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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30]삶으로써 드리는 예배(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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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352 2011.08.0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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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강30]삶으로써 드리는 예배(12:1)

하나님의 자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죄악성, 인간육신의 연약함, 구원의 필요성, 율법의 한계와 복음의 풍성함, 구원의 원리, 구원의 근원, 구원의 수단, 구원의 시간, 구원의 목적, 옛 언약공동체인 유대인들의 역할과 신분, 유대인들의 구원, 선택, 예정 등의 믿음과 신학의 문제를 1-11장에서 다룬 후에 12장부터는 “하나님의 자비하심”(12:1)으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권하였다. 그런데 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이고 실천적 삶을 하나님의 자비로 권하였을까?

바울이 로마서 1-11장에서 논증한 복음의 풍성함과 구원의 원리는 하나님의 그 오랜 자비를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구원의 길에 들어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상기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까를 심도 있게 논증하였다.

이 우주에 단 한분밖에 없으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되신다.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으시고, 평등하신 하나님은 오직 믿음만으로 판단하시고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푸신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는 없다. 하나님은 누구도 버리지 않으신다. 집나간 탕자를 아버지가 기다렸듯이 다만 기다리실 뿐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만이 아니라, 죄인과 세리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맏아들만이 아니라, 탕자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만이 아니라, 선택받지 못한 자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잘난 사람만이 아니라, 못난 사람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부자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일등만이 아니라, 꼴찌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어른만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건강한 자만이 아니라, 병든 자의 하나님도 되신다. 하나님은 나만이 아니라, 이웃의 하나님도 되신다. 이것이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에 대한 로마서 이야기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신 하나님의 그 오랜 자비에 관한 논증이 로마서의 내용이다.

오랜 주님의 자비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살길을 찾았다. 흑암에 앉은 백성, 목자 없는 양떼처럼 방황하는 무리, 바람에 흔들리는 상한 갈대 같은 민초, 폭풍만난 제자, 소경, 앉은뱅이, 문둥병자, 다섯 남편가진 여인, 38년 된 병자, 혈류증을 앓던 여인 등, 앞 못 보고, 듣지 못하며, 걷지 못하고, 상하고 헤지고 찢긴 자들이 예수님께 그들의 믿음을 내보였고, 주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영적인 모습일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누구나 차별 없이 값도 없이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만으로 이 주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고,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주님의 자비를 우리 모두가 입었고, 그 은혜 속에서 감격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바울은 주님의 그 오랜 자비를 입고 구원의 길에 들어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로 권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살아있는 제물

그렇다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이다”의 뜻은 무엇인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은 본래 죽여서 가죽을 벗긴 후 각을 떠서 바쳤다. 그런데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다. 무슨 뜻인가? 너희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써 바치라는 이 말씀은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삶으로써 드리는 예배와 관련된 말씀이다. 이 예배를 바울은 거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행위로 정의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바울이 경계한 율법의 행위와 혼돈할 수 있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경계한 것은 율법의 행위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이 구원의 수단으로써는 무가치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노력은 헛수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무로써가 아니라, 사랑과 감사와 자원함으로써 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차별 없이 선물로 주신 구원의 목적이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다”(7:4)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위의 삶이요, 수고와 노동의 삶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라고 했다. 더 이상 사망의 열매를 맺어서는 안 된다(7:5-6). 사망의 열매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것들이다”(갈 5:19-21)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는 방법은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히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생활로써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면, 우리는 본래적 목적인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한다. 로마서 7장 5-6절을 보면, 우리를 얽매였던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타율)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자율)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조문의 묵은 것(타율)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영의 새로운 것”과 성령의 법을 따르는 것은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하여 본래적 목적인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으려 하기 때문에 동기가 순수하지만, 율법을 따르는 것은 아직 받지 못한 것을 받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적이고 계산적이므로 동기가 불순하다. 철학자 칸트에 따르면, 동기가 순수한 것이 자율적인 것이고, 동기가 불순한 것이 타율적이다. 만일 우리 기독교인들이 본래적 신앙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거나 하나님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거나 이웃을 섬김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성질에 따라 타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는 것이 될 수 없다.

값싼 은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그 오랜 자비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는 교회에서조차 폭행, 고소고발, 헌금유용, 성추행과 같은 사건들이 공공사회에 노출되고 있어서 존경의 대상이었던 기독교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오직 믿음만을 외치면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율법의 행위로 간주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취급한데서 만들어진 부산물이다.

본회퍼는 짐승 같은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하던 암울한 시기를 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기를 힘썼던 실천적 인물이었다.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마 8:21)는 결단을 미루는 제자가 아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를 나를 따르라”(마 8:22)는 주님의 말씀에 즉시 결단하는 참 제자로 살려고 힘썼던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산상수훈을 연구하였고, 평화주의를 성찰하였으며, 날마다 성구를 묵상하고,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엄격한 경건실천에 힘썼다. 본회퍼는 예수님 중심의 신학을 하면서 예수님을 본받는 일에 가치를 두었으며, 교회도 그리스도를 본받느냐 마느냐에 따라 평가하였다. 그는 “교회는 늘 참인 원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참인 계명을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늘 참인 것이 오늘 참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늘 오늘의 하나님이시다.”고 하였다.

본회퍼는 그가 세운 핑켄발데신학원(1935-37)에서 목사후보생들에게 개신교가 중독되어버린 값싼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값비싼 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쳤다. 그는 또 1937년에 출간된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설파하였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은혜, 헐값의 용서, 헐값의 위로, 헐값의 성만찬이다. 그것은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몰지각한 손으로 생각 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이다. 그것은 대가나 값을 치르지 않고 받은 은혜다....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세상은 자신의 죄를 감싸줄 값싼 덮개를 값싼 교회에서 얻는다.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을 부정한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 함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함이다.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모든 것이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 까마귀처럼 우리는 싸구려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그 시체의 독을 받아마셨다. 그 결과 예수를 본받는 삶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 은혜에 관한 교리가 비할 데 없이 신격화되어 그 교리가 하나님 자체, 은혜 자체가 되어 버렸다.... 한 민족이 기독교인이 되고 루터교도가 되었지만,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고 가장 싼값을 치러서 된 것이다..... 오늘날 헐값에 얻은 은혜의 필연적인 결과로 제도권 교회가 붕괴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치러야할 대가가 아니겠는가?

이처럼 본회퍼가 잘 지적한 것처럼, 삶으로써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실만한 영적 예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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