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아파하는 하나님(막 10:35-38, 14:32-36)
본문
함께 아파하는 하나님(막 10:35-38, 14:32-36)
예수님은 종교부분 혹은 영성부분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셨다. 심지어 그분은 우리에게는 없는 신성을 가진 분이셨다. C. S. 루이스가 그의 고통의 문제에서 밝힌 것처럼, 신성(Numinose)이란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령한 힘과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는 도덕의 수호자”이다. 그 신성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란 ‘세상을 구원할 자’란 뜻이다. 위대한 신이 인간으로 변신 혹은 계시하는 사례는 그리스로마 신화뿐 아니라 구약성서에서도 흔하게 발견되는 일이지만, 위대한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한 세대를 인간으로 살다간 사건은 전무후무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성육신’이라 부르는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한 가장 위대한 구원사건이다. 이 사건이 인류에게 끼친 긍정의 효과는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양의 정신문명사이고, 바울과 같은 성인들의 일생이며, 바로 여러분과 나의 일생이다.
그런데 이 위대한 성육신 사건의 절정이, 대권을 탈환한 정치마당이나 대승을 거둔 군사마당에서 발생되지 않고, 예수님이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땅바닥에 꿇어앉아 가슴을 쥐어짜는 고뇌에 찬 기도를 올린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타났다. 예수님에게도 십자가형벌은 가혹한 것이었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토록 어둔 밤이 찾아올 것을 알고 지내온 세월이 3년이 넘었으니까 이 날의 고통이 단순히 이 한날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날 예수님께서는 심히 놀랐고, 슬퍼하셨으며, 마음이 심히 고민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고통은 이렇게 예수님한테도 피를 말리고 살이 떨리게 하는 아픔이었다. 하물며 우리와 같은 보통의 사람에게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는가?
문제는 이 엄청난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예수님이 겪었다는 점에서 그분이 겪었던 고통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고통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겪는 아픔을 친히 겪었던 것이고 우리가 겪는 아픔과 고뇌를 대신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이 핏방울이 되고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도록 간구한 예수님의 기도를 철저하게 외면하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걷겠다고 따라 나선 제자인 우리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구했던 그런 세속적인 욕망의 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유대인들이 구했던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이 필요한 때이다. 세속적인 권세를 구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던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에게 “너희가 마시고 있는 고난의 잔을 내가 너희와 함께 마시는 것처럼 너희도 내가 마시는 고난의 잔을 나와 함께 마실 수 있겠느냐? 너희가 겪고 있는 고통을 내가 너희와 함께 겪는 것처럼 너희도 내가 겪는 고난을 나와 함께 겪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살인처럼 죄가 되는 악이 있고, 암처럼 죄가 되지 않는 악도 있다. 고통은 아픔이지 죄는 아니다. 죄는 결과가 항상 나쁘지만, 고통은 결과가 항상 나쁘지 않다. 예수님이 겪은 고통이 지난 2천년 동안 셀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었듯이, 예수님이 겪은 고통의 결과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긍정의 효과를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고통들 가운데는 부정의 효과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 부분에서는 긍정의 효과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악과 고통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고통이 주는 긍정의 효과에 초점을 맞추느냐, 고통이 주는 부정의 효과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있다. 불신자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고통을 만나면 하나님을 찾는다. 그들은 평소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다가 고통에 직면하게 되면, 그 고통이 주는 부정의 효과만을 부각시키면서 서슴없이 신성을 모독한다. 불신자들의 문제점은 현실을 항상 부정적으로 보고 누리고 있는 복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데 있다. 그러나 신자들은 현실을 항상 긍정적으로 보고 누리고 있는 복에 대해서 감사한다. 사실 이 세상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더 많다. 좋은 것은 세어보지 않고, 왜 나쁜 것만 세어보는가? 장미꽃과 향기는 보지 않고, 왜 가시만 보는가? 장미의 가치는 꽃에 있지, 가시에 있지 않다. 죤 탈 머프리(Jon Tal Murphree)는 인생의 수수께끼와 해답(A Loving God & A Suffering World)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별들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가시들을 세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전쟁보다도 평화가, 추함보다도 아름다움이 더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왜 우리는 미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사랑을 쳐다보기를 잊어버리며, 또한 슬픔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쁨의 노래 소리에는 귀를 막아야 하는가? 세계에는 그림자가 있는 만큼 빛이 존재한다. 악덕이 있는 만큼 미덕이 존재한다. 우리들의 감각은 우리에게 고통보다도 기쁨을 더 느끼도록 기회를 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좋은 것을 위한 것이지 나쁜 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눈은 보라고 있는 것이지, 맹인이 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귀는 들으라고 있는 것이지, 귀머거리가 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은 신선한 공기를 위해 있는 것이지, 태풍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햇빛은 동식물에 건강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일사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보시기에 좋았듯이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지 나쁜 것이 아니다.
