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눅 4: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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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눅 4:14-30)
예수님의 경험
하버드대의 하비 콕스 교수는 <예수 하버드에 오다>에서 “위대한 많은 영웅호걸 중에서 학생들이 정말 찾고 싶어 하는 이들은 신뢰할 만한 윤리적 영웅들이었다.”고 말한다. “예수는 분명 가난한 자들 편에 서고, 힘센 자들에게 진리를 말하고, 그의 확신 때문에 치러야할 값을 즐겨 치르려고 한 힘 있는 윤리적 모법이었다.”고도 했다.
간디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가르치는 분이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가르친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분이셨다. 예수님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인 로마의 황제나 헤롯 대왕 또는 대제사장이 윤리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진정한 윤리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확신을 도발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지배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예수님이 짧은 공생애 기간에 배척을 받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사렛 회당의 청중들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 17-19절, 즉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의미를 해설하셨을 때만 해도 목수의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모두 감탄하였다. 그러나 23-27절의 말씀을 이어가셨을 때 사람들은 크게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굉장한 반전이었다. 그러면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께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희년 혹은 ‘주의 은혜의 해’의 혜택을 과연 누가 받을 것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 때문이었다.
레위기 25장 8-12절과 신명기 15장 1-5절에 나오는 ‘희년’ 혹은 ‘주의 은혜의 해’란 과격한 개혁 또는 총체적인 경제적 재분배를 말한다. 종들은 자유를 얻고, 모든 부채와 채무는 탕감되며, 저당 잡힌 토지는 본래의 소유주에게로 돌아가고, 모든 경작지는 일 년간 쉬게 하는 제도이다. 가진 자는 더욱 많이 가지게 되고, 갖지 못한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겨 빈털터리가 되기 때문에 갖지 못한 자들에게 50년마다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희년제도는 성경에나 있는 이상(理想)이었을 뿐이지, 실제로 실천되지 못한 죽은 제도였다. 그리고 가진 자들은 그것이 실행되지 않고 이상으로만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수의 아들인 주제에 무슨 권한으로 희년을 선포한단 말인가? 대제사장만이 할 수 권한인데, 자기가 누구기에 이런 혁명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분명 예수님을 향해서 분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빚에 쪼들리던 사람들, 자기 땅이 없는 농사꾼들, 노예와 같이 갖지 못한 자들은 희년을 실시하면 크게 혜택을 누릴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예수님이 그러한 희년의 축복을 맞이할 자들이 유대인들이 아니고, 사렙다의 과부나 시리아의 나아만과 같은 이방인들일 수 있다고 말씀하신데 있다. 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대로, 갖지 못한 자들은 갖지 못한 자들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가 치솟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로 볼 때, 희년 혹은 ‘주의 은혜의 해’를 맞이할 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는 자들이고, 삶 속에서 희년의 선포를 윤리강령으로써 실천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희년의 선포를 윤리강령으로써 실천하는 일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 누구든지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마치 그 때가 이미 온 것처럼 실천하면 ‘주의 은혜의 해’가 이미 그에게 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개혁(改革)과 실천
예수님은 정치 사회 종교의 개혁을 주장한 떠돌이 예언자였기 때문에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하셨다. 북쪽지방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셨고, 중부지방 사마리아에서 배척을 당하셨으며, 남부지방 예루살렘에서조차 배척을 당하시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완전 실패였다. 그러나 그분의 ‘실패’는 ‘성공’에 중독된 세속문화 속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 성공이란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비폭력의 선언이요, 모든 폭력과 착취와 전쟁과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의 죽음을 선포하는 조종(弔鐘)이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항상 준비하라는 엄중한 사이렌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동터오는 새로운 질서를 예고하는 전령이었다. 정의와 평화가 물결치고 윤리와 도덕적 실천들이 범람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자유의 종소리였다. 그것은 다가올 천국잔치를 미리 맛보고 체험하는 선취(先取)시대를 알리는 청첩장이었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기대와 희망이 이뤄지고 성취될 마지막(종말 또는 희년) 시대의 출범을 알리는 웅장한 팡파르였다.
