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의 현재적 부활체험(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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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현재적 부활체험(고전 15:1-11)
겁쟁이들이었고, 배신자들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토록 능력 있는 사람들로 탈바꿈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을까? 그들로 하여금 복음전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한 힘이 무엇이었을까? 한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먹게 하는 표적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랐고, 왕이 되어 그들의 세속욕망을 채워주길 바랐던 속물들이었다. 머지않아 그들은 예수님이 만나를 내려 먹게 하지도 않고, 왕위에 올라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주실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 거는 희망이 컸던 만큼 실망이 컸다. 희망은 좌절로 바꿨다.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열광했던 민중이 채 몇 날도 못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흥분하는 것도 지켜봤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했고, 도망했으며, 가룟 유다의 음모에 동참했을 가능성도 있다.
예수님의 활동초기에는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속욕망을 채워줄 정치군사적 메시아로 추앙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 되어 예수님이 그들의 바램을 이뤄줄 속칭 영웅이 되지 못할 자란 것을 알고 대부분 예수님 곁을 떠났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 거는 기대를 아주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기대감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예루살렘에 나타났을 때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군사적 메시아가 되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셨다. 그리고 그 며칠 사이에 정치적 음모와 타협과 배신이 암암리에 이뤄졌다. 그 중심에 열두 제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돌변했다. 스승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한 배신자들이었고, 비겁자들이었던 제자들이 갑자기 변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 있는 자들로 바꿨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머리가 땅을 향한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님이 왕위에 오른 후에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했던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목 베임을 당했고, 요한은 노년에 밧모의 채석장에 유배되었다. 그 밖의 제자들도 모두 영웅적 삶을 살았다.
과연 그들은 변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변모하였다. 이 큰 변화의 원인이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오순절의 성령임재사건에 있다는 것이 보편적인 결론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제자들에게 부활체험을 갖게 했는데 이것을 일컬어 현재적 부활체험이라 말한다. 현재적 부활체험이란 영혼구원을 말하기도 하고, 삶의 태도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말하기도 한다. 동굴무덤에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와 동일한 육체부활을 약속하셨다. 이 육체부활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있을 미래부활이다. 예수님께서 체험하신 부활이 육체부활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상이 사장되고 않고, 깨달아지고 교회출범과 성서기록을 통해서 널리 전파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현재적인 부활을 체험하고 계시다. 한 때 제자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다. 그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재물과 명예와 권세였다. 영적세계나 정신세계로 볼 때 그들은 죽었던 자들이다. 그랬던 자들이 더 이상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진정한 부활체험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부활사건, 오순절 성령임재사건을 차례로 겪으면서 현재적 부활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부활체험이 그들로 하여금 이전과는 180도 다른 사람들로 변모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부활체험이 역으로 스승의 고귀한 죽음을 본받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들이 체험한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첫째,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능력과 지혜가 크다는 깨달음이었다.
기독교를 적대하는 반기독교연합에서는 제자들의 영웅적 순교가 오히려 하나님이 없거나 있다 해도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자신들의 세속욕망을 채워줄 수 없는 무능함과 무지함을 본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죽음을 개죽음이라고 말한다. 한때는 제자들도 이들과 크게 다른바가 없었다. 그런데 스승의 죽음과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임재사건을 차례로 겪으면서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아파하셨고, 함께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하나님이 동일하게 그들과 함께 그들의 고통 중에 계시고 그들이 아파할 때 그들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다. 깨닫기 전에는 이 사랑을 현실의 고통에 무력하고 무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표적을 구하던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싫어하고, 지혜를 찾던 헬라인들이 어리석게 생각했던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능하고 무지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있고난 후에는 그것이 영적이든 정신적이든 혹은 육체적이든 죽었던 사람을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째, 엔도 슈사쿠는 그의 예수의 생애와 예수 지하철을 타다에서 제자들의 변모의 원인을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동반자의식에서 찾고 있다.
