나님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나님을 모든 결과의 원인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결과에 대한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의 책임을 짊어지듯이, 인간의 책임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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