예수님의 개혁의 절정은 유월절 절기를 앞둔 마지막 한 주간 예루살렘에서 보내신 때 일어났다. 예수님은 비천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특권층의 성지요, 기득권 세력의 권좌요, 로마 점령군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돌진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비폭력 저항을 유감없이 발휘한 도전이었다. 이후 예수님은 일주일도 못 살고 사형에 처해졌다. 나귀를 탄 예수님의 모습은 가진 자들과 세도가들의 눈에 조롱과 모욕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오히려 그들과 세속에서 최고의 권세를 가진 황제의 권위를 풍자하고 비웃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짐승 파는 일과 돈 바꾸는 일로 떼돈을 벌던 협잡꾼들을 뒤집어엎기 위해서 성전에 들어가셨다. 사실 이런 것들은 순례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기위한 것이었다. 또 유대인 성인이면 누구나 다 어느 나라에 살든지 상관없이 로마황제의 화상(畵像)이 새겨지지 아니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했다.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 돈을 바꿔주고 있었다. 이런 편의 시설이 있던 곳이 이방인의 뜰이었는데, 성전에서는 유일하게 이방인들도 제한 없이 출입할 수 있는 광장이었다. 유월절이면 이곳은 제물구입과 환전을 하려는 순례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성전 뜰에서 이뤄지는 모든 상업행위는 대제사장에게 비싼 자릿세를 내야했을 것이다. 따라서 제물로 바칠 동물이 매우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을 것이고, 환전수수료도 턱없이 높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이유가 성전에서 이뤄지는 이런 부당한 매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배는 정직한 예배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짐승들을 성전 뜰에서 내어 쫓으셨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셨으며,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고함치셨다. 가히 혁명적이었다. 통수권자인 대제사장의 수입 또는 성전수입을 차단하는 행위는 반역행위였다. 그가 과연 누구기에 이런 일을 하는가라는 것이 그를 바라본 사람들의 시선 속에 담긴 질문이었다.
예수님의 이상(理想)
예수님의 화두(話頭)는 회개, 사랑, 용서, 천국이었다. 앞의 세 가지는 천국의 시작과 발전을 가져올 도덕률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3-48). 형제를 용서하라(마 18:21-35). 회개하라(마 4:17)는 우리의 삶속에 천국을 끌어드릴 원동력이다. 기도와 성령충만은 개인 구원에 필요하지만, 사랑과 용서는 사회구원에 필요하다. 심령천국도 중요하지만, 가정과 교회와 사회천국도 중요하다. 심령천국이 아무리 잘 이뤄졌다 해도 회개가 없고 사랑이 없으며 용서가 없다면, 진정한 천국이 이뤄질 수 없다.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따라서 나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이뤄져야할 것이 천국이다.
예수님의 이상세계는 천국(天國) 곧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였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이 도래하였음을 산상수훈을 비롯한 수많은 천국복음을 통해서 선포하셨다. 이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게 될까를 설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그때가 마치 이미 도달한 것처럼 윤리적으로 살라는 천국 삶에로의 초청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 훗날 갑자기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비록 조금씩이지만, 그것은 지금 여기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무작정 기다리며 기도만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윤리적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이 우리 가운데 임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레오 톨스토이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런 내용(산상수훈)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주장하였고, 마하트마 간디는 자기의 진리탐구(사티아그라하)를 위한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복음은 로마인들의 귀에는 일종의 반역행위에 가까웠다. 로마제국의 명예와 합법성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주장은 로마가 평화를 이루는 자라는 것이었다. 로마는 신성의 지배자 로마 황제의 대범한 후원 아래 ‘로마의 평화’(pax romana)유지하고 있었다. 신이라고 주장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공식 칭호들 가운데 하나는 ‘평화를 가져오는 자’였다. 로마 군대는 이 평화를 이루고 보장하는 집단으로써 제국의 신민들은 이를 지극히 고마워하고 이에 따라 엄청난 세금도 즐겨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pax)는 전쟁과 죽임과 착취와 탄압의 대가로 얻어지는 잠정적인 평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한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pax)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는 샬롬(shalom)이었다. 이 샬롬은 하버드대의 하비 콕스 교수의 말대로, “황제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강제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평화”였다. 이 평화는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진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얻어진 평화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천국복음은 거짓 평화에 대한 강력한 선전포고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온 몸을 던져 천국운동을 펼쳤다. 예수님은 이 운동의 가치를 목숨보다 높게 평가하셨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소유할 가치가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운동의 가치를 짧지만 전 생애를 통해서 나타내 보이셨고, 그 보상으로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는 영광을 차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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