엔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남긴 그 유명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괴로움을 호소한 것이 아니라, 성구 또는 기도문을 외우신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일상사였다. 운명직전에 남기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시편 22편 1절과 31편 5절의 내용으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시편을 중얼중얼 암송하시면서 그 엄청난 고통을 견디셨던 것이다. 그 가운데 몇 소절이 목격자들의 귀에 들렸던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보인 예수님의 태도는 제자들에게 충격적이었다. 예수님은 배신자들과 박해자들을 원망하지 않고, 용서와 사랑으로 일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격자들의 귀에 들린 이 기도는 상상을 초월한 무한 사랑이었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조차 배신자요 비겁자인 제자들을 필사적으로 사랑하셨다. 엔도는 이 스승의 사랑이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예수님은 죽었지만, 늘 자기들 곁에 계시다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감정이 제자들에게 생겨났을 것이고, 생전에 들려주시던 말씀을 지금도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동반자의식이라고 말한다. 이 동반자의식은 오순절 성령임재이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신앙의 발전에 기여했을 것이다.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임재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른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임재사건이 있고난 후부터 현저하게 달라졌다. 사상과 태도에 변화가 왔다. 그동안 땅에 두었던 소망을 하늘에 두었고, 일시적이고 유한한 세속욕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였다. 일신의 안일과 안락을 위해서 보물을 땅에 쌓으려하지 않고, 하늘에 쌓기를 소망하였다. 제자들은 부활사건과 성령임재사건이후 비로소 땅의 것보다, 세속적인 것보다, 일시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것보다 더 높고 더 넓고 더 깊고 영원한 것, 저 하늘의 것, 영적인 것이 참이요 실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땅의 것을 하늘의 것의 모형과 그림자와 예표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참인 하늘의 것에로 모든 채널을 맞췄다. 그들은 더 이상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비난과 추방 그리고 순교 말고는 얻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금전적인 이익은 확실하게 없었다. 만약에 그들이 조금치라도 이득을 취하려했다면, 그들은 그들이 이전에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그와 함께했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인가 그들이 체험한 충격적인 사실과 다시는 배반할 수 없고 거역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때문에 고난과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동반자의식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 일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죽음도 불사했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목숨 걸고 전했던 단순한 예수부활이란 복음이 오랜 그리스 로마세계의 철학과 종교사상뿐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뒤엎어놓았다는 점이다. 그리스 로마세계에 ‘부활’이란 개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신화에 나타난 부활개념은 기껏해야 포도열매의 신인 디오니소스나 계절의 신인 페르세포네 또는 음부의 세계를 살아서 빠져나온 헤라클레스의 이야기 정도이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산다는 믿음은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철학자들의 비웃음을 산 것처럼 기독교 밖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은 사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와 로마는 기독교의 양대 산맥인 서방교회인 천주교와 동방교회인 그리스정교의 산실이자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는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다. 바울이 부활을 전파했을 때 비웃음을 샀던 바로 그들 나라들이 부활신앙의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부활신앙과 체험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고, 부활의 기쁨을 주며, 부활의 능력을 준다. 구상 시인의 노래처럼,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가 된다. 이 부활의 소망과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능력이 삶 속에서 언제나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겁쟁이들이었고, 배신자들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토록 능력 있는 사람들로 탈바꿈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을까? 그들로 하여금 복음전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한 힘이 무엇이었을까? 한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먹게 하는 표적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랐고, 왕이 되어 그들의 세속욕망을 채워주길 바랐던 속물들이었다. 머지않아 그들은 예수님이 만나를 내려 먹게 하지도 않고, 왕위에 올라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주실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 거는 희망이 컸던 만큼 실망이 컸다. 희망은 좌절로 바꿨다.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열광했던 민중이 채 몇 날도 못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흥분하는 것도 지켜봤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했고, 도망했으며, 가룟 유다의 음모에 동참했을 가능성도 있다.
예수님의 활동초기에는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속욕망을 채워줄 정치군사적 메시아로 추앙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 되어 예수님이 그들의 바램을 이뤄줄 속칭 영웅이 되지 못할 자란 것을 알고 대부분 예수님 곁을 떠났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 거는 기대를 아주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기대감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예루살렘에 나타났을 때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군사적 메시아가 되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셨다. 그리고 그 며칠 사이에 정치적 음모와 타협과 배신이 암암리에 이뤄졌다. 그 중심에 열두 제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돌변했다. 스승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한 배신자들이었고, 비겁자들이었던 제자들이 갑자기 변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 있는 자들로 바꿨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머리가 땅을 향한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님이 왕위에 오른 후에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했던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목 베임을 당했고, 요한은 노년에 밧모의 채석장에 유배되었다. 그 밖의 제자들도 모두 영웅적 삶을 살았다.
과연 그들은 변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변모하였다. 이 큰 변화의 원인이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오순절의 성령임재사건에 있다는 것이 보편적인 결론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제자들에게 부활체험을 갖게 했는데 이것을 일컬어 현재적 부활체험이라 말한다. 현재적 부활체험이란 영혼구원을 말하기도 하고, 삶의 태도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말하기도 한다. 동굴무덤에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와 동일한 육체부활을 약속하셨다. 이 육체부활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있을 미래부활이다. 예수님께서 체험하신 부활이 육체부활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상이 사장되고 않고, 깨달아지고 교회출범과 성서기록을 통해서 널리 전파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현재적인 부활을 체험하고 계시다. 한 때 제자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다. 그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재물과 명예와 권세였다. 영적세계나 정신세계로 볼 때 그들은 죽었던 자들이다. 그랬던 자들이 더 이상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진정한 부활체험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부활사건, 오순절 성령임재사건을 차례로 겪으면서 현재적 부활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부활체험이 그들로 하여금 이전과는 180도 다른 사람들로 변모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부활체험이 역으로 스승의 고귀한 죽음을 본받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들이 체험한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첫째,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능력과 지혜가 크다는 깨달음이었다.