고통의 문제를 오해하는 시각은 신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공리주의, 실용주의, 실증주의의 시각 때문이다. 안락함은 선이고, 고난은 악이다. 부유함은 선이고, 가난함은 악이다. 건강함은 선이고 병듦은 악이다. 강함은 선이고, 약함은 악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고통 없는 삶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게 하고, 잘살고 성공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믿게 한다. 심지어 고통의 존재가 하나님의 무능함과 부재함을 증명한다고 말하게 한다.
그러나 고통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인간들의 반역을 치유하는 도구이다. 고통은 인간의 교만을 치유한다. 고통은 인간의 욕심을 치유한다. 고통은 속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을 바라보게 한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목마른 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핍박받는 자가 복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지성과 감성과 자유의지와 관계성이다. 그런데 피조물은 숙명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만일 완전하다면 신이지 더 이상 피조물이 아니다. 그런 피조물에게 지성과 감성과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 되게 만드는 것이면서 동시에 히틀러와 같은 마귀를 만드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자연세계에 일정한 질서 즉 자연법칙을 주신 것은 예측과 대응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의 발달을 가능케 하는 것이면서 필연적으로 홍수와 가뭄, 태풍과 산불 같은 자연재해와 질병과 같은 것들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에는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상당부분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재난들이다. 술 취한 사람이 저지른 교통사고의 원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탓이겠는가?
인간에게 지성, 감성,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것이 없다면, 기계나 동식물이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게 된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상당 부분이 어느 특정인의 잘못은 아닐 수 있어도 고통은 모두 인간이 만든 부산물이다. 그 불행이 왜 하필 나에게 닥쳤느냐는 것이 우리가 토해내는 장탄식이다. 예를 들면, 지나가는 트럭이 튕겨낸 돌이 왜 하필 나에게 날아왔느냐는 식이다. 그래서 불행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돌봐줄 수 없는 탓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오로지 명령에만 따라야하는 기계로 살기를 원치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자유는 주되, 잘못된 것을 선택할 때마다 간섭하시고 제지하시며 내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만을 선택하도록 조종하신다면 어떻겠는가? 마치 부모가 자녀들의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듯이 말이다. 우리 모두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남의 간섭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강제적인 하나님의 간섭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하나님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이었고, 그럴 바에는 인간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악과 고통은 선택의 자유를 누린 인간의 그릇된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악과 고통이 인간에게 항상 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악과 고통을 통해서 선과 쾌락을 배우게 하셨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다면, 고통도 없겠지만, 동시에 동정심도 미움도 사랑도 슬픔도 위로도 없을 것이다. 자유가 없다면, 위험이 없겠지만, 용기도 영웅심도 없을 것이다. 자유가 없다면, 친절도 용서도 없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선과 악, 쾌락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만일 쓴 맛을 모른다면, 단 맛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절망이 크면 클수록 기쁨과 소망도 커진다. 고통은 인간에게, 헤라클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영웅이 될 기회를 준다.
비와 공기와 햇빛이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듯이, 물질은 사용되기 전까지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는 그것이 자연법칙이든 물질이든 본래적으로 나쁜 것은 없다.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 칼이 기능공의 손에 들리면 제작도구가 되지만, 살인마의 손에 들리면 살인도구가 된다. 하나님은 악과 고통을 만들지 않으셨지만,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같은 것들을 부산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부산물조차도 인간이 책임져야할 일을 배우고 창조적 인간이 되게 하는 도구가 되도록 하셨다.
조지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고난을 면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난이 자신의 고난과 같은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셨다.”
엘리에 비젤은 유태인으로서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수용소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책으로 써냈는데, 그의 책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많은 유태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을 교수형에 처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다. 교수대의 밧줄이 내려와 목에 감기자 나이 많은 노인은 곧바로 숨이 끊어졌다. 그런데 어린 소년은 쉽게 죽지 않고 밧줄에 목이 매달린 채 20여분 이상 발버둥치는 것이었다. 이런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수용소의 유태인들이 여기저기서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하나님은 정녕 우리를 버리셨고 떠나셨단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때 엘리에 비젤의 마음속에 헤집고 들어오는 음성이 있었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저 교수대에 매달린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려 있고, 저 소년과 함께 아파하며 고통당하고 있다.”