기독교를 적대하는 반기독교연합에서는 제자들의 영웅적 순교가 오히려 하나님이 없거나 있다 해도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자신들의 세속욕망을 채워줄 수 없는 무능함과 무지함을 본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죽음을 개죽음이라고 말한다. 한때는 제자들도 이들과 크게 다른바가 없었다. 그런데 스승의 죽음과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임재사건을 차례로 겪으면서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아파하셨고, 함께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하나님이 동일하게 그들과 함께 그들의 고통 중에 계시고 그들이 아파할 때 그들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다. 깨닫기 전에는 이 사랑을 현실의 고통에 무력하고 무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표적을 구하던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싫어하고, 지혜를 찾던 헬라인들이 어리석게 생각했던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능하고 무지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있고난 후에는 그것이 영적이든 정신적이든 혹은 육체적이든 죽었던 사람을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째, 엔도 슈사쿠는 그의 예수의 생애와 예수 지하철을 타다에서 제자들의 변모의 원인을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동반자의식에서 찾고 있다.
엔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남긴 그 유명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괴로움을 호소한 것이 아니라, 성구 또는 기도문을 외우신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일상사였다. 운명직전에 남기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시편 22편 1절과 31편 5절의 내용으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시편을 중얼중얼 암송하시면서 그 엄청난 고통을 견디셨던 것이다. 그 가운데 몇 소절이 목격자들의 귀에 들렸던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보인 예수님의 태도는 제자들에게 충격적이었다. 예수님은 배신자들과 박해자들을 원망하지 않고, 용서와 사랑으로 일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격자들의 귀에 들린 이 기도는 상상을 초월한 무한 사랑이었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조차 배신자요 비겁자인 제자들을 필사적으로 사랑하셨다. 엔도는 이 스승의 사랑이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예수님은 죽었지만, 늘 자기들 곁에 계시다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감정이 제자들에게 생겨났을 것이고, 생전에 들려주시던 말씀을 지금도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동반자의식이라고 말한다. 이 동반자의식은 오순절 성령임재이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신앙의 발전에 기여했을 것이다.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임재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른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임재사건이 있고난 후부터 현저하게 달라졌다. 사상과 태도에 변화가 왔다. 그동안 땅에 두었던 소망을 하늘에 두었고, 일시적이고 유한한 세속욕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였다. 일신의 안일과 안락을 위해서 보물을 땅에 쌓으려하지 않고, 하늘에 쌓기를 소망하였다. 제자들은 부활사건과 성령임재사건이후 비로소 땅의 것보다, 세속적인 것보다, 일시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것보다 더 높고 더 넓고 더 깊고 영원한 것, 저 하늘의 것, 영적인 것이 참이요 실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땅의 것을 하늘의 것의 모형과 그림자와 예표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참인 하늘의 것에로 모든 채널을 맞췄다. 그들은 더 이상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비난과 추방 그리고 순교 말고는 얻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금전적인 이익은 확실하게 없었다. 만약에 그들이 조금치라도 이득을 취하려했다면, 그들은 그들이 이전에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그와 함께했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인가 그들이 체험한 충격적인 사실과 다시는 배반할 수 없고 거역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때문에 고난과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동반자의식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 일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죽음도 불사했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목숨 걸고 전했던 단순한 예수부활이란 복음이 오랜 그리스 로마세계의 철학과 종교사상뿐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뒤엎어놓았다는 점이다. 그리스 로마세계에 ‘부활’이란 개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신화에 나타난 부활개념은 기껏해야 포도열매의 신인 디오니소스나 계절의 신인 페르세포네 또는 음부의 세계를 살아서 빠져나온 헤라클레스의 이야기 정도이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산다는 믿음은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철학자들의 비웃음을 산 것처럼 기독교 밖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은 사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와 로마는 기독교의 양대 산맥인 서방교회인 천주교와 동방교회인 그리스정교의 산실이자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는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다. 바울이 부활을 전파했을 때 비웃음을 샀던 바로 그들 나라들이 부활신앙의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부활신앙과 체험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고, 부활의 기쁨을 주며, 부활의 능력을 준다. 구상 시인의 노래처럼,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가 된다. 이 부활의 소망과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능력이 삶 속에서 언제나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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