엔도 슈사쿠는 그의 소설 침묵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였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존재하시는 목적이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분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통증에는 진통제나 교감신경 파괴와 같은 의술의 도움이 약이 되지만, 고통에는 사랑이 약이다. 인간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이고, 가족 친지 교우 친구 이웃의 사랑과 관심과 기도는 고통에 가장 효과가 큰 치료약이다. 사랑을 나누면 나눌수록 고통은 줄어든다.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주간 내내 가슴 속 깊이 느껴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은 종교부분 혹은 영성부분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셨다. 심지어 그분은 우리에게는 없는 신성을 가진 분이셨다. C. S. 루이스가 그의 고통의 문제에서 밝힌 것처럼, 신성(Numinose)이란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령한 힘과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는 도덕의 수호자”이다. 그 신성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란 ‘세상을 구원할 자’란 뜻이다. 위대한 신이 인간으로 변신 혹은 계시하는 사례는 그리스로마 신화뿐 아니라 구약성서에서도 흔하게 발견되는 일이지만, 위대한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한 세대를 인간으로 살다간 사건은 전무후무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성육신’이라 부르는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한 가장 위대한 구원사건이다. 이 사건이 인류에게 끼친 긍정의 효과는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양의 정신문명사이고, 바울과 같은 성인들의 일생이며, 바로 여러분과 나의 일생이다.
그런데 이 위대한 성육신 사건의 절정이, 대권을 탈환한 정치마당이나 대승을 거둔 군사마당에서 발생되지 않고, 예수님이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땅바닥에 꿇어앉아 가슴을 쥐어짜는 고뇌에 찬 기도를 올린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타났다. 예수님에게도 십자가형벌은 가혹한 것이었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토록 어둔 밤이 찾아올 것을 알고 지내온 세월이 3년이 넘었으니까 이 날의 고통이 단순히 이 한날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날 예수님께서는 심히 놀랐고, 슬퍼하셨으며, 마음이 심히 고민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고통은 이렇게 예수님한테도 피를 말리고 살이 떨리게 하는 아픔이었다. 하물며 우리와 같은 보통의 사람에게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는가?
문제는 이 엄청난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예수님이 겪었다는 점에서 그분이 겪었던 고통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대신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고통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겪는 아픔을 친히 겪었던 것이고 우리가 겪는 아픔과 고뇌를 대신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이 핏방울이 되고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도록 간구한 예수님의 기도를 철저하게 외면하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걷겠다고 따라 나선 제자인 우리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구했던 그런 세속적인 욕망의 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유대인들이 구했던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이 필요한 때이다. 세속적인 권세를 구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던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에게 “너희가 마시고 있는 고난의 잔을 내가 너희와 함께 마시는 것처럼 너희도 내가 마시는 고난의 잔을 나와 함께 마실 수 있겠느냐? 너희가 겪고 있는 고통을 내가 너희와 함께 겪는 것처럼 너희도 내가 겪는 고난을 나와 함께 겪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살인처럼 죄가 되는 악이 있고, 암처럼 죄가 되지 않는 악도 있다. 고통은 아픔이지 죄는 아니다. 죄는 결과가 항상 나쁘지만, 고통은 결과가 항상 나쁘지 않다. 예수님이 겪은 고통이 지난 2천년 동안 셀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었듯이, 예수님이 겪은 고통의 결과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긍정의 효과를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고통들 가운데는 부정의 효과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 부분에서는 긍정의 효과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악과 고통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고통이 주는 긍정의 효과에 초점을 맞추느냐, 고통이 주는 부정의 효과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있다. 불신자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고통을 만나면 하나님을 찾는다. 그들은 평소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다가 고통에 직면하게 되면, 그 고통이 주는 부정의 효과만을 부각시키면서 서슴없이 신성을 모독한다. 불신자들의 문제점은 현실을 항상 부정적으로 보고 누리고 있는 복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데 있다. 그러나 신자들은 현실을 항상 긍정적으로 보고 누리고 있는 복에 대해서 감사한다. 사실 이 세상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더 많다. 좋은 것은 세어보지 않고, 왜 나쁜 것만 세어보는가? 장미꽃과 향기는 보지 않고, 왜 가시만 보는가? 장미의 가치는 꽃에 있지, 가시에 있지 않다. 죤 탈 머프리(Jon Tal Murphree)는 인생의 수수께끼와 해답(A Loving God & A Suffering World)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별들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가시들을 세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전쟁보다도 평화가, 추함보다도 아름다움이 더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왜 우리는 미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사랑을 쳐다보기를 잊어버리며, 또한 슬픔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쁨의 노래 소리에는 귀를 막아야 하는가? 세계에는 그림자가 있는 만큼 빛이 존재한다. 악덕이 있는 만큼 미덕이 존재한다. 우리들의 감각은 우리에게 고통보다도 기쁨을 더 느끼도록 기회를 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좋은 것을 위한 것이지 나쁜 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눈은 보라고 있는 것이지, 맹인이 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귀는 들으라고 있는 것이지, 귀머거리가 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은 신선한 공기를 위해 있는 것이지, 태풍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햇빛은 동식물에 건강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일사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보시기에 좋았듯이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지 나쁜 것이 아니다.
고통의 문제를 오해하는 시각은 신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공리주의, 실용주의, 실증주의의 시각 때문이다. 안락함은 선이고, 고난은 악이다. 부유함은 선이고, 가난함은 악이다. 건강함은 선이고 병듦은 악이다. 강함은 선이고, 약함은 악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고통 없는 삶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게 하고, 잘살고 성공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믿게 한다. 심지어 고통의 존재가 하나님의 무능함과 부재함을 증명한다고 말하게 한다.
그러나 고통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인간들의 반역을 치유하는 도구이다. 고통은 인간의 교만을 치유한다. 고통은 인간의 욕심을 치유한다. 고통은 속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을 바라보게 한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목마른 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핍박받는 자가 복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지성과 감성과 자유의지와 관계성이다. 그런데 피조물은 숙명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만일 완전하다면 신이지 더 이상 피조물이 아니다. 그런 피조물에게 지성과 감성과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 되게 만드는 것이면서 동시에 히틀러와 같은 마귀를 만드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자연세계에 일정한 질서 즉 자연법칙을 주신 것은 예측과 대응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의 발달을 가능케 하는 것이면서 필연적으로 홍수와 가뭄, 태풍과 산불 같은 자연재해와 질병과 같은 것들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에는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상당부분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재난들이다. 술 취한 사람이 저지른 교통사고의 원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탓이겠는가?
인간에게 지성, 감성,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것이 없다면, 기계나 동식물이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게 된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상당 부분이 어느 특정인의 잘못은 아닐 수 있어도 고통은 모두 인간이 만든 부산물이다. 그 불행이 왜 하필 나에게 닥쳤느냐는 것이 우리가 토해내는 장탄식이다. 예를 들면, 지나가는 트럭이 튕겨낸 돌이 왜 하필 나에게 날아왔느냐는 식이다. 그래서 불행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돌봐줄 수 없는 탓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오로지 명령에만 따라야하는 기계로 살기를 원치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자유는 주되, 잘못된 것을 선택할 때마다 간섭하시고 제지하시며 내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만을 선택하도록 조종하신다면 어떻겠는가? 마치 부모가 자녀들의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듯이 말이다. 우리 모두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남의 간섭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강제적인 하나님의 간섭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하나님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이었고, 그럴 바에는 인간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악과 고통은 선택의 자유를 누린 인간의 그릇된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악과 고통이 인간에게 항상 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악과 고통을 통해서 선과 쾌락을 배우게 하셨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다면, 고통도 없겠지만, 동시에 동정심도 미움도 사랑도 슬픔도 위로도 없을 것이다. 자유가 없다면, 위험이 없겠지만, 용기도 영웅심도 없을 것이다. 자유가 없다면, 친절도 용서도 없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선과 악, 쾌락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만일 쓴 맛을 모른다면, 단 맛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절망이 크면 클수록 기쁨과 소망도 커진다. 고통은 인간에게, 헤라클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영웅이 될 기회를 준다.
비와 공기와 햇빛이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듯이, 물질은 사용되기 전까지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는 그것이 자연법칙이든 물질이든 본래적으로 나쁜 것은 없다.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 칼이 기능공의 손에 들리면 제작도구가 되지만, 살인마의 손에 들리면 살인도구가 된다. 하나님은 악과 고통을 만들지 않으셨지만,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같은 것들을 부산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부산물조차도 인간이 책임져야할 일을 배우고 창조적 인간이 되게 하는 도구가 되도록 하셨다.
조지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고난을 면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난이 자신의 고난과 같은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셨다.”
엘리에 비젤은 유태인으로서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수용소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책으로 써냈는데, 그의 책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많은 유태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을 교수형에 처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다. 교수대의 밧줄이 내려와 목에 감기자 나이 많은 노인은 곧바로 숨이 끊어졌다. 그런데 어린 소년은 쉽게 죽지 않고 밧줄에 목이 매달린 채 20여분 이상 발버둥치는 것이었다. 이런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수용소의 유태인들이 여기저기서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하나님은 정녕 우리를 버리셨고 떠나셨단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때 엘리에 비젤의 마음속에 헤집고 들어오는 음성이 있었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저 교수대에 매달린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려 있고, 저 소년과 함께 아파하며 고통당하고 있다.”
엔도 슈사쿠는 그의 소설 침묵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였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존재하시는 목적이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분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통증에는 진통제나 교감신경 파괴와 같은 의술의 도움이 약이 되지만, 고통에는 사랑이 약이다. 인간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이고, 가족 친지 교우 친구 이웃의 사랑과 관심과 기도는 고통에 가장 효과가 큰 치료약이다. 사랑을 나누면 나눌수록 고통은 줄어든다.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주간 내내 가슴 속 깊이 느껴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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